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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관리자 2021-11-30 (화) 15:16 3년전 1030  

본문) 합 2:1~4, 마 25:1-13, 롬 13:8-14 


o 세 분문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대림절 둘째 주일이다. 완연한 겨울에 접어든 날씨이다. 이번 겨울은 과연 어떤 겨울이 될까? 듣기로는 아프리카 남아공에서 발견된 코로나 신형 변이 바이러스인 ‘오미크론’ 때문에, 전 세계가 큰 공포 속에 빠져들고 있다. 우리나라도 모처럼 시작된 ‘위드 코로나’의 분위기에 찬물을 껴안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 그러면서 귀에 들어온 어느 경고 한마디가 맘에 걸린다. 


‘이번 남아공 발(發) 변형 바이러스의 창궐은 선진국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백신도 부자 나라들이 독점하고 그 혜택에서 제외된 빈국들은 더 악순환에 빠져들게 되면서, 결국은 약소국들이 코로나 악성 제조와 번식에 숙주(宿主)노릇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는 분석이다. 


무척 가슴 아픈 말이다. 진정 함께 살려고 노력하지 못하고 자기만 잘 살려고 하면, 그것은 한없이 어리석은 선택임을 새삼스럽게 일깨워 준 뼈아픈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아야 모두 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제대로 실천하면서 살게 될까? 다시 그곳 아프리카 반투족의 격언인 ‘우분투’를 회상에 본다.-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 이래저래 우리는 이 대림절에 우리의 잘못된 의식구조가 변화의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가야만 하겠다.  


오늘 말씀에는 새로운 유형(類型)의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한다. 그것은 말과 입으로 외치는 사자가 아니라, 글과 문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자(使者)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의 사자들의 입을 통한 외침과 선포 중심의 사역만을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오늘의 말씀 속에서는 주의 묵시를 기록하고 판에 새겨서 누구든지 그 내용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유형의 사자가 등장한다. 그가 선지자 하박국이다. 이것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그 기록된 말씀은 결국 신앙의 혼란과 어지럼증에 방황하던 당시의 신앙인들에게 믿고 기다리는 힘을 안겨주었고, 유행이나 세상 풍조가 아닌 오직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을 더욱 담대히 의지하며 살게 한 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과 선교의 역사에도 구원과 일치의 동력을 제공하는 데, 큰 기여를 해주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세계 선교의 대임을 부여받았던 사도 바울은 바로 이 하박국 예언의 말씀에 목숨을 걸었다. 즉 기독교가 세계 구원의 종교가 될 핵심적 거점 말씀을 바로 이 말라기의 기록문에서 취해 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제2의 말라기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그 믿음 중심의 구원론은 구원의 조건을 혈통이나 업적이나 선행이나 탁월함 등의 인간적 조건들 속에서 찾으려는 숱한 유혹들을 차단하면서, 오직 순수하게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 누구나 하나님의 구원 잔치에 들어가게 됨을 알렸다. 


또 한 사람, 중세기의 종교개혁자 루터가 제3의 하박국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95개조의 논제를 대학 게시판에 글로 써 부쳐서, 당시 교황의 면죄부 발행들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좇은 것인지를 토론해보자고 도전하였다. 그런 행위는 그가 본 말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라는 계시와는 전혀 부합되지 못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성직자용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세계의 문을 활짝 열기도 했다. 중세 르네상스 시대를 견인하고 나오기도 했다. 결국 루터는 문서의 힘, 글의 힘으로 우문(愚問)의 종교를 구원과 상식(常識)과 이성의 종교로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다. 


말은 말대로의 강점이 있다. 현장을 장악하고 이끄는 강력한 힘이 발휘된다. 하지만 정확한 글은 그 무게감이나 영향력이 크다. 표준과 목표를 세우고 지속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고 이끌어가는 데에는 글과 문서의 힘은 결정적이다. 우리 역사와 신앙을 이끌어가는 문서인 성서도 바로 그런 글과 글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힘 때문이 아닌가! 말 중심은 듣는 자들의 입장에서 서로 갈라질 수 있으나, 글은 전체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해방 후, 한국교회에는 세 분의 거두(巨頭)들이 있었다고 한다. 한경직 목사와 김재준 목사와 송창근 목사였다. 그런데 특징들은 서로 달랐다. 한 목사님은 말에 능한 분인데, 김 목사님은 글에 힘이 있었고, 송 목사님은 이 둘 모두에 능한 분이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한 목사님은 설교로 교회 현장을 키웠고, 김 목사님은 신학자 중심의 인물들을 키워내셨다. 하지만 이 둘에 능한 분이신 송 목사님은 꽃을 피워내기도 전에 납북(拉北)되는 바람에, 그만 그의 꿈과 의지가 발휘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송 목사님의 납북에 무척 아쉬움을 갖는 분들은 지금도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가 계셨다면, 지금의 장로교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에게는 말과 글을 묶어낼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못 이룬 과제들이 우리들에게 부여된 것이다.  


1. 예언서 / 합 2:1-4 / - “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하박국은 니느웨가 바벨론과 메데인들에게 패하고 애굽까지 바벨론에게 패하면서,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바벨론에 사로 잡혀 가던 주전 605년-597년경에(왕하24:10-16참조) 등장한 인물로 보인다. 그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런 준비 없이 받은 예언자가 아니라, 불행한 나라와 역사에 대한 아픔을 안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기도로 매달린 예언자였다. 특히 그는 악인(바벨론)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유대인)을 삼키고 패역하는데,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는 이유가 궁금했다.

   

1)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응답하셨는데, 그 내용과 형식은 매우 독특했다(2절). 그것은 당신이 주시는 묵시(默視-Revelation)를 받아서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모든 사람들이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지시였다. .


2) 그러면서 하박국이 그 묵시와 성취에 대한 신뢰를 확실히 갖도록, 추가 말씀을 덧붙여 주셨다. ‘이 묵시는 정(定)한 때가 있는데, 그 종말이 속히 이를 것이며,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3절,사8:1,30:8,렘30:2-3참조) 


3) 그러면서, 기록할 말씀으로 주신 핵심적 내용은 이랬다 -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4절). 


☞ 이 말씀은 죄인을 죽이는 교만(驕慢)의 특성과, 의인을 살리는 믿음의 특성을 동시에 전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교만은 일관성이 없는 세상의 세류에 뿌리를 둔다. 그러기에 조금만 맞으면 기고가 만장해지고 어긋나면 쉽게 주저앉는다. 하지만 여호와께 믿음을 두고 사는 자는 불변의 진리에 기반을 둔 삶이기에 세류에 전혀 요동하지 않는다. 마치 노아처럼, 기다림과 준비성, 신실성과 인내로 반드시 그날과 그 때를 잘 기다린다. 결국은 믿음이 그를 살린다!  

 

2. 복음서 / 마 25:1-13 /  “ 깨어 사는가 – 그 나라의 빛에 내 삶이 조명 받고 있는가 ”


하박국에서 ‘교만한 자와 믿음의 사람’이란 차원으로 인간을 구별했듯이,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신랑을 맞이하려는 모든 자들에게 ‘열 처녀(신부 들러리들) 비유’를 통하여, 결국 천국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과 들어가게 된 슬기로운 처녀들로 완전히 구별된 모습을 보여준다. 


신랑 맞이할 준비(인자의 오심)는 똑 같이 했으나, 한 부류는 탈락했고, 또 한 부류는 영접되었다. 이것은 마치 믿음 생활을 같이 하고서도, 재림의 그 날인 마지막에서는 전혀 다른 버림과 선택의 갈림길에 들어서게 될 것을 말한 것이다. 환희와 통곡이 교차하는 그 시간이 발생할 것을 말한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나? (마7:21-23, 13:24-27참조). 


1) 가장 결정적인 사유는 충분한 준비를 했느냐 여부였다(3-4절). 미련한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 모두는 다 신랑 맞이할 등(lamp)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멀리서 오는 신랑이 지체되자,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여분의 기름을 가진 다섯과 등잔 속의 기름이 전부인 다섯의 반응이 확연히 엇갈린 것이다. 정작 신랑이 올 때, 기름이 바닥난 이들은 기름 구하고자 마을 상점을 찾아 뛰어나갔으나, 여분을 가진 이들은 여유롭게 충전하여 빛 가운데 신랑을 영접했다(10절).  


2)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다시 준비하거나 보충하거나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온전히 냉혹한 심판과 판정만 있을 뿐이다. 입장 못한 처녀들은 문 앞에 와서,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11절)라고 절규했으나, 그들에게 주어진 응답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절)가 전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던 다섯은 이미 혼인 잔치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있으나, 입장 못한 다섯은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잔인하지만, 그게 현실인 때가 온 것이다.  

 

3) 여기에서 말하는 신부의 둘러리들은 누군가? 교회 공동체를 말한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을 말한다. 이들의 기다림은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재림으로 결정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때가 정(定)해진 게 없다. 각자가 주님의 개별적 소환을 받게 될 뿐이다. 그 날과 그 때 역시 자신도 모르고, 오직 주님만 아신다. 그런 점에서 ‘교회나 성도는 항상 기다리는 자들이며 준비하고 사는 자들’이다. 


4) 중요한 것은 나의 실존이요 대처 상황이다. ‘슬기로운 자로 사는가, 어리석은 자로 사는가’.  

주의 마지막 말씀처럼(13절),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더라도, 나는 지금 깨어 있나, 자고 있나‘가 문제이다. 당연히 깨어 살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는 깨어 살고 있나? 


5) 깨어 있음은 비록 인자의 오심이 지연되더라도(24:48참조), 인자의 도래와 그 영광의 그 날을 면밀히 대비하여, 그 준비 태세를 지금 잘 갖추고 있음을 말한다(24:44 참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오심(파루지아)과 그의 미래의 나라가 현재의 내 삶을 전적으로 규정하게하고, 주도(主導)하도록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세상의 풍조나 육정에 따른 삶에 끌려 다니지 아니한 삶의 상태요,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며 사는 상태이다(마6:33 참조)   


3. 서신서 / 롬 13:8-14 /  “ 사랑으로 행하라, 오직 주 그리스도 예수로 옷 입으라 ”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관한 진리 선포를 말라기 예언이 내 걸었고, 그런 깨어 있는 삶의 총론적 정의를 복음서의 말씀이 맡았다면, 그 깨어 사는 삶의 각론적 매뉴들은 바울 사도의 서신서인 로마서가 맡았다고 보인다. 바울은 의인의 깨어 사는 삶의 내용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다 상세히 증언한다. 특히 그는 여기에서 율법만이 성도의 윤리적 삶을 책임질 듯하는 주변여론에 대하여, 그 차원을 훌쩍 넘어설 핵심적이요 포괄적인 신앙 윤리 하나를 제시한다.  


1) 바로 사랑이다. 사랑도 이웃 사랑이다. 이웃 사랑은 예수께서 직접 거론하신 십계명의 둘째 부분에 담긴 영역인데, 바로 그 부분을 끌어댔다(마19:18-19 참조). ‘사랑은 율법의 완성’임을 직설적으로 선언하였다(10절,갈5:14,마22:36-40참조)- ‘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


2) 그 이웃 사랑 속에는 십계명의 간음 금지, 살인 금지, 도둑질 금지, 탐욕 금지, 기타 모든 금지 계명들에 대한 해결책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선포하면서, 그러기에 이웃 사랑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성도들이 깨어 있는 참다운 실상이 될 것임을 강조하였다(9절). 아울러 그는 오직 사랑 이외에는 서로에게 아무런 빚(debt)도 지지 말라고 주문하였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만으로도, 전체 율법들 613가지를 모두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8절).


3) 동시에 바울은 현실적인 악의 현존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주의를 주었다. 그러면 그가 본 이 시대의 악의 영적 실체들은 무엇인가? 모두가 자신에게는 어둠과 저주를 안겨 주는 일들이다. 그러면서 이웃과의 정상적인 관계들을 망가뜨리는 일들이다. 곧 방탕(orgies), 술 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13절), 정욕(gradify), 육신의 욕망 등등이다(14절,하). 오늘날을 보라. 이런 어둠의 노예가 되어, 얼마나 살인. 강간, 폭력, 가정 파괴 등이 난무하고 있는가-!

   

4) 하지만 바울은 이에 맞대응할 백신(vaccine)으로서, 빛의 갑옷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 것도 제시하였다(12,14절). 여기에서 빛은 성령과 주의 말씀이다. 이 빛의 갑옷은 모두 예수의 생명과 능력과 사랑과 인격을 공급해 준다. 그래서 육신의 어둠의 유혹과 도전을 능히 극복하게 해 준다. 육신을 따라 살아가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살아가게 하는 지혜와 능력과 마음을 선사한다. 곧 믿음을 좇아 살아가는 의인이 되게 한다. 


o 그렇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내 지식이나 경험이나 판단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시고 인도하시고 세우셔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따라 살게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이 바로 나를 살림을 믿자. 그 믿음으로 더욱 깨어 살아가자. 


자만이나 교만의 함정에 빠져들지 말자. 우리의 믿음의 여정이 저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결국엔 물거품이 되게 해서는 아니 된다. 심령에 성령의 기름이 늘 충만하게 하자. 특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항상 살아 역동하게 하자. 주님의 생명력이 강하게 역사하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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