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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12-18 (수) 16:11 4년전 1690  

본문) 렘 23:5-8, 마 1:18-25, 요일 4:13-21 

 

오늘은 대림절의 끝 주일이다. 게다가 금주 수요일(12.25)에는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할 성탄일까지 앞두고 있다. 그러기에 성탄(聖誕)직전 주일인 오늘은, 마치 존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영접에 바쁜 집안의 분위기와 같은 남달리 준비된 주일이어야만 할 것이다. 

 

마침 이번 성탄과 년말연시는 우리 한반도의 평화유지 여부에 온 세계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북.미 간의 협상이 교착(交錯)된 상태에서, 북한은 미국에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미국의 행동여하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라며 위협하고 있고, 미국 측의 대표 미건은 ‘성탄의 선물은 당연히 예수의 평화여야 한다’는 입장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 사이에 있는 우리 온 국민들은 더욱 착잡한 마음이다. 한반도의 주인이면서도, 손님처럼 있어야하는 한(恨)스러운 현실과 평화의 세상의 오기를 더욱 간절히 바라는 우리의 기도의 두 손이 모아져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조용히 생각해보자. 나는 지난 대림절기 기간 동안 어떤 이유로 메시아 주님을 기다려왔는가? 우리는 ‘내게 주님은 왜 오셔야만 하는 분이신지’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오시는 주님은 나와 세상을 능히 주관하시는 분이시잖은가? 그는 나를 사랑해서 오셨고, 나를 죄에서 구원하려고 오셨으며, 나와 이 세상의 무거운 멍에들을 벗겨주시려고 오신 분이잖은가? 그런 분을 우리가 무관심으로 상대하거나,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하는 일은 아주 잘못된 일이리라! 

 

그런데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데에 매우 귀한 지침이 성경에 있다. 계시록에 나타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당부가 그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아시아 7교회 중에서, 매우 뜨뜻미지근한 교회였다. 그것은 세상적으로 가진 것이 많아서, 뭐 특별히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며 지내지도 아니하고 살았다. 그 바람에 그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하여 내 입에서 토(吐)해버리겠다’고 무서운 경고까지 받았다(계3:15-16참조)

 

그러면서 이렇게 당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20절). 

 

주님의 이 말씀에는 우리가 명심할 중요한 지침(指針)들이 담겨 있다. 찾아오시는 주님이 하시는 몫은 우리 문을 두드리시는 일이다. 이것은 문을 여는 신앙의 결정권은 주님에게 있지 아니하고, 우리 자신의 결단(독.Entscheidung)에 의한 것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주님의 노크를 듣는다는 것은, 분명히 기회(機會)이면서 동시에 위기(危機)이다. 열면, 주님과는 풍성한 파티가 열리고 큰 기쁨을 나누게 되지만, 거부하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나는 이번 주의 성탄을 기회로 맞을 건가, 위기를 맞을 건가?

 

마침 오늘 주일에 주시는 말씀들은 오시는 주님이 왜 우리의 외면이 아닌, 정성을 다하여 맞이해야만 하는 분인지를 매우 상세히 증언해 준다. 마치 ‘이런 분인데도 너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아니하겠느냐’는 식이다. 

구약 예언서는 그 분이 어떤 분으로 오실 것인지, 그가 오셔서 열어주실 세상은 어떤 세상일 것인지를 예고한다. 복음서는 그 예언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와 입증을 다양하게 제공해 주고 있다. 서신서는 그렇게 오신 메시아가 과연 어떤 이들에게 임마누엘(God with Us)로 오시는 지에 대한 안내를 매우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고 있다. 

 

구약을 보자

본문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이다. 그 내용은 바벨론 제국에 나라가 패망하는 바람에 절망에 빠져 든 유다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서 그의 때(카이로스-하나님의 개입하시는 때)가 되면, 세상에 다윗의 후손이되 ‘의(義)로운 한 후손’을 구원자로 보내리라는 예고였다(5절 상, 슥3:8,6:12참조). 이는 당시 고통 속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 자체를 향한 희망의 말씀이면서도(6절), 동시에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새 세상(새 예루살렘과 새 이스라엘)을 향한 거대한 청사진(靑寫眞)을 제시하셨던 선포이기도 했다(5절하). 

 

무엇보다도 이 선지자의 이 예언은 그 후로, 전 이스라엘과 자신의 고난의 극복과 회복을 소망하는 모든 이들의 메시아 오심을 향한 전거(典據)가 되고 기도의 제목이 된 내용이 되었다. 이 예언이 성취되기까지 매우 오랜 세월, 메시아를 참고 기다리게 한 버팀목 노릇을 하였다. 그 예언의 내용에는 이러한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1) 당신이 구원자인 메시아로 보낼 자는 다윗의 가계(후손)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셨다(5절.상)

 

2) 후손은 후손이지만, 그는 매우 특별한 분으로서, ‘의로운 자’로 오실 분임을 예고했다(5절).

☞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의(義)롭다’는 점이다. 이 말에는 ‘바르고 거짓 없다’는 통상적인 개념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죄가 없다’(No Sin)는 영적 개념을 핵심으로 담고 있다. 예언에서 예고한 오실 분은 바로 죄와 그 성질에서 자유(自由)한 분이 오실 것임을 선포한 것이다! 죄와 그 유혹과 공격에서 자유한 이의 등장이라서, 생각할수록 놀라운 소식이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세상에 죄가 없는 자가 과연 있을까? 아니, 체질상 죄성(罪性) 없이 태어난 인간이 과연 있는가? 절대 불가능하다. 아무리 나의 훌륭하고 사랑하는 조상이라도, 그들은 나를 죄인의 몸으로 생산해 주었다. 그러기에 나는 교육이 없어도, 자동적으로 죄 짓는 일에 능한 존재로 살아온 것이다. 왜, 다윗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고 조상 탓까지 하였겠는가? 

 

그러기에, 본 예언이 다윗의 자손이지만 그러나 죄에서 자유한 새 후손임을 알린 선포는 분명히 일반적 말씀과는 차원이 다르다. 세상의 모든 죄와 악과의 피할 수 없는 싸움과 전쟁에서 능히 이길 원천적 승리자로 오실 이를 예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의 오심이 곧 복음(福音)이 된 것이다!!! 만일, 아빠의 정자(精子)를 받아 나온 인간이라면, 그는 죄에서 자유가 불가능하여 세상과 타협과 결탁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이기에, 세상의 메시아 됨은 불가능하다

 

2) 예언은 그런 놀라운 이로 인하여 세상은 어떤 변화된 모습을 맛보게 될 것인지에 관하여서도 전하였다(5절.하). 그를 영접한 이들에게 오실 그는 절대 왕(王)이 되신다. 이 세상 그 어떤 통치자보다도 더욱 확실한 왕이 되셔서, 그의 지배와 통제와 가르침을 좇는 그의 백성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능력을 발휘하실 분임을 예고했다. 그의 통치의 수단은 이것이다. 차별 없이 베풀어지는 지혜(智慧)이며 정의(正義)이며 공의(公義)이다. 얼마나 놀랍고 존귀한가?

 

3) 예언은 북과 남으로 함께 분열되어, 강대국들의 제물이 되어 흩어졌던 온 백성들인 유다와 이스라엘에게도, 다시 하나로 회복할 기회가 주어지면서 구원과 평안을 누리게 될 때가 오리라고 예고되었다(6절). 꿈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일은 바사 제국의 고레스 황제의 방면을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스라엘이 귀환하면서 성취되기도 하였다. 

 

☞ 그 회복과 귀환의 사건을 주도하신 이는 단연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 바람에 여호와는 그 이름이 ‘여호와 우리의 공의’란 칭호(稱號)를 듣게 되었는데(6절,하), 매우 놀라운 것은, 그 칭호는 예전에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의 이름의 뜻과 일치하였다는 점이다(왕하24:17-25:21참조). 가장 좋은 이름을 갖고도, 가장 패역한 짓으로 나라에 멸망을 안겨준 부끄러운 왕의 그 이름으로 회복을 주도하신 여호와이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반전(反轉)인가!

 

☞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출애굽을 주도하셨던 여호와의 이름 대신에, 제국들의 억압에서 신음하던 데에서 그 백성을 평화와 공의로 되돌려 귀환하게 하신 역사의 주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때가 열렸다(7-8절). 이는 개체 민족 차원에서가 아니라, 전 세계 민족과 역사의 차원에서, 여호와는 참 신이며 구원의 주이심을 보았기 때문에 나온 큰 결과였다.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예고된 예언이 때가 되자,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밝혀 준 내용이다(22절). 메시아의 오심은 결코 한순간 벼락같이 된 일이 결코 아니었다. 매우 오랫동안 예고되고 준비되어 이룩된 성취물이었다. 소위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그런 놀랍고 기이한 다윗의 의로운 가지로 오신 예수의 등장을 소명(疏明)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다음의 몇 가지 차원으로 확인할 수 있다. 

 

1) 예수께서 나사렛의 목수 요셉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증언이다(19-20, 24-25참조). 요셉은 다윗 왕의 소속 계보인 유다 족속에 속한 자였다. 비록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로 살면서 마리아와 정혼까지 했던 젊은이였으나, 그의 원 고향은 유대 땅 베들레헴이었다. 그런 그가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정혼했으나 동거한 적이 없었던 정혼녀 마리아에게 잉태된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요셉으로서는 여자에게 무자비한 정죄가 가능했지만, 그는 의로운 자(덕스러운 자)여서, 조용히 관계를 청산하려고 했다. 하지만, 천사의 방문을 받고 그 아이가 성령(聖靈)으로 잉태된 아들이며 예수(구원자)란 이름으로, 자기 백성을 죄(罪)에서 구원할 자(메시아)가 되리라는 통보를 받으면서(21절), 그는 아이 예수를 낳기까지 아내와 별거하며 탄생을 돕게 된다. 

 

2) 이런 증언은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통하여 예언이 성취된 것이었음을 입증한다. 

① 메시아는 유다 지파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예언이 성취되었다(렘23:5.참조)

② 메시아는 ‘의로운 자’로 오신다는 예언도 다음의 두 측면으로 성취되었다(렘23:5 참조)

 

☞ 성령 잉태의 건이다. 처녀를 잉태하게 한 씨가 남자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인 성령의 특별한 작업으로 되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남자의 씨를 받은 자는 그 누구도 죄인인 동료 인간들을 절대로 구원해낼 수가 없다. 오직 거룩하신 창조주의 특별한 개입만으로서 거룩한 새 생명 창조의 능력이 발휘되어, 세상 죄인과는 다른 참 구원자를 탄생하게 할 뿐이었다(21절). 성령 잉태는 그래서 창조주께서 행하신 놀라운 사건이었다. 

 

☞ 동정녀(童貞女) 몸을 빌려 탄생하리라는 메시아 이야기이다. 이 놀라운 일도 이미 이사야의 예언에서 예고된 바였다(7:14). 그 예고대로, 구원자 예수가 요셉의 정혼녀인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게 되셨다. 그래서 임마누엘로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되셨다. 

 

☞ 이런 특별한 탄생, 즉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고, 그것도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임마누엘 예수는 예언의 말씀대로, 참된 ‘의’로운 존재로 살기 시작하셨다. 죄의 씨가 아니라 성령의 씨였기에, 그는 시험은 많이 받으셨으나 그러나 죄는 없는 유일한 이로써(히4:15참조), 이 세상의 모든 죄의 무거운 멍에로 쓰러져 망해가는 자들을 지혜를 가지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서 구원의 사역들을 펼쳐가셨다(마8-9장 참조). 

 

☞ 그의 특별한 이름, 임마누엘(Emmanuel)은 이 세상 지고의 신이며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이 인간되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시고 동행하신다는 복음을 담고 있다. 이 신앙과 축복 위에서 산다면, 우리에게 무슨 두려움과 염려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서신서를 보자

구세주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하나님은 이제 그의 제자요 자녀 된 우리들을 향하신다. 사도 요한의 증언을 통하여 당신이 과연 누구에게 임마누엘하실 것인지를 매우 상세하게 밝혀 주신다. 잘 배우고 익혀서,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제대로 영접하고 그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겠다. 

 

1) 성령을 받은 이들과 임마누엘 하신다(13절). 성령은 바로 예수를 탄생하게 하신 창조의 영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內住)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확증이기도 하다. 참으로 세상과 마귀에 거침없이 살 인생살이가 될 것이다

 

2)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마음으로 믿고, 또 입으로 시인(是認)하는 이들과 임마누엘 하신다(14-15절). 그들은 이미 주님의 노크에 자기의 마음의 문까지 열어놓은 이들이다(계3:15-참조). 그러기에 주님은 당연히 그에게 기꺼이 들어가셔서 당신의 풍성한 능력과 기쁨을 펼치신다. 이런 이들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3) 사랑 안에 거하는 자,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자들에게 임마누엘 하신다(17-20절 참조). 그런 사람이야말로 참 아브라함의 후손된 자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은 근본 사랑이시다. 그 사랑을 받고 누리며 형제자매에게 까지 나눌 수 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임마누엘의 은혜를 부어주신다. 부디 이제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며 살아가자!

 

결론이다

성탄이 임박했다. 탄탄한 준비로 맞이하자.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맞이하여 나의 성탄이 되게 하자. 겸손히 성령 충만을 간구하자. 주님의 의로우심으로 속죄 받아 죄에서 자유한 자들로 살자. 뜨겁게 예수의 구주이심을 증거하며 시인하고 살자. 마귀와 악이 우리 마음에 틈타지 못하게 하자.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자. 내가 주와 함께 삶을 보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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