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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10-18 (금) 08:25 5년전 1633  

분문) 삼상 8:1-22, 마11:16-24, 롬7:5-13

 

지난 주간 우리는 완연한 가을의 맛을 보기 시작했으나, 이웃 일본은 태풍 하기비스로 인하여 전체 열도가 강타(强打)를 당하며 신음하는 때였다. 평소 위기 대비에 철저한 일본인들도 도저히 어쩔 수 없었던 자연재해로 인한 폭우와 강풍 앞에 속수무책으로 치명타를 당한 것이다.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은 여전히 허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임을 다시금 확인하였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였다. 지난 2-3개월간 ‘조국 정국’으로 불리는 ‘미친 정치광풍’이 그의 사퇴로 인하여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향한 공격과 방어에 단기간 이토록 온 국민적 관심사가 결집되었던 일은 해방 후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그는 우리 시대의 상징(象徵)성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말한다. 그의 적대자들은 아직도 확인되지 못한(?)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정죄의 돌을 던지고 있지만, 그를 지원한 응원자들은 그가 붙잡고 씨름하는 과제들이 이 땅에서 꼭 성취되도록 여전히 응원을 보내고 있다. 

 

그의 인간적 정의나 불의의 문제는 이제 사법 차원에서 정리할 일이지만, 그가 씨름하면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디딤돌을 놓으려고 했던 그 국가적 과제들은 그의 퇴장으로 끝날 수는 없고, 오히려 국민들이 앞장 서 더욱 탄력 있게 개혁해 나아가야만 할 일들이다. 

 

일제의 최대의 유산 중의 하나인 정치 검찰을 개혁하는 일은 이제 반드시 마무리해야 한다. 국민 앞에는 겸손하고, 법 집행 앞에서는 철저히 정의로운 국민의 충복으로서의 검찰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그들과의 얽혀있던 언론과의 유착, 경제계와의 유착들, 극보수 종교계와의 유착도 끝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보수 진영에 만연한 친일세력들의 득세도 막아야 하고, 강대국 중심의 국가운영체제에서 자주적 국가운영체제로의 전환도 다져야 한다. 기도할 일들이 많다. 

 

특히 이번 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떠오른 적패대상은 광화문 광장에서 보여준 극우(極右)기독교 세력들이다. 거짓 목사인 전광훈을 앞세운 극우자들은 이번 국가를 위한 기도회란 명목으로 황교안을 비롯한 보수정치인들과 우매한 신자들을 대거 그 앞에 불러모아놓고, 예수 이름을 앞세워 거기 모인 대규모 청중들을 향하여 평화가 아닌 전쟁을 가르쳤다. 원수와 적을 분리시키면서 적들을 증오하며 저주하며 죽이는 일을 거침없이 사주하기도 하였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저주하고 조롱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실로, 예수와 적이 되고 거짓 기독교인의 실체임을 드러내는 일도 개의치 않았다. 세상 죄를 사하려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와 그의 거룩한 교회들을 마음껏 훼손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에 이미 영혼을 빼앗긴 가련한 무리들을 앞세워,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서 밤이슬 맞으며, 북한 망하도록, 서초동 좌파들을 물리치도록, 빨갱이 대통령이 하야(下野)하도록, 좌파 세력들이 이 땅에서 제거되도록 소리치며 주문하듯 외치고 있다. 증오, 혐오, 저주로 가득 찬 그들의 신에게 매달리면서 말이다. 그들의 눈에는 평화가 아니라 광기(狂氣)가 가득해 있다. 실로 미친 신자들을 본다. 

 

이번 일로 인하여 한국의 기독교는 이미 서리를 크게 맞았다. 그들은 기독교의 성찬의 밥상에 재를 뿌렸다.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상표로 가진 기독교가 그들의 거짓 위세와 폭력적 행태를 온 국민들이 생생히 시청했기에, 그 상처와 왜곡된 모습을 치유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정말 거짓 선지자요 사단의 자식이며 위선적 이단세력이 분명하다. 그 때, 주님은 피눈물을 흘리셨을 것이고, 사단은 양손을 들어 박수하였을 것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신학을 하고, 전도사이기도 하다는 야당의 황 대표가 그 앞에서 만족의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체 그는 정치하려는 이유가 뭔가? 그런 위선적 태도는 진리를 왜곡하고 반역사적인 행태를 보인 것이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제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대체 무엇에 박수치고 있었고, 무엇에 분노하고 있었는가? 저 야당 대표처럼, 거짓과 위선과 가짜 설교에 맹목적인 박수를 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성찰해야 한다. 우리 신앙이 패거리 놀음에 놀아난 것은 아니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우리는 본체와 싸워야지, 그림자와 이미지와 싸워서는 안 되잖은가! 결코 가볍게 처신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 교회들은 거짓 기독교에 분노하고 그것이 퇴출되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야만 한다. 기독교가 혼란한 세상에 진정한 빛임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은 창조절 여덟째 주일이며, 루터의 종교개혁기념(502주년) 직전(直前)주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세운 종(終)들과 청지기로부터 말할 수 없는 수모와 위선적 대접에 괴로워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은 분노(憤怒)와, 그로 인해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의 탄식(歎息) 소리에 시선과 관심을 집중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 

 

오늘 세 본문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거스리는 선택을 하고 사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심판을 예고하시고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 중심의 사사(士師)체제를 거부하며 왕정(王政) 체제를 고집한 이스라엘에게 관계 단절을 경고하신다(18절). 복음서에서는 세례요한과 당신을 통하여 그들에게 입체적으로 접근하시려는 일을 일체 거부하면서 비판만 하는 그들에게 소돔의 심판보다 더한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신다(24절). 서신서는 성령이 아닌 율법으로 섬기려는 이들의 한계와 죄성을 예리하게 경고하며,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도록 권한다(6절)

 

구약을 보자

본문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왕정(王政) 체제 요구에 대한 보고를 당신의 종인 사무엘을 통하여 받고나서,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렸다’고 탄식하신 장면을 담고 있다(7-8절). 그 동안 이스라엘은 지파동맹 체제를 통하여 느즌한 연맹 체제로 나라를 기 백년간 유지해 왔으나. 지중해 연변에 밀고 들어와 강한 힘을 내기 시작한 에게해 지역 출신인 인도 게르만족 블레셋 사람들의 위협에 직면하면서(B.C1200년경), 자신들도 이제는 강력한 왕정체제를 통하여, 그 치하에서 나라가 보전되고 백성들이 보호받게 되기를 원하고 나왔다. 

 

사실 이런 체제 변화, 즉 여호와를 오랫동안 자기들의 왕으로 섬겨왔던 사사시대를 거부하고 세상 나라의 왕정체제를 요구하고 나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체제 변화를 견인하게 할 틈새가 보였다. 그것은 사무엘의 두 아들로서 백성의 사사가 된 요엘과 아비야가 모두 부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부패는 리더십의 신뢰 저하와 국가안보위기를 불러오면서, 왕정 체제를 요구할 원인을 제공했다. 사무엘은 처음엔 왕정체제의 부작용과 문제점을 띄우며 그들의 뜻을 철회하도록 설득하였으나, 그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19-20절). 

 

결국 그들의 요구는 수용되었으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선택한 결과의 책임은 오롯이 이스라엘 백성의 몫이었다. 왕정은 필연적으로 인간 차별과 인권 억압과 침해(侵害)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이 꼭 지켜내야만 할 인간 사랑의 영역을, 왜곡시키거나 외면하게 하고, 인간 사랑을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일은 그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나라와 백성 됨을 포기하고 보통의 나라로 주저앉는 일이었고,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인의 기본적 지위에서 다시 종의 시대를 선택하고 들어간 일’이어서, 문제는 심각했다. 법아래서 짓눌려 사는 존재의 길로 쫓아 들어간 불행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롬7:13참조). 

 

1) 사무엘이 ‘늙었다’는 표현(1,5절)은 꼭 나이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공인이고 지도자일수록, 자식과 가족 관리에 보다 철저하여야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자식들 관리에 실패한 사무엘에게는 이미 ‘힘이 빠져 있었다’는 표현이 보다 적합한 느낌이다(2-3절 참조). 그 책임감을 하나님께서도 공동으로 느끼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2) 당시의 백성들의 왕정 요구는 사사들의 지도력에 대한 불신 때문만은 아님을 드러냈다. 그들 신앙 자체도 이미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있었고, 여호와를 절대자가 아닌 신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될 정도였기 때문이다(8-9절). 그러기에 여호와는 그 점을 두고, 마음 아파하는 사무엘에게 그들은 ‘너가 아니라 나를 버렸다’고 지적하셨다. 

 

3)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왕정체제 요구를 거부만 하시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이스라엘이 왕정체제가 안고 있는 위험성과 비(非)신앙적 위험성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남의 것을 추종하려는 것의 위험성을 일깨우셨다. 마지막까지 백성을 돌보려는 당신의 책임에 최선을 다하셨다. 

 

4) 왕정(王政)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백성들의 자녀들이 국가와 왕들에게 차출되어, 그들의 군인으로 복무하게 되고 음식 만드는 자들이 되며, 소득의 좋은 것들도 거출되고 세금을 납부하면서 그들의 종들로 살아갈 것으로 보았다. 결국은 그들이 괴로움에 못 이겨 여호와께 부르짖게 될 것이지만, 그 때에는 여호와께서 완전 외면(外面)하실 것임을 통보하셨다(10-18절). 

 

5) 그런 쇼킹한 경고를 듣고도 백성은 완고했다! 인간 왕과 그의 통치가 자기들을 구원해주리라고 확신하면서 왕정을 고집했다. 그런 태도가 하나님께 얼마나 깊은 실망을 안겨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요구는 허락되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존재의 특별함과 자유의 미션을 방기(放棄)한 자들에게 이제 무엇이 더 필요할까? 자신의 미래를 제도와 굴레와 법의 통제에 두려는 존재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오직 몰락의 문만 열렸을 뿐이다.

 

복음서를 보자

이미 중심에서 어긋나기 시작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행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상대를 향한 조롱과 비난뿐이었다. 어긋난 자신의 행태에 대한 반성이나, 상대의 선행에 대한 인정이나, 귀한 것을 배우려는 겸손 등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선한 것에 전혀 반응(反應)하지 못하는 영적 불구자였다(16-17절).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회개와 변화를 위하여 보내신 당신의 두 사람들,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와 그의 선교 행위들에 대하여 웃을 줄도 모르고 울 줄 도 모르며, 오직 비난과 비판과 배척의 일변도만 보였다. 

 

1)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장례식 놀이’형(型)으로 접근하면서 그들의 삶의 도전과 충격을 주면서 회개를 견인하려 했다. 그러자 그들은 요한이 ‘귀신이 들렸다’며 비난하고 조롱하였다(18절). 그러자 나사렛 예수는 요한과는 정반대의 행보로 그들에게 접근하셨다. 그들이 죄인이라는 당시의 민중들과 먹고 마시는 친구로 어울리는 행보를 취하신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면서 빈정대고 나왔다(19절). 도무지 자신들의 패쇄적 마음의 영역을 강고히 드러내며 경계심만 보였다. 

 

2) 하나님의 은혜에 역행(逆行)하기는 예수의 선교활동의 주 무대인 갈릴리 지역들의 행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고라신과 벳세다(눅9:10-)에게 예수께서 보이신 모든 권능과 가버나움에 (마8:5이하) 베푸신 정성과 사랑에, 저들 도시들은 회개가 아닌 배신의 행태로 응답하고 나왔기 때문이다(20-2절). 주님의 실망이 오죽 컸으면, 그들을 향한 최후의 심판이 그들보다 앞서 무자비하게 심판 당했던 옛 도시들이었던 두로와 시돈(겔26-28장), 그리고 소돔(창18:20)이 훨씬 가벼울 것이라고 선언하셨겠는가! 지금도 남은 그 가버나움의 황량한 모습은 잊지 못한다!

 

3) 결국, 아무리 주고 또 주어도 받지 못하고 거부만하는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의 물줄기는 이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게 된다. 마치 흐르는 물이 자기를 수용하는 곳을 찾아가듯이, 거부를 일삼는 유대인들에 대한 버림으로 이어지고, 사모하고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에게는 부르심으로 이어지는 모습으로 새 질서가 형성되었다(마8:10-13, 눅13:28-29등 참조). 

 

서신서를 보자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물꼬는 당신을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이방 세계를 향하신다. 그 주도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께서는 성자의 예고대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하나님나라를 열망하는 자들에게 흘러 들어가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들을 이루셨다. 그들을 움직이는 주체는 더 이상 율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성령이시며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말씀이었다. 본문은 그 성령의 선택으로 사도된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이다. 

 

1) 그는 여기에서 앞의 구약 왕정체제 선택으로 자유를 버리고 종의 굴레로 다시 들어간 조상들의 어리석었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율법이 주는 선물과 그 한계를 냉철하게 분석해 주면서, 그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성령에 의한 삶을 제시하고 나온다(5-6절, 7-12절). 한마디로, 율법(律法)자체는 선한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기능은 죄를 목도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깨닫고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회개하고 갱신으로 이끄는 것은 못 된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율법의 한계다. 아담 부부도 금지 계명을 몰라서가 아니었잖나! 

 

2) 그 대안(代案)은 무엇인가? 물(씻어냄과 회개)과 성령(聖靈)이다(요3:5)! 그 이유도 분명하다. 법과 지식은 우리의 머리를 겨냥한다. 하지만, 성령은 머리를 거쳐 우리의 마음속까지 상대하신다. 우리의 가장 속사람인 영혼까지 터치하신다! 삶의 변화가 어디에서 오는가? 생각하고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면 변화는 시작되잖은가-! 그렇다. 신앙은 머리 차원만으로는 안 된다. 꼭, 마음과 영혼의 차원까지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된다. 

 

결론이다

종교개혁의 물결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 아니 교회개혁의 바람이 시급하다. 소위 한국교회 목회자와 신자들의 거듭남이 시급하다. 그래서 다시 이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살려내야만 한다. 

 

바리새적인 위선과 제대로도 받지 못한 성령을 더 이상 기망(欺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성경공부 만으로나 신학교육 만으로도 부족하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로서만, 가능하다. 성령은 진리와 정의의 영이시다. 거짓과 불의를 거부하고 참과 삶에 새 힘과 지혜를 부여하신다. 우리 교회와 목회자들이 그 변화의 중심세력이 되자. 주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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