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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신년주일

관리자 2020-01-01 (수) 02:07 4년전 1728  

본문) 막 1:1-11, 사 62:1-7, 롬 11:13-24

 

2020년이 경자(庚子)년 쥐띠 새해가 열렸다. 교회 절기로는 성탄절 마지막 주일인 둘째 주일이기도 하고, 새해맞이 신년주일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인데, 여러분들 부디 복된 꿈을 많이 꾸시고 그 꿈이 성취되기도 하는 뜻 깊은 새해가 되시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도 한 해의 표어를, ‘화해의 성령이여, 하나 되게 하소서’(욜2:28-32,고후5:18-19,요17:22-23)라고 선포하였다. 분열과 갈등이 심화된 세상을 치유하는 교회로 나가자는 것이다. 

 

다행히 국회에서는 지난 30일에 현 정부가 집권 공약 1호로 목표 삼았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이 통과되면서, 그 동안 무소불위의 검찰공화국이란 오명을 씻어낼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디디기도 했다. 이 법은 얼마 전 통과된 다당제를 위한 연동형 비례제 선거법과 함께, 우리의 민주주의 발전의 새 출발을 하게할 것이다. 이제 얼마 후에 있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다 성숙한 지도력을 가진 의원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하게만 되면, 우리 정치도 크게 성숙해질 것이다. 

 

오늘 주일은 비록 성탄절기 마지막 주일이지만, 금주를 여는 첫날인 월요일인 내일(6일)은 셋째 해 주현절을 여는 주현일(主顯日)이기도 하다. 주현절은 어떤 절기인가? 예수께서 아기의 단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펼치셨던 시기를 말한다. 이 계절에 주님은 크게 세 가지 메시아 사역들을 펼치셨다.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셨다! 주님은 그런 일들을 통하여 망가진 세상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려고 활동하기 시작하셨다. 

 

마가복음의 기자 마가는 바로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들을 이렇게 정리하여 증언하였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의 시작(始作)이라’(1절). 그런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예수를 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그 아들을 향하여 한 마디 하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절). 

 

마침 우리도 경자년 새해 첫 주일 맞이를 이렇게 함께 모여 시작한다. 의미가 크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시작을 보시고, 축복하신 바로 그 말씀을 우리도 관심하지 않을 수 없잖은가-! 동시에 나도 그런 축복을 받을 새해가 되고 싶잖은가? 그러니 그 축복이 내 것이 되기를 소망하며, 복창해보자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절).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그렇다. 오늘 새해 신년주일에 우리 하늘 아버지께 이런 고백을 드리며, 마음을 다하여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께서도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마침 이 주제의 복음송도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하다. 그러므로 이제 다 함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새해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새롭게 모아보자.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願)하네 /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 

내가 원하는 한 가지 /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 내가 원하는 한 가지 /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 

겸손히 내 마음을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케 씻어 주사 /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 

내가 원하는 한 가지 /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 

내가 원하는 한 가지 /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 ’

 

오늘 우리가 첫 주일에 받게 된 세 본문의 주제도 함께 모아져 있다. ‘여호와의 기쁨 되기를’ 바라는 내용을 다 담고 있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이미 하늘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기쁨이심을 공인 받으셨고(11절), 구약 이사야의 예언서도, 포로생활에서 회복될 당신의 백성 새 예루살렘을 여호와가 기뻐하시리라고 예고하셨으며(4-5절), 서신서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에서 인자하심에 머문 자들에게 당신의 기쁨이 있으심을 밝히셨기 때문이다(22절).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예수 복음의 시작이 왜 하늘 아버지의 기쁨을 드러낸 일이 되었는가를 상세히 보여준 내용이다. 거기에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철저한 대비 사역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은 바로 세례자 요한을 파송하셔서, 그로 하여금 오실 메시아 예수의 활동이 차질 없이 전개되도록 길을 닦는 일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세례자 요한은 선지자 이사야에서 이미 예고한 주님의 사자(使者)였다(사40:3, 말3:1 참조). 

그의 역할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일이었고(2절), 오실 길을 평탄하게 하려고 정리(整理) 작업을 수행할 일꾼이었다(3절). 그의 임무 수행은 광야를 무대로 하여 그 시대를 향하여 외치는 자의 소리(voice)로 일을 했다. 그렇다면 그 소리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2) 요한이 집중한 최대의 정비 작업의 내용이 무엇이었나? 바로 모든 백성들 안에 자리한 죄(罪)를 지적하며 공격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통렬한 외침을 통하여, 사람들이 자기 죄를 확인하고, 그 죄인으로 사는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결국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을 찾도록 도와주고자 하였다. 그래야만 그들은 죄가 없는(no sin) 의(義)로운 분으로 오실 메시아를 거부하지 않고, 기쁨으로 영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렘23:5절, 요1:12-13참조). 

 

3) 그의 회개운동의 특징은 일상생활에서 수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맞춤형이며 조직적이라는 데에 있었다(눅3:10-14참조). 아브라함 핏줄 후손은 회개 없어도 무조건 구원 받는다는 허상도 사정없이 공격하셨다(눅3:8). 당시 대표적인 죄인 그룹들인 부자, 세리, 군인들이 자기 앞에 나오자, 그들을 향하여 책망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안들을 회개의 내용으로 제시하였고, 그 회개한 구체적인 징표로서 물세례(洗禮)도 받도록, 영적 운동을 캠페인 한 것이었다. 

 

4) 선포자인 자신은 어떤 모습을 보여 주었는가? 첫째는 철저히 검소(儉素)하였다(6절). 그리고 겸손(謙遜)하였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백성들의 시선을 완강히 차단하고, 오직 오실 메시아 예수만을 높이고 띄우는 일에 전념한 것이다(7절). 그러면서, 백성들에게는 물세례로 만족하지 않고 종국에는 오실 분이 베 푸실 성령(聖靈)세례까지 바라볼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오실 분을 향하도록 계속 일깨웠다(8절). 

 

5) 예비자 요한의 그런 사역이 한참 힘을 얻어가는 것을 확인하신 주님께서, 드디어 요한의 사역을 넘겨받으시려고 그의 현장을 찾으셨다. 주님의 요한과의 배톤 터치(Baton Touch)는 요단 강가에서 요한이 베푸는 물세례를 당신이 친히 받으시는 일로부터 시작하셨다(9-10절).  

 

6) 그런 성자(聖子) 그리스도의 지휘봉 인수(引受) 작업은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축하와 공인을 받게 되는 가운데 펼쳐졌다(9-11절). 성령(聖靈)이 비들기 같이 물세례 받고 올라오시는 성자에게 임하시는 일과, 성부(聖父)이신 하늘 아버지께서 친히 외치신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어졌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절). 

 

☞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은 땅으로 인간되어 오신 당신의 아들이 철저하게 겸손의 옷을 입고, 인간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에게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의 모습을 확인하시면서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신 듯하다. 온 세상 모든 죄인들과 낮을 자들을 품어야 하는 성자의 낮아지심과 온 세상 죄인들까지도 섬기시려는 의지를, 그런 수세(水洗)의 모습에서 확인하셨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구약을 보자

본문은 예언자 이사야가 죄 값을 치루고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에서 끝내고 본국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이스라엘, 즉 복역(服役)을 마감한 후 죄의 멍에를 벗고서(떠나서) 의(義)의 백성으로 신분이 회복되어 재출발(再出發)하게 된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의 기쁨이 되고 여호와께 찬송을 올리는 존재가 되기까지, 그들을 향하여 계속 쉬임없이 –마치 세례 요한처럼- 그 기대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그들을 일깨우는 파수꾼의 소리(voice)를 발할 것을 예고한 내용이다. 

 

1) 예언자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전하는 대언자(代言者)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에 의한 70년 복역(服役)의 때가 끝내고 본국으로의 귀환하는 시기를 맞이하면서, 잃어버리고 빼앗겼던 시온성인 예루살렘이 다시 의(義)에 빛나고 구원(救援)의 빛이 발산되는 시기로 보고 있음을 드러냈다(1절). 하지만 문제는 예루살렘 자신이 그런 복음의 때에 대한 인식이 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그러기에 누군가 아는 이가 그 점을 일깨워주어야 했다. 

 

2) 놀라운 것은 그들의 변화된 존재의 가치를 이방나라와 권세자들이 먼저 분별한다는 것이었다(2절). 그들의 눈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여호와께 버림당하고 외면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실히 받게 된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마치 그들과 그들의 땅이 ‘여호와의 소중한 부속물인 아름다운 관(冠)과 손의 왕관(王冠)처럼’ 되어 있었으며, 더 이상 모두에게 짓밟혔던 ‘황무지’가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와 결혼한 헵시바와 뾸라와 같은 존재로서 여호와의 기쁨이 되어 있었다(3-4절 참조). 

 

3) 예언자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그러한 놀라운 복된 소식을 높은 성벽에 올라가서 아직도 낙망 속에 빠져 사는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파송 받은 파수(把守)꾼임을 밝힌다(6절). 이러한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재(再)선택과 그들의 신분 회복, 즉 ‘자신들은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 존재들’이라는 인식(認識)을 온 예루살렘에게 일깨워주기 위하여 자신은 밤낮 없이 그 소식을 전하리라고 예고하였다. 그 일을 언제까지 한다는 것인가? 예루살렘이 듣고 회복되어 세상으로부터 여호와가 찬송을 받게 되기까지이다(7절). 

 

☞ 우리는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을 향한 깊은 사랑과 연민을 확인하게 된다. 비록 패역하여 한때 당신이 외면하기도 한 무리들이었으나, 그렇다고 그들을 포기하신 것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시 회개하고 기다리는 여호와의 손길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전의 모든 아픔을 보상처리해 주시고, 오히려 세상에 자랑거리가 되게 하시고자 대비하고 계셨다. 그 구체적인 여호와의 마음은 당신의 뜻을 전할 파수꾼들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 오늘 세 본문에 나타난 선지자 이사야가 그였고, 복음서의 세례 요한이 그였으며, 서신서의 교회의 사도인 바울이 바로 그런 파수꾼들이었다. 그들은 일심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여호와가 그들을 향하여 갖고 계시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전하면서, ‘여호와의 기쁨이 되라’고 전했고, ‘여호와의 기쁨이 된 존재’임을 기억하며 ‘거기에 걸맞게 살라’고 외쳤다.  

 

서신서를 보자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교 출신인 유대인들이 함께 공존하는 공동체였다. 그들 사이는 공존과 함께 갈등이 함께 있었던 듯싶다. 그러기에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던 사도 바울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유대인들을 참 감남나무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참감남나무에 접붙임이 된 돌감남나무로서 참감남나무의 뿌리의 진액(津液)을 함께 받는 자들이라고 비유(比喩)하였다(17절). 

 

1) 그런 처지를 설명하면서, 사도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꺾였고 그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믿어서 일어섰다. 그러기에 사도는 로마교인들에게 절대 교만하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권고하였다(20절). 이유는 하나님은 원(元)가지들도 물리치셨기에 접붙임 된 그들도 신앙에서 벗어나면 얼마든지 물리치실 분이기 때문이다(21,23절). 

 

2) 잊지 말고 주목하여 지켜할 일이 있다.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성품이 있다. 바로 인자(仁慈)하심과 준엄(俊嚴)하심이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려면’,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집중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는 주님의 오른편에 거하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준엄하심에 걸리게 되면, 주님의 왼편에 서게 되면서, 주님으로부터 혹독한 물리침을 당하게 될 것이다(22절). 그러기에 주님의 사랑과 순종에 거할 것인가, 분노와 불순종에 거할 것인가? 바로 그 선택의 우리의 몫이다.  

 

결론이다

이 새해 첫 주일에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당연히 나는 하나님은 내가 당신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시는 뜻에 따라서, 그의 인자하심을 선택하여야 하겠다. 절대 주님의 분노를 야기하는 자리에 들어가서는 안 되겠다. 특히 접붙임 받은 처지에 있는 우리들로서 취할 생명과 복의 선택은 신실한 믿음과 겸손을 좇는 일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도록 새해를 열어주신 일을 감사하며, 전력을 다하여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를 노래하며, 행진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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