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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성서-인권주일

관리자 2019-12-04 (수) 00:07 4년전 1685  

본문) 슥 2:1-13, 눅 19:28-40, 롬 11:25-32

 

초겨울 날씨가 매섭다. 영하(零下)의 기온이 우리의 삶을 움츠러들게 한다. 건강 유의하셔서 년말연시에 더욱 건강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한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이다. 동시에 우리 한국교회가 제정한 성서(聖書)주일과 인권(人權)주일도 겸하여 맞이한다. 성서와 인권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무게감이 대단하다. 

 

성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담아 낸 책(冊)으로서, 인류 역사의 영원한 베스트셀러이다. 성서는 성격상 소장품(所藏品)이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내 곁에 두고, 읽고 내 인생과 삶을 바르게 추스르게 해야 할 구원의 가이드북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열심히 읽고 그 안내를 좇아 살기만 하면, 그 누구나 인생의 길에서 방황을 멈추고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성서를 읽고 사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다. 반드시 성공하고 승리한다. 그 이유는 성서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고, 배우며, 그의 사람이 되어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성서의 사람이 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강력한 존재를 만나도 결코 밀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놀라운 영향력을 안겨준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긍휼의 영성이 그를 이미 강건하고 탁월한 존재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이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통하여 확인하기도 하였다. 부디 성경과 함께 사시라!

 

인권(人權)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차별없이 부여하신 권리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존중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인권이 모든 영역에서 무참히 망가져 있다. 물질, 학력, 능력, 계급, 출신, 지역, 성별, 종교, 신분, 피부색, 생김새, 이념 등등으로 갈가리 짓밟혀 있다. 억울한 눈물이 피눈물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흘러내리고 있다. 대체 누가 우리 인권을 훼손하는가?

 

현실을 조금 말 해본다. 소위 ‘민식이 법’, ‘융균이 법’, ‘사학유치원3법’ 등의 민생관련법들과, ‘5.18진상규명법’, ‘4.16세월호진상규명법’ 등등의 해묵은 쟁점법안들이 보수 국회의원들의 훼방으로 햇빛을 못보고 있다. 왜 이런가? 검찰을 비롯한 국가 권력의 핵심에 오랫동안 둥지를 틀어왔던 집단들이 서로 자기 이익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가진 권력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바람에, 시급한 민생을 위한 법안들이 오랫동안 빛을 못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현실을 보라. 통상적인 여야의 모습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 보통 야당은 여당이 못하는 개혁을 시도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이끌려고 한다. 반면에 여당은 보수와 안정을 강조하면서, 기존의 것들을 고치려하지 않고 더욱 공고히 하려고 힘쓴다. 그런데 현 집권당인 민주당은 모든 것을 새롭게 개혁하려는데, 총력을 쏟는다. 야당인 자한당은 ‘기존의 법을 고치면 안 된다’고 반발한다. 특히 집권당이 무한 권력을 감시하고 통제하자고 내어 논 공수처법안도 야당은 결사반대한다. 희귀한 일이다. ‘공수처 법이 제정되면, 독재국가가 된다’면서 적극 반대한다. 야당이 왜 이럴까? 그간 얼마나 권력의 맛을 즐겨왔으면, 그 귀한 개혁법을 반대하나? 

 

그 저의가 불순하다. 국민들은 이미 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기억한다. 그들은 지난 20대 선거에서 당선된 자당 국회의원들을 상당수를 부정선거 판결로 잃었다. 민주당에는 한 명도 없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런데도, 그들은 왜 그리 정치 검찰을 감싸고 도나? 왜 권력층 감시를 강화시키자는 법안을 그토록 반대하나? ‘정치권이 투명해지고 민주주의가 잘 되면, 자기들의 집권은 앞으로 물 건너 간 것이다’라는 논리에 쫓겨서 그러한 것 아닌가? 

 

이런 부조리한 정치 구조와 온갖 모순덩어리들이 모인 현 20대 국회에 대한 심판은 이제 국민들의 몫이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다. 사이비 야당은 사라져야 한다. 국민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하찮은 권력에 목줄을 매어, 소중한 민생법안을 반대 만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은 반드시 청산되어야 한다. 특히 극우세력. 종교 세력과 결탁된 대상들을 정리해야 한다. 자기 정치이익을 위해, 미국에 남북회담을 선거 후에 해달라고 요구하는 자들도 퇴출시켜야한다. 

 

진정한 인권은 건강한 종교와 상식적인 정치가 모아져야 햇빛을 본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곳에서만 인권은 빛을 보게 된다. 저 사이비 목사 전광훈 식의 기독교로는 진정한 인권은 사라지고, 도리어 히틀러식 폭력과 학살의 광란(狂亂)의 정치만 나올 것이다. 자기 권력의 카르텔에 갇혀서, 정의와 생명과 평화를 싹트게 하는 건강한 세상의 등장을 막기만 하는 보수 세력에게서도, 우리 모두가 누릴 천부(天賦)의 인권은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이래저래 지금의 우리의 땅은 참과 거짓, 가짜와 진짜의 대립과 갈등으로 몸살하고 있다. 매우 추운 계절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진정한 정의. 평화, 생명의 세상을 우리에게 안겨 줄 메시아 예수님을 고대하게 된다. 그의 크신 도움을 받아, 모든 남북 국민들이 균등한 인권을 보장받고 전체가 평화(平和)를 노래할 수 있게 해주실 메시아를 기다리게 된다. 

 

오늘의 세 본문에서 우리는 이 모순을 넘어설 희망의 거점을 찾을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네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이다’(슥2:10)라는 말씀 때문이다. 그가 임마누엘 하실 때, 이 세상에 어떤 변화가 오는 지를 구약 예언서가 밝혀주고, 그를 제대로 맞이한 이들에게서는 어떤 감격의 노래가 터져 나오는지에 대하여서는 복음서가 전해주며, 그런 주님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신 곳에서는 어떤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는 지를 서신서가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오셔서 일하시는 곳에서는 역사가 변하고 인간이 변한다. 새 기운이 솟고 새 역사가 일어나며, 환경과 상황이 변혁되며 그 안의 생명이 강하게 격동한다. 이제 이런 은총의 세계를 제시하는 말씀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 변혁의 새 기운을 함께 받아내자.  

 

구약을 보자

선지자 스가랴는 유달리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환상(幻想)들을 많이 받았다. 무려 여덟 개의 환상들이 그에게 주어졌다. 환상은 여호와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또 하나의 통로이다. 그가 받은 환상들에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했으나 아직도 처지에 낙담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북돋아 주시려고 하나님이 전하신 격려와 약속들이 가득하다. 그 내용도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풍부히 담고 있다. 오늘 본문은 그 중에 세 번째 것이다. 그 내용들을 보자. 

 

1) 소위 ‘척량줄 환상’, 또는 ‘불 성곽 환상’으로 불리는 본 셋째 환상에서 만난 천사는, 스가랴에게 예루살렘 성(城)의 너비와 길이를 알려주겠다고 나섰다(1-2절). 그러자 다른 천사가 나타나, 전혀 다른 차원의 소식을 전했다. ‘예루살렘은 그 안에 사는 사람과 가축이 많아서, 성곽 없는 성읍이 되리라’고 말하며(3-4절),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친히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셔서, 그 성읍을 지키시며 온 성읍을 찬란한 영광으로 채워주시리라’고 선포한 것이다(5절). 

 

☞ 이 환상의 메시지는 앞으로의 역사가 하나님의 영광과 보호가 함께 하는 예루살렘 중심의 역사로 대변화가 전개될 것임을 예고한 내용이어서, 당시 낙심 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충격과 놀랍기 그지없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망가져 있는 예루살렘이 머잖아 급속히 커져서 성벽으로 그 경계를 정할 수도 없게 되리라는 소식이어서, 놀람 자체였다-! 하지만 본 증언은 성령에 의한 새 예루살렘의 등장, 곧 교회의 시대를 예고한 것으로 보인다! 

 

2) 이런 역사의 대 변혁은 어떻게 가능한가? 역사의 주이신 만군의 여호와께서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의 편(偏)을 들어주시기에 가능했다(10절 참조). 즉 여호와께서는 그 동안 이스라엘을 비롯한 숱한 나라들과 백성들을 노예로 부리던 제국들(바벨론-메대-바사 등)을 또 다른 신흥 제국에게 패망하게 하는 일들로 심판하심으로서(9절), 짓눌려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에게 새로운 재건의 기회가 부여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었다(6-9절참조)

 

☞ 제국들은 한때 여호와의 뜻을 받아 그의 범죄한 백성을 심판하는 냉혹한 도구였으나, 이제는 그 임무 수행이 끝나자 여호와의 백성을 새롭게 결집하고 회복시키며 새로운 활기를 되찾게 하는 도우미가 되는 이중적 존재로 쓰임 받고 있다! 실로 역사의 주관자의 손길이 놀랍다! 

 

3)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역사의 주이신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일이다(10-11절). 즉 임마누엘(Immanuel)하시는 일이다!!! 그가 계신 곳이 곧 역사요 힘이며 빛이다. 그가 떠난 곳은 어둠이며 패망이고 혼돈이다. 놀라운 것은 세상은 그가 계시는 곳을 즉시 알아본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나라의 왕들과 백성들과 재물들이 그 분이 계신 곳을 찾아온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함께 여호와의 백성이요 새 예루살렘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그 성을 그 이름의 의미대로, 새롭고 참된 ‘평화(平和)의 성읍’이 되게 하신다(12절). 

 

4) 그러기에 이 여호와의 놀라운 역사를 지켜보는 모든 육체들(인류)은 어떤 자세를 가져할 것인가? 주께서 임마누엘 하심을, ‘노래하고 기뻐해야 한다’(10절.상). 동시에 ‘여호와 앞에서 잠잠해야만 한다’(13절). 상대에 대하여, 서로 평가하고 정죄할 일이 아니다. 교만하고 우월해 할 일도 아니다. 낙심하고 좌절할 일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 겸손하고 경배를 올리면 된다! 

☞ 한반도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 앞에 모두가 겸손해야만 한다!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고난주간에나 대할 수 있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가 올라와 있다. 하지만, 왜 그런가? 바로 제자들이 나귀타고 오시는 예수를 향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외치고 경배하는 그 내용 때문이다(38절). 제자들은 예수 모시고 오랜 세월을 함께 지냈으나, 예수가 온 세상의 왕(王)이시고 하늘과 땅에 평화(平和)와 영광(榮光)을 안겨 다 주실 메시아 구세주이신 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비로소 마음이 열리고 입이 열려서 외치게 되었다(38절). 무엇인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첫째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때의 외침이었던 베들레헴 들녘에서의 하늘 천군천사들의 찬양(눅2:14)에 대한 응답이 땅으로부터의 비로소 나왔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 고백이 예수의 삶과 생애를 함께 살아 온 제자들과 그 일행에게서 터져 나왔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게다가 그들은 당시의 밑바닥 인생들의 표본이었고, 인간고를 온몸으로 살아왔던 이들로서, 예수가 로마의 힘에 의한 강요가 아닌 참된 평화와 영광을 온 세상 만민에게 안겨줄 주(主)이심을 확신하며 외쳤던 것이었다. 그들의 실질적 성탄이었다! (그 결과 그들의 역사의 중심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밑바닥 인생에서 인류를 살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소명이 부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의 은혜의 결과이다)

 

1)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크게 놀라고 감동을 받은 일은, 예수님의 탁월한 예지력(豫智力)을 경험한 일 때문이다(37절). 물론 평소에도 예수님이 보여 주신 다양한 모습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숱하게 드러내셨지만, 그 날 즉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에 보여 주신 예수님의 예지력과 유인력(誘人力)은 인간이 아닌 오직 신(神)만이 가능한 일이었음을 확인하면서, 예수야말로 평화와 영광의 새 시대를 여실 왕(王)으로 믿고 뜨겁게 환호했던 것이다(29-36절참조). 

 

2) 제자 일행의 그런 함성은 예수 자신에게 커다란 위험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로마 정권의 잔인한 탄압을 불러올만한 성격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첫 거부 반응이 일부 바리새인들로부터 제기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항의에 개의치 않고, 제자 일행의 고백과 환호를 잔잔히 수용하셨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응수하시면서 말이다(39-40절,합2:11). 그는 당신 안에서 이미 시작된 새 역사를 기꺼이 수용하신 것이다! 

 

서신서를 보자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신비로우면서도 결코 철회되지 아니하는 방법에 대하여 증언한다(25,29절). 그것은 그 대상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을 불문하고 그 모두를 불순종 가운데 묶어 두시면서, 그러기에 인간들은 자신들의 불완전하고 죄악 됨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사랑)에 의존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는 방법을 주목한 것이다(32절). 

 

그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이 교만과 타락에 빠져서 구원에 행렬에서 제외를 당하자,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과 자비의 물줄기를 원수로 지내던 이방인들에게 돌려서 당신의 구원에 참여하게 하시고, 후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이방인 그리스도인 역시 불순종에 빠져들게 될 때에는 당신의 긍휼로 인한 구원을 유대인들도 결국은 받게 하신 방법이었다(28-31절참조). 

 

☞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운명이 하나님 안에서 놀랍도록 서로 맞물려 있음을 말한다. 앞의 구약의 경우처럼, 유대인의 구원을 위하여서 원수였던 이방 제국을 끌어들이신 하나님이 회개한 백성의 회복을 위해서도 제국의 멸망과 회개와 협력을 활용하여 그들도 여호와의 긍휼에 참여하게 하신 것과 유사하다.

 

☞ 결국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어떠한 차별도 배제하심을 확인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순종과 교만이 아닌 순종과 긍휼의 영성을 좇은 자들과 함께 계심도 분명하다. 따라서 나에게는 교만과 불순종을 쫓아 사느냐, 순종과 자비란 사랑을 쫓아 사느냐에 대한 책임만 부여되어 있다. 그 선택과 응답에 대한 심판 역시 불가피하다.  

 

결론이다

성서는 최상의 인권 교과서이기도 하다. 성서가 보여주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간을 외모로 취하는 분이 아니고, 인류 모두에게 차별 없이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순종하고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계신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신다. 우리는 평화의 성, 새 예루살렘의 주민들이다. 평화를 노래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충만하기까지 흔들리지 않고 충성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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