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상 8:1~22, 마 11:16-24, 롬 7:5-13
창조절 여덟째 주일이다. 바깥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여서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단풍으로 아름다워진 산천을 찾고 싶은 부픈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 사정은 그 어느 때보다 걱정이 되고 우려가 된다. 전쟁의 기운이 엄습해 오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글쎄, 이런 위기의 현상이 왜 찾아온 걸까? 이전 정부에서는 이런 동족상호간의 전쟁 위기에 대한 긴장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전쟁위기의 각설이가 다시 찾아왔다. 왜 그럴까?
이전 정부는 내부의 일각에서 비난해온 종북이나 북한 대변인이란 비난을 들으면서도, 노상 대화와 타협으로 남북의 긴장완화를 통한 문제 해결에 집중해 왔다. 그때 미국이 조금만 도와주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남북왕래도 한참 진행 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틀어버리면서, 남북의 관계는 소강상태가 된 체로, 정권마저 반공보수 세력으로 넘어가고 만 것이다.
현 대통령의 대북관은 전 대통령과는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선제타격이니, 버르장머리를 고친다느니 하면서, 북한을 자극하고 적대감을 불러오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북한을 고립시키는 조치를 계속한다. 미국에 대한 매달림이 노골적이었고, 일본과의 정치 및 군사협력에도 적극적이다. 최근에 욱일기를 단 한미일 군사훈련을 독도 근해에서 전개하는 일까지 발생하면서 국민들을 놀라게도 했다. 북한이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 같은 여론몰이를 한다.
걱정이다. 북한이 더 악해져서 그런지, 우리 당국자가 더 자극해서 그런지 햇 갈린다. 문제는 우리 위정자의 종미와 친일의 태도가 너무 심하고 지나치다는 점이다. 그는 전쟁위험 때문에 무슨 짓을 못하겠느냐는 입장이지만, 국민들의 생각과는 크게 다른 듯하다. 북한이 우리에게 누구냐는 민족의식이 부재한 것도 제일 큰 문제이고, 일본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냐에 대한 역사인식도 큰 문제이다. 그리고 우발이라도 전쟁이 발발하면, 그 후유증과 피해를 어떻게 감당하려는가에 대한 고민과 책임의식이 전무한 듯해서, 그게 진정 큰 걱정중의 걱정이다.
그리고 미국을 지금처럼 맹목적으로 의존하면 최상일까? 일본은 우리를 위해 싸워줄 진정한 이웃으로 보아도 되는가? 최근 여당 대표가 ‘일본은 우리와 싸운 적이 없다’라는 망말과 허언을 쏟아냈다. 친일세력의 궤변들이 난무한다. 궁금하다. 정작 전쟁이 발발하면, 우리 대통령은 한번이라도 제대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전적으로 미.일의 하부 구조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지휘와 통제 하에 우리가 끌려갈 것이 분명한데-, 과연 우리 대통령은 어쩌자고 저토록 미일 의존적인가? 우리의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음이, 심히 부끄럽고 통탄스럽다.
마침 오늘은 교단이 정한 이단경계주일이다. 이단은 신앙세계의 독버섯 같은 파괴세력들이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단들이 많다. 교리상의 확실한 이단들도 있지만, 내용상으로 진리를 잘못 가르치고 오도하여 교회와 교인들의 삶을 망치게 하는 이단들도 매우 많다. 지난 번 선거에서도 이단들이 집단으로 모 후보를 지원하기까지 했다. 어떤 보고서를 보면, 통일교,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안상홍),정명석 등을 비롯해 약150여 단체의 이단들이 우리 주변에 득실거린다.
게다가 요즈음은 정치계를 업고 태극기 부대를 이끌고 선거운동 하다가 지금은 윤석열 보호를 외치는 전0훈도 사이비 이단이다. 또한 대통령 부부를 애워싼 무당(巫堂)들과 잡신 그룹들도 모두가 이 시대정신을 역행하게 만들고 나라를 거들 나게 하는 이단들이다. 그런 모습은 현 대통령의 청와대 이전과 그 후의 일련의 납득할 수 없는 정치.외교.통일 행보들 속에서 생생히 잘 드러났다. 이단들이 정치 맛을 보면서, 그 후유증에 나라가 위험 속에 빠져 들어간다.
이단은 종교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와 경제 등, 인간사회 전 영역에 퍼져있다. 가정도 공격 대상이다. 이단의 두드러진 특징은 좋은 것을 망치게 하고, 공익을 사익으로 빠져들게 하고, 공동체에 대 혼란과 갈등을 유발하여 결국엔 다 망하게 하는 악의 세력이다. 예수님 때에도 유대교가 구원의 최대의 장애가 되고 거침돌이 된 까닭은 그 종교가 율법의 문자에 빠져서 정죄집단과 이익집단이 되고, 생명과 구원을 안겨 줄 집단이 못된 까닭이었다.
우리는 사실 실존적으로도 매우 곤고(困苦)한 사람들이다. 우리 앞에 생명과 복, 저주와 화가 있는데, 우리의 선택이 늘 우리를 갈등하게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안에 죄를 쫓으려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선을 택하려는 경향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갈림길과 경계선상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여야 하느냐를 제대로 결정해야 한다. 오늘 본문내용 모두가 그러하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것(뜻)이냐 세상의 것(여론)이냐를 말하고, 복음서는 공동체를 위한 공감대(연대)냐 개인적 사감(손익 계산)이냐를 말하며, 서신서는 하나님의 힘이냐(복음) 자기 힘이냐(율법)를 선택하는 일을 말한다. 이런 상반된 대립 개념과 그 주어진 세계에 대한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그 결과와 열매가 결국 복과 화로 결정되고, 구원과 멸망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 분별력 향상은 말씀에 대한 복종과 꾸준한 자기 부정의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이제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의 닻줄을 분별하여서 굳게 붙들고 살자.
1. 구약/ 삼상8:1-22/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이라”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섰다. 오랫동안 하나님에게서 길을 찾고 물었던 마음이 이제는 인간 왕을 통하여 찾겠다고 변심(變心)한 것이다. 그들이 가나안에 입주하여 지낸 지, 약 400여 년 동안에 그들은 왕을 세우지 않았었다. 까닭은 자신들의 왕은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기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광야 40년 생활을 거쳐 젖과 꿀이 흐르는 지금의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여호와만이 자신들의 참 신(神)이요 왕(王)이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왕정체제가 아닌 사사(士師-Judge)체제로 나라가 운영되었다. 사사들이 여호와를 대리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목자로 일해 왔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유는 사사이자 선지자였던 사무엘이 늙으면서 그 후계자로 세운 두 아들들인 요엘과 아비야가 아버지의 신앙을 따르지 않고, 백성으로부터 이익을 따라 뇌물(賂物)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크게 잃었기 때문이었다(1-3절).
이는 하나님의 ‘뇌물을 받지 말라’(신16:19)라는 준엄한 명령을 파기한 일로서, 그 파장이 너무도 컸다. 사사체제에 대한 국민적 회의를 불러오면서, 모든 이웃나라들이 택하여온 왕정체제로 자기들도 옮기자로 뜻을 모아서, 사무엘에게 허락을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4-5절).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고민하던 사무엘은 여호와께 기도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호와의 응답은 ‘그들의 말을 들으라’였다(7절). 하지만 여호와의 쓰라린 마음과 우려만은 전해 주셨다.
여호와는 그들의 요구가 사무엘을 버림이 아니라 당신이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도록 저지한 것이며, 그들의 오랜 거스림의 행태의 열매라고 판단하셨다(6-8절). 따라서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되, 사전에 왕정 제도(制度)가 담고 있는 문제점과 실재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게 해주어서, 그래도 여전히 고집하면 그 때는 그들에게 인간 왕을 세워 주라고 지시하셨다(9절). 이스라엘의 왕정체제는 이런 과정 속에서 출범했다. 숱한 문제점들을 알고서도, 택한 것이다.
공지된 왕정체제의 성격은 이러했다(10-18절). 아들들을 징집(徵集)할 것이며, 그들에게 계급을 부여해서 왕과 나라 유지를 위하여 나라 살림도 하게하고 무기도 만들어 싸우게도 하며, 딸들도 차출하여 궁중 살림과 조리를 맡게 하고, 나라 안의 가장 좋은 소산물은 자기 신하들에게 지급하며, 십일조 세금을 수금해서 신하들에게 봉급으로 주고, 백성들 중의 뛰어난 재원들을 차출해서 왕을 위해 일하게 하며, 왕의 농장 경영에도 불려가 그의 종으로 일할 것이다.
그러면서 사무엘은 이런 말을 첨언(添言)했다. ‘그때는 그런 왕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나, 여호와는 그 일로 응답하시지는 아니할 것이다’(18절). 왕 때문에 전 백성들이 큰 가슴앓이를 하게 될 터인데, 그것 때문에 후회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될 터인데-, 그 때에는 여호와께서 그런 기도에는 응답하지 아니할 것이다는 선언이다. 실로 무서운 경고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은 더 강하게 요구했고, 결국 이스라엘은 왕정체제로 들어가게 된다. 말씀에 마음이 완고해진 백성들을 본다. 이는 민족 전체의 위기의 큰 신호이다.
2. 복음서 / 마11:16-24 /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구나”
본문은 예수께서 당시의 유대교 사회의 강박한 마음을 탄식하며 하신 말씀이다. 곧 공감력(共感力)을 상실한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두 사람인 세례 요한과 그의 아들이신 예수를 대하는 유대인들의 대응에서 그 완고한 마음이 생생히 들어났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요한이 와서 금식하며 예언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는,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예수가 오셔서 죄인들과 먹고 사시며 교제하는 것을 보고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판하며 격하(格下)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8-19절). 실로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그들에게 합당할 것인지, 대답이 나오지 아니하는 시대였다.
주님은 그런 시대를 공감력을 상실한 세대로 규정하셨다. 즉 그들을 향해서 기쁨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는 반응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선포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였겠는가! 자칫 선포자들이 스스로 힘이 빠져 주저앉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주님은 중심을 잡을 말씀을 이렇게 주셨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9절, 하). 행위 자체의 가치에 비중을 두는 것이 지혜란 말씀이었다.
그런 중에 주님이 가장 가슴 아프게 보신 대목이 나온다. 곧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돌봄을 가장 많이 받았던 고을들이, 그래서 주의 말씀과 기사와 표적을 더욱 많이 받았던 그 지역들이, 더욱 회개하지 아니하고 더욱 교만하여 죄악과 범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들이었다(20-24절). 그들이 누군가? 세 곳들이 대표적으로 지목(指目)을 받았다.
고라신이요 벳새다 였다(21절). 그리고 가버나움이었다(23일).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압도적인 사랑과 돌봄을 받기만 하고, 회개는 없는 곳들이었다. 특히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거주지요 주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그곳들이 말씀과 증거들을 많이 받았으나, 돌이킴이 없었던 곳들이었다.
이런 그들의 배신적인 행태에 주님이 분노하셨다. 이는 마치 옛날 가나안 입주하던 그들의 조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압도적으로 받고서도, 배가 부른 후에는 그 하나님께 사랑을 주지 않고 그 대신 그곳의 신들과 우상 문화와 풍습에 더 빠져 살아서, 여호와의 진노와 질투를 극렬하게 받았던 바로 그 모습과도 흡사하였기 때문이다(신31:20-21 참조).
만일 이방인의 도시들인 두로와 시돈이 그런 주의 사랑을 받았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의 자리에 있어서 심판 날에는 유대보다 잘 견디어 냈을 것이며(21-22절), 소돔 같은 곳도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교만해진 가버나움은 음부(陰府)에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예고하시면서,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도 선고하셨다(23-24절). 우리의 신앙 구조에도 이렇게 제2의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이 없는 지를 깊이 성찰해보아야 하겠다. 무엇이 우리를 지금처럼 말씀과 진리에 무반응하게 만들고 있는가?
3. 서신서 / 롬 7:5-13 / “ 이제는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지니라 ”
본문은 우리가 율법을 붙잡고 사느냐, 성령이 주신 복음을 붙잡고 사느냐를 말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극복해야할 과제가 있다. 그것은 율법이 득세하는 곳들에 죄가 더욱 기승(氣勝)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에덴 사건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는 계명이 주어지면서, 그곳엔 그 법을 파기하는 죄가 존재하고 있음이 드러났고, 또 결국 첫 사람들이 그 죄의 유혹에 빠져들었다는 점이다(창2:17, 3장 참조). 저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예수의 교훈과 표적을 많이 접하고 살았으면서도, 화개 할 줄 모르고 더 악해진 사연과도 상통한다.
그 이전에는 순박했던 그들이 법이 등장하면서 질서를 파기하는 죄인으로 돌변한 것이다. 바울은 그 현상을 이렇게 말한다. ‘인간 내면에 자리하던 탐심(貪心)이 ‘먹으면 죽으리라’라는 계명이 나오자, 죄는 살아나고 자신은 죽게 되었다‘(8-9절). 결국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10-11절). 그렇다고 율법과 그 계명을 악하다고 탓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죄를 적발할 능력을 가진 선한 율법을 어찌 탓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들에게 율법과 계명이 아닌 또 다른 탈출구는 있는가? 있다! 이는 더 이상 율법이나 계명에 의존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대안인 예수와 그의 복음과 그가 주신 성령의 법을 좇아서 살아가면 된다. 이 점에서 사도 바울의 다음의 증언들은 매우 결정적 해답이다 :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했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害)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나, 내가 가진 의는 율법으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義)라 ”(빌3:7-9참조).
o 이단은 멀리 있지 않다. 진리를 좇아 산다고 해도, 조금만 방심하면 우린 역시 혈육과 육정이 지배하는 구덩이에 떨어진다. 심하면 내 자신이 이단이 될 수도 있다. 나를 믿지 말아야 한다. 율법은 내 안의 죄성을 일깨워 주고 경고하는 파수꾼이지만, 나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예수와 그의 복음만이 우리를 돌보고 보호할 피난처이다. 그의 성령의 지속적인 도움이 엄마 젖처럼 공급되어야 된다.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자. 말씀에 가슴이 막힌 이스라엘은 안된다. 공감력을 잃은 삶의 위험하다. 사랑과 은혜, 믿음과 감사의 터 위에다 둥지를 마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