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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1)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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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1)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관리자 2021-11-24 (수) 08:45 3년전 1054  

본문) 말 3:1~7, 눅 3:1-17, 계 3:14-22 


o 세 본문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예수께서 세상의 구세주로 오시는 계절인 대림절(待臨節-Advent)이 열렸다. 이 절기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적어도 그 분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리고 오신 메시아를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좋은 지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야 오시는 주님과 그를 맞이하게 될 우리 사이가 아름다운 만남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지난 2년간에 걸쳐 미증유의 코로나19로 인한, 인류사적 시련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위드 코로나’ 정책으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불안은 여전하다. 이런 때에 우리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도 치룬다. 이래저래 우리는 국민적 곤경과 시련을 극복해 낼 메시아적 지도력도 찾는다. 어떤 후보가 보다 메시아적인 지도력을 갖추었고, 특히 상처가 깊은 백성들의 가슴을 치유해 줄 예수의 품성과 인격을 가진 인물인지를 찾게 된다.  


성서의 백성들은 본래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제국들의 오랜 지배들로 신음해 오면서도,  그들은 이 세상과 자신들의 삶에 참된 기쁨과 평화를 안겨 줄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다만 문제는 그런 기다림에 비하여 그 대비(對備)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메시아 맞이하는 데에도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어떤 준비가 필요한 지’를 알게 될 사전 정보가 필요했다. 그들 스스로는 깨닫기 조차가 불가했기 때문이다.


선지자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바벨론 귀환 이후, 자신들이 처한 오랜 곤경(困境)의 고리를 끊어줄 메시아의 등장을 바랬다. 하지만 그들은 오실 메시아가 과연 어떤 분일 지도 몰랐고, 또 오실 그가 과연 자신들의 기대만큼의 복과 은혜를 안겨 줄 분인지에 대한 의구심도 컸다. 당시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1:2)며,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2:17,하)라며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한 의구심(疑懼心)과 불평까지도 품고 산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인 말라기를 보내셔서, 당신이 준비하신 메시아가 어떤 인물인지를 일깨우기 시작하셨다. 말라기는 누군가? 구약 예언자들 중에 마지막 인물이다. 그것은 그만큼 약속된 메시아의 오실 때가 임박했음을 말한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오실 메시아는 어떤 분인지를 전하였고, 그들이 어떻게 대비하여야 할 것인지도 전했다. 그러면서 ‘내게로 돌아오라’(7절,중)는 하나님의 간절한 당부도 전했다. 


하지만 선지자의 그런 통보를 들은 백성들은 여전히 어떻게 여호와께 돌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감(感)을 잡지 못했다. 그래서 질문하였다. ‘우리가 어떻게 돌아 가리이까?’(7절.하). - ‘How are we to return?’ 그 때부터 이런 질문은 구원의 길을 찾고, 메시아를 영접하려는 자들의 공통적인 질문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오늘 나머지 본문들에서도 이런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주께서 보낸 사자의 외침을 듣고 두려워진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3:19,12,14절). 소아시아의 7교회 중의 하나인 라오디게아교회 역시, 다시 오실 예수 앞에서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어야할 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다만, 자신이 ‘부자요 부족함이 없다’는 현세적 자족감에 빠져 지내면서, 미지근한 신앙인으로 살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내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내 음성에 문을 열어, 내가 네게 들어가게 하라’(3:19-20절). 

    

우리는 누군가? 우리 역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 역시 현세적 삶의 질서와 유혹에 붙들려서 살기에, 오실 주님 맞이에 소홀한 것도 사실이다. 주님 앞에 어떤 존재로 서야할 지도 잘 모른다.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성찰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기에 우리도 정신을 차리고 대림의 주로 오실 이에게, 겸손히 묻고 길을 찾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본문은 대략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의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한다. 두 가지 것들인데, 하나는 성전 지도부의 정화와 올바른 제물 드림이다(말3:1-4 참조), 또 하나는 가난한 이웃이나 교회와의 공의와 정의로운 교제 회복들이다(말3:5,눅3:7-14, 계3:19-20절). 


1. 구약 / 말 3:1-7 /   “주께 돌아오는 길 – 성전 질서회복 & 건강한 사회질서 추구 ”  


이스라엘은 유대교가 국가 종교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종교지도부와 백성들은 생활속에서도 서로 얽혀 산다. 그런데 주께서 보시기에, 당시의 유대교는 양측 모두에게 죄과(罪過)과 컸다. 지도층인 제사장과 레위인 층에서는 반(半)이교적인 사이비 예배에 관여하는 행위가 잇달았고, 간통과 거짓 맹세들로 타락해 있었다. 특히 불분명한 소유 관계로 인한 타락상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슥5:3-4참조). 당연히 건강한 예배와 종교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예컨대, 날품팔이의 품삯을 빼앗고, 피난민과 난민으로 정착한 이방인들과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경제적으로 돌봐준다는 구실 아래 짓밟은 일은 당시 지배 계층의 전형적인 죄였다(신24:17,27:19,렘7:6,겔22:7참조). 그런 부정한 손으로 제사하고 예물을 드릴 때, 그것을 받게 되실 여호와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당연히 분노와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 백성들의 신앙도 정직할 리 없었다. (오늘 본문 이후의 참조). 백성들이 당연히 온전히 바쳐야할 십일조와 헌물을 드릴 리가 없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8-12절 참조).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러기에 그 잘못된 부정의적 구조에 대한 혁신은 오실 이에게는 매우 시급히 개혁(改革)할 핵심 과제였다(1절).  


1) 여호와께서 파송하실 두 메신저들이 예고되었다(1절). 앞부분에서의 ‘사자’는 그 뒤에 오실 분을 위한 전위대로서, 길을 예비하고 준비할 자이다. 그 사자는 세례 요한이다(11:10,막1:2). 뒷부분에서의 ‘주’와 ‘언약의 사자’는 하나님 자신의 위치에서 권세를 이 땅위에서 펼치실 분이시다.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렘31:31-33,히12:24 참조). 


2) 그가 오시면, 먼저 ‘그의 성전(聖殿)’에 임하신다(1절,중). 그러면서 심판의 사역을 시작할 터인데, 대표적인 일은 바로 당신의 성전을 향한 정화(淨化) 작업이었다(2-4절). 이는 그 만큼 성전에 관련된 모든 분야는 당신을 위한 영역으로 간주하시면서(마16:18참조), 그곳이 진정 당신의 뜻에 부합된 곳인 지를 살피고, 그 잘못에 대해서는 당신의 날(여호와의 날)에 엄중히 다스릴 것임을 통보하신 것이다. 부패한 성전에서 구원의 복음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특히 소유와 제물에 대한 문제점들이 많았다. 그 바람에 그들이 받아들이고 봉헌하는 제물들에는 성결(聖潔)과 공의(公義)의 문제가 많았다(3절).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그로 인한 백성들과의 관계 파괴, 정의 실종, 사회질서 혼란들 등등의 파장이 깊었다. 따라서 그런 현장 상황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없었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종교 생명의 기능도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 보내신 사자의 역할은 당신의 성전의 기능이 정상화되도록 개혁하는 작업이 되었다.   


3) 동시에 하나님의 냉엄한 심판의 대상들도 명시되었다(5절). 대체로 힘을 가진 자들이 그 대상들이다. 점치는 자(sorcerer-거짓 예언자 종류),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한 자, 노동자의 임금(賃金)을 착취하는 자,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는 자,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자, 그리고 전능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모두 그 대상들이다.    


4) 이런 범죄 하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야곱의 후손이라고 믿고 살았다. 행실과 믿음의 엇박자가 모두를 불행하게 한 것이다. 여호와는 명령하신다.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다. 그런 즉 내게로 돌아오라.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겠다’(7절.상-중). 


5) 이런 데도, 백성들은 우문(愚問)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 가리이까’(7절,하) 정답은 이미 주어졌고, 또 무엇을 회개하여야 할 것인지, 그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는 일이 무엇인지도 이미 답은 주어졌다. 그러기에 질문 대신에 회개와 새 삶의 결단 만하면 된다. 그런데 예고된 사자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역하게 되었을 때,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곳 후손들 역시 조상들의 그러한 예전 상황들을 여전히 재현(再現)하고 있었다.  


2. 복음서 / 눅 3:1-17 / - “ 회개의 세례 & 성령과 불세례까지 받아야 ”


말라기에서 예고된 주의 사자인 세례 요한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누가는 그의 등장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다룬다(1-2절). 그리고 그의 핵심 사역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물)세례 전파에 있음도 전한다(3절). 그러면서 오실 메시아 사역의 특성에 대한 증언도 선포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5-6절).    


주의 오심으로 기존의 세상과 문화에 대변혁이 따를 것임을 선포했다. 매워지고, 낮아지며, 곧아지고, 평탄해지는 세상이 오실 메시아를 통하여 실현될 것으로 전했다. 그것도 유대를 넘어 온 세상에까지 그의 공평과 평화가 확산되어질 것이다. 그러기에 이 외침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열망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참 복음(福音)이 아닐 수 없다(6절). 


1) 요한의 이런 외침은 온 유대 땅을 뒤흔들었다. 말라기 예언자 이후, 참 예언에 목말라했던 백성들에게는 단비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공격에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도 말하지 말라’는 엄중한 질책에도, ‘좋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도끼로 찍어 불에 던져지리라’는 무서운 경고에도-, 백성들은 그의 자기들을 향한 그릇된 안전 심리를 파괴하는 요한의 맹렬한 외침 앞에 인산인해(人山人海)로 모여 들었다(7-9절).  


2) 그들 중에는 일반인들 이외에도 죄인들의 상징인 세리와 군인들도 참여하면서, 그 경고에 찔림을 받아 요한에게 공통적으로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10,12,14절) 


3) 요한의 답변은 삶의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변화 요구였다. 곧 죄짓게 하는 직업을 떠나라거나 직업을 변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이 자기 권리에서 불이익과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注意)하고, 그 자리에서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보다 희생하며, 정의 실현을 하라고 요구하였다(10-14절 참조). 즉 그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제자들이기를 요구한 것이다(마16:24 참조).  


4) 요한은 이 점을 실천하는 데에는 자신이 전한 물세례 차원의 외적 구별만으로는 어렵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을 가능하게 할 또 다른 차원의 세례를 소개하였다. 바로 오실 예수께서 주실 ‘성령과 불세례’였다(16절). 이 세례까지 받아야 진정한 개혁과 변화인 마음과 영혼의 변화까지 견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오순절의 성령 세례까지 염두에 둔 권고였다. 그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알곡 신자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  


3. 서신서 / 계 3:14-22 /  “ 부요함으로 환난 중에 있는 가난한 이웃을 섬겨야 한다 ”


라오디게아는 저 멀리 위치한 히에라폴리스에서 흐르는 온천수가 통과하는 지점에 있다. 그곳에서 나온 온천수가 이곳을 통과할 무렵에는 그 물은 이미 미지근한 물이었다. 묘하게도 그런 물의 특성이 이 라오디게아 교회 식구들의 신앙적 특성과도 맞물려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지금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니,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절)라는 질책을 듣고 있다.   


게다가 그곳은 양모 산업의 발달과 은행과 의사 학교까지 있어서, 지역 경제의 사정이 양호했고 교회 형편도 좋았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17절). 하지만 바로 그런 물질적 풍요는 바로 그들의 영혼을 자기만 아는 영적 맹인이 되게 했다. 핍박과 박해에 시달리는 이웃 교회들의 환난에는 둔감했고, 그들을 돕는 사랑에는 매우 인색했으며, 참된 부요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소시민적 영적 맹인의 모습을 드러냈다(18절). 

   

1) 그러기에 그 교회를 주이시오, 아멘이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부활의 주께서 그들에게 특별 요구를 하셨다. 

☞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리라’(19,하-21절). 무슨 말씀인가?  


2) 의미는 이렇다. 그 교회의 부요가 진정 빛을 발하려면, 그들 부요가 이웃의 가난과 곤경을 채워주고 위로하는 것이 될 때이다. 즉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공동체로 나아갈 때이다. 그래야 그들의 부요는 빛을 발하게 된다. 그런 공동체라야 마지막에 우리 주님이 마련하신 하늘 잔치에까지도 초대받는 대상이 된다. 이게 성령의 일깨우심이다


o 금년의 대림절 맞이는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서로의 소중한 관계를 점검하는 일부터 하자. 서로를 적대적 공생관계 차원이 아니라, 진정으로 피차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섬기는 관계로 정착되어야 한다. 우리의 이웃을 향한 탐욕적 자세가 아니라, 상대의 권리와 형편도 배려하는 섬기미의 자세 회복으로 맞이하도록 하자. 교회의 안일한 태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힘겹고 도움이 필요한 약한 곳들을 위로하고 채워주는 자세 변화로도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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