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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9)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종교개혁기념주일

관리자 2019-10-24 (목) 19:27 5년전 1699  

본문) 삼상 16:1~13, 마22:41-46, 행2:22-36 

 

늦가을에 접어든 10월 마지막 주일이다. 날씨가 매우 싸늘해졌는데, 부디 건강하시기를 빈다.

 

창조절 아홉째 주일인 오늘은 특히, 세계의 개혁(改革)교회에서 루터의 종교개혁 제502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하다. 본래 카톨릭 신부였던 루터는 당시 교회의 면죄부 사건을 비롯한 교회들의 비성서적인 행태들에 오랫동안 깊이 고민하다가, 1517년 10월 31일에 성(聖)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성당의 게시판에다, ‘우리 함께 토론(討論)해보자’며 95개조 항목의 논제를 정리하여 올렸다. 그때 만해도, 그도 자신이 엄청난 개혁자가 되리라고 생각하지도 아니하였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하여 그는 한순간 세계 역사의 대변혁의 축(軸)이 되는 자리에 서고야 만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절대 루터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독일의 루터를 전후해서, 당시 유럽교회는 기득권을 가진 로마 교황교회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흐름이 광범위하게 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가톨릭교회의 비(非)신앙적 타락상에 대한 개혁자들의 비판과 무너진 성서의 가치를 되찾고자 전개한 신앙적 반격(反擊)들이 유럽 전체에 퍼져 있었다. 

 

루터보다 150년 전에 이미 영국에서 교회의 부패와 교황의 무오(無誤)성에 반대하며 개혁운동의 문을 연 존 위클리프, 100년 전에 저항 운동하다 화형당한 체코의 얀 후스, 카톨릭과의 전쟁에 참여하면서까지 당시 로마교회에 항전(抗戰)했던 스위스의 쯔윙그리, 삼위일체론적 입장으로 제네바를 중심으로 성도를 이루기 위하여 진리 운동을 폈던 불란서의 요한 칼뱅 등등은 루터 못지않게 엄청난 발자취를 남긴 개혁자들이였다. 루터는 다만 모든 개혁의 상징이었다! 

 

그러면, 성서 안에서의 종교개혁의 실체는 어떠한가? 우리가 신앙의 조상들로 간주하는 모든 성서의 큰 인물들은 모두 개혁자들로 보시면 된다. 아브라함이 역시 개혁의 조상이시다. 그의 아버지 데라의 우상종교를 거부하고(구약사본), 여호와의 부름에 삶을 전적으로 헌신하며 나아온 첫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출애굽의 주인공이자 십계명을 받아 전달한 모세도 개혁자이다. 그는 처음으로 기록된 진리의 말씀의 세계(율법)를 안겨 준 인물이었다. 지난 몇 주간동안 우리가 만나온 여호수아나 사무엘 선지자들로 역사의 고비를 신앙으로 지켜낸 개혁자들이었다. 

 

이스라엘 사(史)에서는 성전을 수리하다가 신명기 법전을 찾아낸 후, 그 말씀대로 백성을 다스리려했던 유다의 왕 요시아를 종교개혁자로 꼽는다(B.C641). 그밖에 많은 굵은 선지자들도 모두 낡은 당시의 종교를 비판하고 새로운 빛과 생명의 종교의 문을 열려는 개혁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개혁의 진짜 성취자는 나사렛 예수이셨다! 낡고 퇴락한 유대의 율법종교를 벗어나,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생명의 종교의 문을 열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참변과 부활의 새 역사를 여셔서, 종교개혁의 진정한 완성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사도들과 그 교회들은 그 분의 뜻과 세계를 온 세상에 구현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들일 뿐이다. 성서에서 증언된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를 온 세상에 온전히 구현하기 위하여 목숨 걸고 헌신한 믿음의 전사들이었다. 궁금한 건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계속 성숙하고자 하는 개혁적인가, 아니면 미미(微微)한 것에 안주하고 있는 보수주의자인가?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개혁되어야만 한다. 건강하게 자라고 성장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가진 신앙은 우리 자신을 낡은 세력으로 주저앉게 할 수 있다. 보라! 세상은 우리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저항자’라고 하지 아니하는가? 건강한 교회와 성도가 있는 곳은 언제나 생명력이 흐른다. 더럽고 낡은 것을 씻어내고 건강하고 신선한 생명의 흐름을 생산하는 곳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두를 일깨우며 생각을 새롭게 결집시킬 개혁의 주제는 중요하다. 개혁자들이 제창한 중요한 구호들이 힘이 있는 이유이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성서로’, ‘오직 성령으로’ 등등은 그 나름대로의 운동에 큰 동력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금번, 창조절 셋째 해에 맞이하는 종교개혁주일에 받게 되는 세 본문의 핵심적 주제는 무엇일까? ‘예수가 온 세상의 구원자인 그리스도이시다’가 그 주제로 보인다! 매우 간단하지만, 가장 강력할 수 있는 주제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나사렛 예수를 온 세상이 하나같이 구세주로 영접하고 고백한다면, 이 세상은 바로 평화와 구원을 누리는 곳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예수보다 더 강력한 인간, 존재, 세력, 이념 등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 보면, 지금도 이 주제가 우리 모두의 신앙의 핵심에 자리 잡지 못하고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의 교회이면서 지금의 한국교회는 인간의 교회가 되어 있다. 예수가 진정한 교회의 주가 되지 못한 곳들이 허다하다. 예수 이름을 앞세우면서도, 그 이름을 너무도 엉뚱하게 이용한다. 그러기에 지금의 한국교회가 이처럼 허약해진 것이다! 

 

얼마 전, 우리 기장의 뿌리 된 조상의 땅 이야기를 담은 <북간도의 십자가>란 영화를 보았다.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일대인 북간도의 명동촌 일대는 김약연 목사, 윤동주 시인, 문재린과 문익환, 문동환 등 여러 가문이 신앙공동체를 개척해 100년 전 항일독립운동의 기지를 이룬 곳이다. 일제의 만행을 피하여 만주로 피난 간 믿음의 가족들은 그곳에서 넓고 광활한 땅을 사서, 집을 짓고 학교와 교회를 세우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눈물 나는 엄격한 생활을 했다. 

 

모든 수입의 1/3은 자신들의 생활비로, 1/3은 조국 독립을 위한 기금으로, 1/3은 후학을 기르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사용했다. 당시의 교회는 민족을 구할 독립군과 항일 인사들을 키워내는 요람이었다. 그런 연고로 그곳 북간도의 지원을 받았던 독립군들이 저 항일운동사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쌓았던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최근 영화)의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을 정도였다. 실로 교회가 민족의 희망이었고, 인물들의 거점이었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인사들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거나 3·1운동의 초석을 세웠고, 교회인사들(김재준,강원용,안병무)은 상당수가 해방 후 남한에 와서 현 한신대학교를 세우고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길러냈다. 

 

그렇다면, 다시 본문들을 주목하자. 어느 누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시다’는 주제를 퍼뜨렸는가? 놀랍게도, 옛날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이었던 다윗이 그 장본인이다. 그는 자기도 왕이면서, 자기 위에 계신 만유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이시며 최고의 왕이시라고 고백한 것이다!(마22:43,45,행2:22-28참조) 땅의 왕이 하늘의 왕을 제대로 알아본 것이다. 그 바람에, 그리스도께서 인간되어 이 세상에 오실 때, 당신을 이미 알아본 결정적인 인물인 다윗의 핏줄(혈통)을 빌려 오셨던 것이다(마1:1참조). 

 

구약을 보자

백성들이 원한 왕정을 허락하신 여호와는 이제 첫 왕이었던 사울에 실망하신 후, 이번에는 당신이 마음에 둔 새 왕재(王才)를 지목하신다. 그가 바로 베들레헴의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인 다윗이었다(1절, 행13:22참조). 본문은 그 다윗이 하나님의 지목을 받아,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피택(被擇)되는 첫 과정을 전한다. 그 일의 주도자는 늙은 사사인 사무엘이었다. 

 

그에게도 두려움이 있었다. 여호와로부터 베들레헴에 가라는 지시를 받자, 사울 왕이 새 왕을 찾고 있는 자기를 살려둘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2절). 그러자 여호와께서 제사를 목적으로 방문한 것으로 말하게 하면서,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청하는 형식의 지침도 주셔서, 무사히 그 일이 진행되었다(3절). 제사를 목적으로 한 사무엘의 방문은 그곳의 장로들에게도 평안을 주었고(4-5절), 새 왕재를 찾아 기름 붓는 작업이 무사히 진행되었다. 

 

이때의 새 왕의 피택 기준은 사무엘과 여호와 사이에 아주 달랐다. 사무엘은 잘 생긴 이새의 장남을 비롯한 아들들에게 매료되어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로 간주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인간의 외모(外貌)가 아니라, 그 내면의 중심을 보고 계셨기 때문이었다(6-7절). 결국 최종적으로 피택된 자는 이새의 막내였던 다윗이었다(11-12절).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다윗의 어떤 내면이 그토록 여호와의 마음과 눈길을 사로잡게 한 것일까? 

 

그 때 그는 형들 대신에, 가족을 대표하여 그 홀로 가족의 양들을 치고 있었다. 목장인 현장(現場)을 지키는 진정한 목동인 다윗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16:12참조).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의 초청에 형제들 모두가 들떠 참석을 원하자, 힘없는(?) 막내가 결국 그 남은 양떼를 돌보아야했던 처지로 보인다. 평소에도 다윗은 책임감에서, 포용력에서, 자신의 양보를 통하여 모두를 되게 하는 데에서 남다른 따뜻함을 가진 젊은이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는 싸움과 위기에서 물러나지 않는 용기와 탁월한 애국심과 뛰어난 하나님 사랑의 영성을 소유한 자였다(삼상17:34-35,45-47참조).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는 선언도 그가 하였다(47). 

 

결국 다윗에게 차기 왕의 예비자로 직임(職任)하는 기름 부음이 거행되었다(13절). 그러자 여호와의 영이신 성령(聖靈)이 임하면서, 그를 감동하시기 시작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를 당신의 장중에 두셔서, 당신의 깊은 세계를 맛보게 하시고 논의하시면서 역사를 끌어가려하신 것이다. 나중에 예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로 하늘에 계실 때, 다윗과 만나셨던 것을 언급하신 점은 다윗이 받은 성령의 감동이 얼마나 시공을 초월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인지를 엿보게 한다. 

 

복음서를 보자

유대종교에서의 메시아론, 즉 그리스도론은 매우 확고했다. 그 핵심은 오실 메시아는 반드시 다윗의 자손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42절). 그러기에, 마태는 나사렛 예수가 그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그리스도이셨음을 증언하기 위하여, 그의 책 복음서 첫 장 첫 절에서 그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과 그의 인간 조상까지 치밀하게 천명(闡明)하였다(마1:1-16절.참조). 

 

당사자인 예수께서는 정작 지상에서의 당신의 사역을 마감하는 시간이 임박하자, 당시의 정통 유대교도들을 불러들여(41절), 그리스도의 다윗 후손(後孫)설에 대하여 새로운 차원의 정리를 하셨다(삼하7:12-16,시89:19-29참조). 시중에서는 이미 그를 믿는 자들이 당신을 주(主)라고 고백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마20:30-33). 그게 바로 복음서 본문이다(막12:35-37참조). 

 

예수님의 문제 제기는 이것이었다. ‘다윗은 이미 성령의 감동으로 그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른 적이 있었는데-(삼하23:2,시110:1참조,43,45절), 그런데도 그리스도가 어찌 다윗의 자손이겠느냐’는 것이었다(45절,하). 결국 이 예수의 지적은 당시의 메시아론에 대한 분명한 상황 정리하고자 하심에 있었다. 즉 ‘지상의 존재로서의 나사렛 예수는 다윗 가문 출신이다. 하지만 하늘로 올리워진 그리스도로서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다윗이 앞서 말한 주이시다’(행2:33,13:33-36, 롬1:3-4.참조). 이에 대해 성령 역사에 무지한 바리새인들이 알 리가 없었다. 

 

이런 메시지를 수용하려면 누구나, 최소한 다윗에게 주의 시공을 초월한 세계를 접하게 하신 성령의 초(超)역사에 눈이 떠야만 했다. 동시에 주 그리스도께서는 다윗 이전에 이미 선재(先在)하신 분으로서, 다윗을 만나주신 분이었음(삼상16:13절.참조)도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복음서들이 전하고자 한, ‘나사렛 예수가 곧 주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앙 선언는 당시유대교와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새 메시아론이요 구원론이 분명하여, 그들 기존 종교에는 핵폭탄(核爆彈)급의 종교개혁의 대 메시지였다-!!! 이 선언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랜 전부터 보내시리라고 언약하신 메시아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 까닭은 그 메시아는 이미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시다! 예수가 바로 온 세상 만민의 주이시다.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이제 구원을 받는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온 이스라엘이 존경해마지 않는 왕인 다윗을 증인으로 호출하며, 역사의 지축(地軸)을 흔드는 새 종교개혁 선언을 하였다-! 세상의 온 시선을 낡은 유대교의 율법종교에서, 예수로 시작된 새 복음의 생명종교로 집중하게 하는 팡파르를 올렸다! 그들 이외에, 그 일에 앞장 선 주축들이 있었다. 성령과 사도들(제자들)이 그들이었다!

 

서신서를 보자

본문은 ‘예수가 주’이심을 목숨 걸고 온 이스라엘에게 증언한 사도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그는 나사렛 예수가 이 지상에서 보이셨던 메시아로서의 놀라웠던 많은 사역을 소개하면서(22절), 그런 그가 하나님의 예고하신 바대로 무법(無法)한 자들의 손으로 죽임을 당하신 일과(23절), 그럼에도 하나님의 그 사망이 고통에서 그를 풀어 살리셔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이 된 일을 차근차근 풀어 설명하였다(24절). 

 

여기에서 그는 또 다시 위대한 그들의 조상 다윗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서 미리 알게 된 놀라운 영적 체험담을 소개하면서(25-28절, 마22:45참조), 그들의 뜨거운 신앙심을 고취하였다. 이때 사도는 다윗을 선지자라 칭하면서(30절), 그가 미리 본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 이후에도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취하게 된 부활의 영광의 세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언급한다(3-32절). 이 모든 결정적인 사건은 다윗에게 만나주신 성령이 이번에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도 개입하여서, 그를 영광과 생명의 주로 올리셨기 때문임을 강조하였다(33,36절). 

 

결국 사도의 이 뜨거운 증언은 예수가 온 세상 만민의 주이시며,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는 유일하신 주이시고 왕이심을 예루살렘 사람들은 물론, 온 세상 만민들이 고백하게 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의 이 증언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이 하루에 3천명, 5천명이나 회개하고 예수께서 희망을 품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실로 세계 최대의 종교개혁 현장의 모습이었다! 

 

결론이다

이 시대에는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 절대 필요하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성령의 감동과 지혜를 받은 다윗과 베드로처럼, ‘예수가 주’이심을 거침없이 증언하고, 또 그로 인하여 펼쳐질 구원의 세계를 보여주려고 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강조하였다. 진정 성령 세계에 깊이 들어거야 하겠다. 그의 인도를 제대로 받아야 하겠다!!  

 

우리는 정말 교회개혁이 필요한 시대에 산다. 그 개혁의 모토는 ‘예수는 주이시다’라야 한다. 그 고백으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불의와 거짓과 비겁과 가짜와 타협하면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마음과 입술을 모으자.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고 외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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