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왕상 8: 12-30, 마 12:1-8, 고전 3:10-17
인류가 지구촌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인간사에 지속해 온 큰 논쟁이 있었다면, 그것은 신(神)이 과연 있느냐 없느냐란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에 대한 논쟁이었으리라. 그 중에 무신론은 지금까지도 적잖은 힘을 발휘해 온 게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 진화론자(進化論者)들인 점도 특징이다. <시간의 역사>를 쓴 스티븐 호킹, <만들어진 신>을 쓴 리차드 도킨스, 그리고 <무에서 생겨난 우주>를 펴낸 로렌스 M.크라우스 등이 그 대표자들이다.
하지만 비록 그들이 한 시대에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기는 했어도, 그들의 존재가 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들의 주장들도 석양의 노을처럼 역사의 뒤쪽으로 밀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바로 피조물들의 엄연한 한계 때문이며, 그들의 부정(否定)으로서도 부정될 수 없는 확실한 신이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신론은 처음부터 유신론의 상대가 될 수 없었음을 말한다. 이 분명한 질서 잡기의 배후에는 성경(聖經)이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무신론의 근거를 제공한 당사자들이 있기는 하다. 우선은 논쟁의 당사자가 된 하나님 자신이 논쟁에 불을 붙이신 장본인이다. 그는 근본이 우리 인간의 제한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인지할 수도 없는 신령한 영이시고 찬란한 빛이시며 창조와 생명력을 보유한 진리 되신 말씀(로고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에게서의 그는 언제나 ‘숨어 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tinus)이셨다.
하지만 이 하나님은 두 가지 얼굴로 인간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다. 어떤 이들에게는 당신의 임재(presence)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당신의 부재(absence)로 드러내셨다. 당신을 어린아이처럼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자에게는 임재로 보여주셨으나, 의심하고 부정하며 시험하려드는 자에게는 부재로 보여 주셨다. 그게 무신론의 결정적인 근거가 된 것이다.
무신론의 근거를 제공한 또 하나의 당사자가 있다. 하나님을 믿되, 아주 잘못 믿는 자들이다. 본래 신자는 그들이 믿는 신을 대변하는 존재들이다. 신자는 몸과 마음을 드려 섬기는 신을 따르면서, 서서히 그 신의 신실한 자녀(子女)들이 된다. 자식의 얼굴들을 보라. 그 부모의 형상을 드러내지 않던가! 마찬가지이다. 믿는 자들은 자기가 믿는 신의 형상을 보인다.
그런데 세상은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누구에게서 찾으려할까? 당연히 하나님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찾으려 한다. 그런데, 참 신자가 보이지 않고, 주변에 거짓 신자들이나 잘못된 신자들이 범람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자들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까? 결론이 뻔하다. ‘신은 없다’거나 ‘신은 죽었다’라는 무신론자 내지 불신자의 외침과 주장이 힘을 내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제대로 믿어야만 할 이유이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도 있다. 무신론자들 자신의 무지 때문이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란 성육하신 하나님에게서 참 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에게서 확인될 수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는 눈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누구신가? 부재의 하나님이 임재의 하나님도 되심을 온 세상에 구체적으로 알리신 분이다. 세상 만민이 당신을 직접 만나 당신의 영원한 백성이 되도록, 영구미제(永久未濟)의 천국 문을 활짝 열어주신 당사자이셨잖은가!
주목(注目)할 일은, 세상에 어둠이 깊고 나라가 어지러워질수록, 희망을 좇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이 때 너희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어 온다는 점이다. 목마름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어떤 대답거리가 있는가? 그렇다. 우리도 답도 하고 묻기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그럴 위치에 있는 존재이기에, 항상 기억하고 대처하여야 한다.
성경에 보면, 포로 생활 이후의 고단함에 탄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급하니까 여호와를 찾았다. ‘야훼가 어디 있느냐’(사63:11-13참조). 그런가하면,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아버지의 나라로 떠나기 직전에 제자들의 신앙무장을 강조하던 예수님께, 걱정이 깊어진 제자 빌립이 물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 그렇다.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으려면, 먼저 나부터 하나님을 임재의 신으로 만나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오늘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에 주시는 세 본문 내용의 핵심 메시지는, 우리가 찾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과연 어디냐’라는 주제이다. 시작의 시선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으나 흘러가는 방향은 흩어진 주의 교회이다. 그리고 성전의 공간적 역할의 중요성에서 성령이 내주(內住)하시는 성전으로서의 교회와 우리 자신의 온전함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음을 본다.
☞ 구약 본문은 그 하나님을 만난 곳으로서의 지상의 성전의 시작을 소개한다. 그리고 성전의 기능과 그 주요한 역할에 대하여서도 말씀한다. 복음서는 그 지상의 성전보다 더 큰 이로서의 예수께서(6절), 그의 백성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예배자로서의 필요한 영성을 소개하신다. 서신서는 예수를 터로 삼아 그 위에 세워진 온 세계 교회 공동체가 어떤 성전 의식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는 지에 관하여 안내한다.
구약을 보자
이스라엘에는 3대 성전들이 있었다.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헤롯 성전이었다. 본문은 그 중, 제1 성전인 솔로몬 성전의 기원에 대한 증언이다. 본문은 두 차원으로 편성되어있다. 전반부(12-21절)는 왕 솔로몬의 성전 봉헌사(奉獻辭)이다. 후반부(22-30절)는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성전이 이 지상에서 갖게 될 기능과 역할 수행을 위한 솔로몬의 기도(祈禱)다.
1) 솔로몬은 하나님의 허락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므로서, 이제 그 동안의 광야의 떠돌이 성전이었던 회막(會幕) 성전시대가 마감되었음을 선언한다(12-13절). 그 간, 여호와는 빛이 없는 깜깜한 회막의 지성소(至聖所)시대를 통하여, 당신의 빛을 감당할 수 없어하는 인간들과 함께 계시는 방식을 선택해 오셨다(출20:21,딤전6:16참조). 하지만, 왕이 되어 다윗 궁을 마련한 다윗은 여호와의 집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 건립을 간절히 소원했다(16-17절).
2) 다윗의 그 마음을 헤아리신 여호와는 결국 성전 건축을 허락하신다. 다만, 나라 건립에 피를 많이 흘렸던 다윗에게는 그 마음과 뜻만을 기쁨으로 받으시고, 그 성전 건축 자체는 그의 핏줄로서 후계자 될 새 왕이 시행하도록 허락하셨다(18-19절). 그 당사자가 솔로몬인 자기였고, 자기는 그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여 오늘 봉헌하게 되었음을 보고한 것이다(20절). 물론 기존의 언약궤(법궤)도 모실 지성소도 함께 마련했다(21절).
3) 봉헌사 이후, 솔로몬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54절) 하나님께 손을 펴 기도를 올린다(22절).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사하면서(23-24절),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좇는 후손에게는 왕위의 보전이 대대로 이어질 것임을 아비 다윗에게 언약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상기하면서(삼하7:16참조), 이제 그 약속을 꼭 지켜주시도록 요청한다(25-26절). 여기에는 솔로몬 자신의 말씀을 쫓는 왕정을 이루겠다는 다짐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4) 최후에는 여호와의 성전이 전 백성에게 갖는 의미와 바람직한 태도에 대하여 기도를 올린다. 그는 자신이 지어 봉헌한 성전이 여호와의 이름을 주인으로 하는 지상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그 크신 여호와 즉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까지도 용납할 수 없을 만큼의 크신 분을 감히 모실만한 공간이 되지 못하는 곳임을 고백한다(27-29절). 땅의 성전의 한계를 고백한 것이다.
5) 그렇지만 주의 성전은 시공에 얽혀 사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장소이다. 그것은 성전에는 주의 이름이 있고, 주의 시선이 머물며, 주의 뜻이 말씀으로 선포되는 곳이어서, 주께 예배하며 교제하려는 자들은 당연히 찾게 되고, 주를 향한 마음의 기도가 집중되는 곳이다. 솔로몬은 바로 그 점들을 거론하면서, 자기와 백성들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응답해달라고 간구하였다(30절).
☞ 성전을 향한 솔로몬의 기도의 방향 제시는 그 응답의 파장이 매우 컸다. 추후 바벨론의 포로기에 엄청난 신앙의 역사를 써내려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기도생활의 지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세 번씩, 모국의 예루살렘 성전의 방향을 향하여 자기 집 창문을 열고 기도생활을 목숨 걸고 시행했던 모습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단6:10참조). 그럼에도 지상의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구원의 세계화를 위해 새 옷을 입어야만 했다. 탈 예루살렘 성전 중심으로, 각자의 현장 중심의 영적 성전 생활로 나아가야만 했다.
복음서를 보자
헤롯 성전의 실상에 좌절하셨던 예수께서는(요2:19참조), 이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길거리에 있는 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것을 시비하며 ‘안식일에 위법했다’면서 공격해 오는 바리새인들을 대하면서(1-2절), 보다 초(超)강경한 대응을 하셨다. 그들의 천박한 율법지식에 대한 역공과 함께,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제사(삶의)가 무엇인지를 제시하셨다(3-8절).
1) 예수는 율법세계에서도 배고픈 자들에 대한 위법적 행위에는 관용이 허용된 사례를 제시하셨다. 그것도 다윗 일행들의 유사했던 사례(3-4절,삼상21:6참조)와 제사장들의 성전 안에서의 안식일에 위법하는 일도 무죄 처리된 사례를 들면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의 행위의 무죄함을 변호해 주셨다(민28:9-10참조). 율법 시대에서의 사례로 제자들의 무죄를 변론하신 것이다.
2)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큰 이’로서 당신을 규정하시고(6절), ‘안식일의 주인’ 자격으로 선포하셨다(8절). 이런 자기 계시(啓示)는 실로 당시의 유대종교로서는 도저히 수용 불가한 신성 모독적이며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도발적 선포였다. 그때 예수께서 전거로 제시하신 말씀도, 호세아 예언자가 선포했던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호6:6)란 말씀이었다.
3) 이 말씀에는 자비를 통한 이웃 사랑을 버리고, 제사를 통한 하나님 사랑만 강조한 유대교의 껍데기 종교를 정면으로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가난하고 배고프며 힘없는 자들을 향한 자비의 마음이 없는 종교에는 정죄의 법만 살아서, 힘없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죄인의 굴레를 씌울 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의인으로 둔갑시키는 이중적 모순들에 빠지게 함을 지적하셨다.
☞ 예수와 바리새인의 시각 차(差)는 어데서 나온 것일까? 고정된 틀과 제도를 갖춘 성전 중심의 신앙관에 매몰된 이들에는 어쩔 수 없잖은가 싶다. 그것의 유지와 보전이 곧 구원신앙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이 삶의 현장(現場) 중심의 신앙관을 갖도록 이끄신다. 현장의 고통과 신음에 귀를 기우리고 답을 줄 신앙이어야 함을 일깨우시려고 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둘의 긴장은 여전하다고 보인다. 제도권의 성전중심의 신앙과 현장중심의 복음이 간극을 통전하며 조화할 길이 있을까? 만일 이 둘을 적절히 타협하려는 태도로서는 예수의 교회를 이루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제도권의 교회가 교회 운영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아니하고 현장에 복음의 해답을 주기 위한 전진기지(?)와 같은 선교적 기능을 수행하려는 데 목적을 둔다면, 그래도 가장 바람직한 교회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신서를 보자
그 바람직한 방향 제시가 사도 바울에게서 나왔다. 그는 성령과 복음을 통하여 온 세계 선교(宣敎)에 힘쓰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에 앞장 선 하나님의 종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고정된 성전 중심적 신앙관은 없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터(foundation)로 둔 교회를 통한 구원 운동에다 그의 전체를 걸고 있었다(10-11절). 즉 예수의 마음, 말씀, 삶, 꿈을 전하고 심는 교회 공동체 세우기에 그의 선교가 집중되고 있었다.
1) 예수를 터로 둔 교회에는 거짓 종교나 이단 세력은 발붙일 수 없다. 절대 지켜야할 선(線)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주의 일꾼들이 주어진 은사와 주님을 향한 충성심으로 그 터 위에다 자신의 선교적 공적(功績)들을 쌓으면 된다. 당연히 불같은 시험들과 연단들 속에서 공적 쌓기가 진행될 터인데, 문제는 살아남는 데에 있다. 쌓은 공적만큼 상(賞)은 따른다!(12-15절).
2) 예수교회의 전위대로 부름 받은 일꾼들은 자신이 ‘이동식(移動式)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의식이 절대 필요하고, 성전인 자기 안에도 성령이 함께하심도 명심하며 일해야만 한다(16절). 잊지 말자. 성전의 기본은 거룩이다! 어떤 경우에도 성전인 자신을 더럽히면, 그는 주인 되신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게 된다(17절). 주의 일에 헌신하는 자는 영적 관리에도 성공해야 한다.
결론이다
우리는 평생 성전 중심의 신앙을 산다. 하지만 이 성전은 건물로만 대변되면 안 된다. 그 안의 모든 예배와 선교와 교제와 섬김과 기도 등의 행위가 터이신 예수의 움직임과 뜻을 반영하는 공동체이어야만 된다. 특히 우리 자신은 이동식 성전(일명, 흩어지는 교회)이라는 정체성에도 눈이 떠야만 한다. 그럴 때, 성전과 공동체 모두는 강하고 거룩해진다. 잊지 말자. 주님은 우리란 보이는 성전을 통하여, 당신이 고통 하는 세상을 사랑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를 위해, 성전보다 더 큰 예수가 강조하신 말씀, 즉 어려운 이웃을 향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성전으로 내 자신을 계속 일깨우며 살아가야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