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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11-19 (화) 23:31 4년전 1613  

본문) 왕하 17 : 6-23, 막 12:1-12, 롬 2:1-11  / 영생주일

 

몇 일간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온 대지를 적셨는데, 일기가 급하게 가라앉았다. 그토록 아름답던 가을도 매우 빠르게 지나는 듯싶어 아쉬움도 크지만, 그래도 맛을 보고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부디 건강에 유의하셔서 보다 발전된 삶을 열어 가시기 바란다. 

 

오늘은 마침 창조절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주일(13)로서, 시간의 주관자이신 알파와 오메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주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교회력에서는 보편화되지 않았으나, 이웃 나라 교회들 중에서는 오늘을 영생(永生)주일 또는 영면(永眠)자 기념주일로 지키기도 한다. 

 

마지막이란 말은 언제나 적잖은 부담이나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이후의 삶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더욱 심하게 부담을 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절망이나 자기 포기상태에서 종말을 맞이한다. ‘죽으면 끝이다’가 그들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정말 죽음이 마지막일까? 그런 도그마(Dogma)는 모든 무신론자들의 최후의 교리일 뿐이다. 하지만 아니다! 정 반대의 도그마도 분명히 강력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서가 우리 인생을 가볍게 보지 않고, 매우 소중하고 엄중한 존재로 보는 까닭이 있다. 그것은 피조(被造)된 인간은 이 지상의 삶으로 모든 것이 종료(終了)되는 존재가 결코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창조주가 영원하시듯, 그가 사랑과 뜻으로 제작해 세상에 내어 놓은 존재인 한 인간 역시, 그 분 안에서 기리 영존할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하루살이가 아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이 서로 사랑해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 바람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존재가 되었다(전3:11). 동시에 흙의 사람인 육체(겉사람)는 땅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의 숨을 받아 내 안에서 생존해 온 영(속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창2:7,전12:7). 특히 이런 영적 세계는 주 예수께서 하늘에 부활 승천하시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더욱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세계에 눈이 뜬 사도들은 그 때부터,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전력을 다하여 대비할 것을 일관되게 역설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우리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이 땅의 현실과 대칭(對稱)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복음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것에서 하늘과 영생의 맛보기가 가능한 지를 가르친 내용들로 가득하다(마25:46,약2:26참조). 성령을 받아 예수의 후속적 삶을 전파하기 시작한 사도들은 아예 열리기 시작한 그 나라를 본격적으로 전하기 시작했다. 계시록의 요한은 아예 그 나라의 그 실상을 생생히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종말신앙을 넘어 재림신앙으로, 그리고 영생(永生)신앙을 심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인생을 나그네길이라고 증언했다(벧전2:11). 우리에게는 이 세상 육체의 삶을 넘어선 영원한 곳에, 본가(本家)가 따로 있음을 말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선언하였다(고전15:19). 이 세상 너머의 생이 있음과 그 영원한 세상을 약속 받은 이들이 이 땅에서의 고난과 불이익 속에서도 여전히 행복하고 승리의 생활이 가능한 이유를 확실하게 제시한 것이다. 

 

육을 넘은 영의 세계, 보이는 세계를 넘은 보이지 않는 세계, 순간이 아닌 영원의 세계, 인간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 아직 끝나지 아니한 지속(持續)되는 세계, 그러기에 이제 이 지상의 삶의 영역을 넘어 본격적으로 새롭게 시작될 하늘 세계가, 이제 지상의 삶의 끝을 앞 둔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활짝 열려 있음을 성서가 뜨겁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실적 죽음인 지상적(地上的) 삶의 종료를 보는 눈이 새로워져야 한다. 그것을 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 열어주실 그 하늘 세계를 어떤 마음과 자세로 맞이해야할 것인지를 바로 지금부터 진지하게 준비하여야 된다. 하지만 명심하자. 그 날에 대하여, 전체 성경의 말씀은 구원만 말씀하지 않는다. 심판도 전한다. 그것도 불의 심판을 말한다. 우리는 절대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될 증언들이다. 

 

마침 오늘의 말씀들은 최후의 날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대하여 언급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영생(永生)으로 선고하시고, 어떤 이들에게는 진노로 선고하신다(롬2:7-8절). 그 운명의 갈림길이 무엇인가? 문제는 그 정답에 크게 착각하는 대상들이 많다는 데에 있다. 마치 불합격자가 합격한 양, 착각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합격은 수험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출제자가 결정한다. 구원도 그렇다. 자기 확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판자이신 주님이 제시하신 기준과 말씀에 부합(附合)되어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세 본문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보면, 잘못된 구원관에 빠져서,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착각한 이들로 가득하다. 그러기에 오늘 창조절 마지막 주일에 주시는 말씀들은 정확한 말씀에 근거한 확실한 믿음으로, 그 분 앞에 서도록 우리를 안내하고자 하신다. 그렇다면 누가 무슨 착각을 하는가? 세 본문들 공히, 출신과 신분과 여건에서 자기가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판단되는 이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외모(外貌)로만 보면, 자기들이 당연히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들을 선점할 유리(有利)한 여건에 위치한 이들이다. 

 

구약을 보자

성부 하나님의 일차적인 심판(審判)의 칼은 그가 선택했던 북 왕국 이스라엘을 겨냥했다. 그들은 혈통상으로 친(親)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고,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10지파에 해당하는 압도적인 유대인들이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일순위에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자기 백성을 몰아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서, 이제 역사 무대에서 저주의 상징인 ‘사마리아인’으로 밀려나는 궁지(窮地)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1) 그들의 멸망은 호세아왕 9년에 앗수르 제국의 살만에셀의 침공에 의해 이루어졌다. 제국은 이스라엘의 상류층만 끌어다가, 당시 제국의 치하에 있는 세계처처에 흩어버렸다. 한 앗수르 비문에 따르면, 그 때의 유민(流民)이 무려 27,290명이나 되었다(6절). 동시에 본토 사마리아에는 타 종족들을 대거 유입시키면서, 남은 원주민인 유대인을 혼혈(混血)종족을 만든 것이다. 유대인 말살정책의 결과였다. 최악의 수치와 잔인한 심판을 당한 것이다. 문제는 어찌 하나님께서 그토록 잔인한 심판을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까지 하실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2)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하다. 그들이 먼저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잊고 그의 말씀을 저버리며, 주변의 각종 우상종교들을 끌어 모아 여호와의 신앙을 혼합종교(Syncretism)를 만들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한없이 모욕하였기 때문이었다(7-17절 참조). 결국 인간들이 자기들이 믿어온 여호와의 종교를 혼합종교를 변질시키자,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혼혈(混血)족이 되게 하셨던 것이었다. 얼마나 엄중하고 무서운 심판인가! 

 

3) 특히 그들은 남북의 분열과 함께 처음 왕인 여로보암이 만들어낸 금송아지 상을 구원의 신인 여호와라고 지칭하면서 우상종교로 변질시킨 그 전통을 후대들도 계속하며 심지어 주변의 각종 우상종교들을 받아들이면서 온 나라를 ‘우상 천국’을 만들자, 하나님이 그렇게 아예 버리신 것이다(21-23절). 하나님에게는 핏줄 이스라엘이 ‘무조건 내 자식’이 아니었다. ‘내 자식다운 자식만’이 당신의 자녀임을 온 천하에 명백히 보여주신 것이었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다가, 망하고 나서야 크게 후회하게 된다. 

 

4) 남 왕국 유다도 상대적으로 유리한 여건에서 150여년을 더 살아남았으나, 정신 차리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사람이 만든 관습을 좇는 바람에(19절),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어서, 바벨론 포로(捕虜)가 되고 말았다(19-20절). 하나님은 선택된 백성이라고 해서 구원이 보장하지 아니함과, 인간을 외모로 취하시는 하나님이 아님을 잘 보여주신 것이다. 

 

복음서를 보자

성자 예수님의 심판의 칼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무를 위임 받고도 탈선한 청지기들을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악한 포도원 농부들’ 비유로 알려진 본문은 그들이 청지기 정신을 상실하고 허황된 탐욕과 부정한 마음에 사로잡혀, 주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주인에 맞서서 온갖 불의한 행동을 자행했음을 보여준다. 고사성어에서 나오는 ‘자기 주인을 물어뜯는 개’란 뜻의 ‘구교주인(狗咬主人)’의 모습을 당시의 유대 종교인들이 보여 준 것이다. 하나님의 정원과 포도원을 관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영원한 구원을 보장되는 것도 아니며, 특히 청지기 정신의 실종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를 확실히 경고하신 내용이기도 하다.

 

이런 모습은 요즈음 교회를 섬기면서 큰 교회를 이루었다고 하여, 자기가 마치 다 이룬 것처럼 행세하고 심지어 목회현장을 가업(家業)처럼 간주하여 교회법을 어기면서까지 자기 핏줄에게 세습하며 질서를 어지럽히는 모든 교역자들에게도 당연히 해당되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간주하며 행세하는 꼴에 대한 주님의 분노를 담은 내용이다. 

 

1) 포도원 농부들의 출발은 좋았다. 소출이 풍성했다. 그러자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서 태도에 변절이 발생했다. 보이지 않는 주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리자인 자기들이 중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변칙과 탈법이 시작되었다. 계산과 감사하려고 온 주인의 종들을 구박하거나 때려서 보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더 심한 모욕을 하였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하였다(1-5절). 

 

2) 주인의 최후의 카드는 아들이었다. 아들에게는 청지기들도 존대하리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더욱 악독한 살인으로 맞섰다. ‘상속자마저 죽이면, 결국 주인의 것은 우리 것이 될 것이다’라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판단 때문이었다(6-8절). 그 아들이 누군가? 바로 예수 당신 자신이었다. 이성을 잃은 청지기들이 모든 정상적 공동체의 질서를 거부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과 맞서다가 최후의 심판과 멸망을 자초하고 만 것이다

 

3) 하지만 주인은 아들의 죽음을 결코 헛되게 할 수 없었다. ‘건축자의 머릿돌’로 삼기로 하였다. 역사의 새 판을 짜는 큰 디딤돌로 아들을 되살려서 세우신 것이다. 자기 농원에 있었던 불의한 청지기들은 진멸하고, 전혀 새로운 이방인 인물들을 영접하여서 당신의 농장 관리를 위임하신 것이다. 그게 바로 탈(脫)유대교로 이방인들이 중심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출현시킨 세계사적 대 사건이었다(10-11절, 행1:8 참조) 

☞ 이 바람에 유대교는 로마전쟁(A.D66-70)을 필두로, 아주 오랜 세월을 역사의 후미(後尾)로 밀려난다. 나라 없는 디아스포라로 비련의 세월을 2,000년 넘게 치러야했다. 아브라함의 직계 후손으로서는 큰 아픔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청지기 정신의 실종이 치러낸 혹독한 대가였다

 

서신서를 보자

로마교회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만 있지 않았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가진 율법적 지식과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다양한 정보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가르치고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롬2:17-21참조). 문제는 그들의 지식과 교훈에는 실천적 행위가 밑받침되지 못하는데서 오는 교회의 내부적 갈등이 컸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사도는 경고한다-! 자신이 누군가를 지도하고 판단할 위치에 있다는 것이 자신의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했다

 

1) 가르치는 자, 남을 판단하는 자는 항상 자신에 대한 성찰에 힘써야만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가르치고 언명한 그 내용이 나를 향해 가차 없이 고발할 것이기 때문이다(1-3절). 

 

2) 자신의 회개와 갱신이 없이 남을 판단하는 일은, 자신에게 이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인내의 영성을 배신하는 일임을 알아야 하고(4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집과 완고함을 보인 것이어서 하나님의 심판 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 것임도 기억해야 한다(5절).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6절). 공평무사한 하나님의 기준을 좇아야만 한다. 

 

3) 영생(永生)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부여되며(7절),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주어진다(10절.상). 반면에 진노(震怒)는 무리를 지어 진리를 거부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 부여되며(8절), 환란과 곤고함도 빠지게 한다(9절.상).    

 

☞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다만 부여 받은 사명의 책임과 역할의 경중에 따라 유대인의 책임이 먼저이고, 이방인(헬라인)이 그 다음일 뿐이다(10절.하-11절). 

 

결론이다

나의 신앙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성찰해 보자. 창조절을 보내고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를 앞둔 이 시점에, 우리는 심판정에 들어선 피고인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잠시 서보자. 내가 혹 착각하거나 자만하여 주님의 분노를 살 위치에 있는지는 아니한지를 성찰하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수준을 다시 확인해보자. 부족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더 필요함을 간절히 느끼는 때가 되게 하자. 진정으로 대림절을 설렘 속에서 맞이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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