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 26:1-11, 눅12:13-21, 고후9:6-15
또 다른 태풍 ‘미탁’이 한반도를 거세게 통과하면서, 한 해의 농사를 마감하고 추수의 기쁨을 누려야 할 우리 농민들은 깊은 씨름이 빠졌다. 올 해는 특히 7개의 태풍의 공격을 받았다. 예전에는 주로 일본으로 빠지던 태풍들이 올 해는 자체 힘이 빠지지 않아, 더 거세게 치고 올라오는 바람에, 우리 한반도까지 밀고 왔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세계의 온난화(溫暖化) 현상 때문이다. 태평양의 수온(水溫)이 쉽게 식지 않아서, 그렇게 늦게까지도 태풍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기상의 변화는 매우 위험하다. 우리의 생태계의 지형을 크게 뒤바꿔 놓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아열대지역에 진입하였다. 그 바람에 사과같이 찬 성격의 과일을 이제는 전국 각지에서 생산하게 된 일도 있어서 반갑기는 하지만, 그러나 해수면의 격변으로 인해 오는 피해와 위험 또한 커졌다. 왜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우리 땅에서 이렇게 활개 치게 되었나? 지구촌이 한없이 좁혀진 느낌이다.
지난 주일에도 들었던 말씀이었지만, 이 모든 문제는 타락한 인간들에게 있다. 몸과 마음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는 인간들이 자신의 이기심과 폭력성과 배타성과 독점성의 거친 성격들을 세상에다 마구 품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엔 왜 그리 자기 자식들과 가족들, 배우자들을 향한 폭력적 살인사건이 많아졌는지, 정말 공포스럽다. 믿고 살 존재가 하나도 없다는 느낌을 줄 정도이기 때문이다.
태풍은 우리 정치계에도 심하다. 정적 타도에 목숨을 걸고 있다. 알고 보면, 자신의 허물이 훨씬 더 큰 사람들이 자기 정적 제거하려는 일에는 거품을 물고 덤빈다. 그들은 이미 각종 비리와 실정으로 탄핵을 당한 자들이고 친일세력이 분명하면서도, 요즈음의 모습은 마치 독립투사들처럼 행세하고 있다. 큰 착각하고 있다. 조국 하나 무너지면, 이 정권이 끝날 것 같나? 아니다. 지금의 국민들은 그 시절, 자기들이 얕잡아보며 부리던, ‘개돼지’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은 창조절 여섯째 주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여 부여하신 세상 관리를 그의 청지기들이 제대로 감당해 주기를 원하신다. 그 점에서, 오늘 우리는 창조주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금 창조주 앞과 세상을 향하여 취할 건강한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듣고자 한다. 오늘의 말씀들은 공히 다음의 두어 가지 부분을 강조한다.
첫째는 자신의 모든 소출과 소유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 조물주께서 주신 것임을 알기 원한다. 구약의 농부의 소출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복음서의 재산이나 유산 문제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 ‘누구의 것이냐’라는 탐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앞서,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식으로 접근해야 됨을 말한다. 서신서의 헌금자들의 마음가짐도 그렇다.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필요에 응답하는 자세를 갖고, 그 분께 드림에 인색(吝嗇)하지 말기를 요구하신다.
둘째는 청지기들이 필히 관리할 부분들로서, 다음의 두 가지가 언급(言及)되었다 :
하나는 하나님께 사랑을 드릴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향해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다
먼저 이 모든 것들을 주신 분(주인)에게 겸손한 자세로 감사(感謝)드리는 일이다. 신명기는 가나안에 이주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기업으로 받은 그 땅에서 소출한 것들에 대한 헌물(獻物)을 먼저 여호와께 드렸다. 복음서는 주어진 소유와 재물을 가지고, 주신 분에 대한 감사가 없이 오직 자기 배불리는 일에만 몰두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극에 대한 경고가 올랐다. 서신서는 받은 것 또는 거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정신과 올바른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됨을 상기시키면서, 인색함이 아니라 즐겨내기를 요구하신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은 당신이 인간에게 감사받는 것으로 모든 계산(計算)을 끝내지 않으신다. 우리가 거둔 소출로 주변의 부족(不足)함에 시달리는 이웃들까지 돌보도록 지시하신다. 구약에서는 제사장을 포함한 레위인들과 그들 가운데 함께 살고 있는 나그네(客)들이 그 대상이다. 복음서에서는 유산 분배에서 제외된 가족들과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이다. 서신서에서는 궁핍에 처한 성도들과 오랜 가뭄으로 핍절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 같은 연약한 이웃들이다.
구약을 보자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입주한 이후, 주어진 땅과 주택 등의 환경에서
농사하여 소출하게 되었을 때, 즉 추수(秋收)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제시된 내용이다.
1) 이스라엘은 그들이 살게 된 땅과 기업과 소출과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알아야만 했다(1절). 자기 것은 없었다. 모두가 받은 것이며 주어진 것들뿐임을 자각해야만 했다. 그 다음 일은 바로 그 영적 기본이 갖추어질 때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어떤 것이었나?
2)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여호와께 나아가 물질과 입술로 감사드리되, 그 표시로 예물을 구별지어 드려야만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신앙사(信仰史)에 하나의 큰 다리가 놓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곧 첫 열매-맏물(Firstborn)신앙이다(2,10절)!
그 토지소산의 맏물(첫 열매)을 거둔 후,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둔 성전에 가지고 나아가 제사장에게 넘겨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으며, 여호와께서 조상들과 자신들에게 고난 속에서도 강한 손과 능력과 이적으로 베푸신 놀라운 은혜들을 추억(追憶)하고, 자기들의 오늘을 있게 하신 일,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 일에 감사(感謝)의 표지로서의 그 맏물을 가져왔음을 고백(告白)한다(2-10절). 이는 상당히 번거롭고 복잡한 절차이지만, 하나님은 매우 엄격히 그 감사의 의례(儀禮)를 지켜낼 것을 명령하셨다.
☞ 우리가 사도신조와 주의 기도문을 외우며, 신앙고백과 주의 기도를 함께 올리게 되는 형식과도 흡사했다. 이것은 우리 예배자들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 우리의 감사는 그 이유가 보다 구체적인 근거에서 나와야 좋고, 또 그런 기억을 바탕으로 고백이 담긴 감사일 때, 받으시는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신다는 점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 우리도 이제 첫 열매 신앙에 눈이 떠야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아벨의 첫 열매 신앙(창4:4)과, 애굽의 마지막 재앙에서 어린 양이 흘린 피 때문에 심판의 재앙을 면한 이스라엘 가족의 초태생(初胎生)들(출12:12-13절)과, 그 때부터, 사람이건 짐승이건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의 다 성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출13:2)는 새 규례에 따라서, 나중에 아기 예수까지도 그 정결예식에 참여하게 된 일들이(눅2:23참조) 첫 열매 신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신앙의 흐름은 지난 2000년 기독교 신앙사에도 무겁게 이어져왔다. ‘첫 것이 복되어야 나중의 것들도 복되다’라는 믿음은 서원신앙과 성별신앙으로도 이어지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성미(誠米), 주의 종의 길에 들어서기 등등의 믿음의 큰 줄기를 형성하는 데에도 이 첫 열매 신앙의 힘은 컸다고 보인다.
3) 한 가지 더 남았다! 주의 일에 생애를 헌신하는 레위인과 함께 거류하는 외인 나그네들을 초청하여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11절). 그래서 그가 비로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실천하며 살아가는 아브라함의 복들을 공유한 진정한 자손들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자신이 관리하고 주관하게 된 각종 소유물을 축적(蓄積)하고 사느냐, 아니면 분배(分配)하며 나누고 사느냐가 그의 운명과 영원을 결정짓는 일임을 일깨워 준 말씀이다.
유대인 전통에는 장자의 권한이 막강했다. 조상의 모든 축복과 재산, 및 남긴 유산들을 독점하여 상속(相續)할 제일의 해당자였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 일로 인하여 내분에 휩싸인 어느 형제가 ‘유산 분배를 조정해 달라’는 요청을 거리의 랍비인 예수께 부탁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의 예수는 그런 정도의 역량이나 능력을 가진 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13절).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그에게는 매우 기대 밖이었다. 당신은 그런 요구나 들어줄 존재가 아님을 밝히시면서(14절), 거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탐심(貪心)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으로 대신하셨다(15절). 여기에는 ‘모든 소유가 하나님이 위탁하신 것이며 절대 자기 것이 아니다’는 인식의 전환을 전제한다. 그러면서 이해가 부족한 그들을 돕고자, 한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를 비유(比喩)로 설명하셨다.
1) 밭에 소출이 풍성하자 그 부자에겐 고민이 생겼다. ‘곡식을 쌓아 둘 곡간이 부족한데, 있는 곡간을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그곳에 쌓아두어야 겠다’(17-18절)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스스로에게 만족감이 밀려들어왔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life/NIV)에게 축복하고 격려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절).
☞ 이런 모습은 그의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그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맹인이었음을 말한다. 금방 늙게 되고 가진 것이 짐이 되는 시대가 오는 것, 즉 질병이나 사망 등의 역습(逆襲)이 그의 삶을 한순간에 주저앉게 하고 심판자 앞에 설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어리석은 인생살이를 살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진 소유와 물질에 그의 실존적 자아(自我)인 몸과 영혼이 눈이 멀어서, 하나님과 이웃에는 무지한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2) 동터 오는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보면, 그의 행위는 정말 바보짓이었다. 그래서 근본적인 인식이 부족한 그에게 주님의 날카로운 심판이 내려졌다. ‘바보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 그러면서 주님은 경고하셨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다’(21절). 그렇다면 재물을 자기에게가 아니라 하늘에 쌓아 두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소유를 팔아 부족함에 시달리는 이웃에게 나눔을 실현할 때, 그 문제의 해답이 주어진다(33-34절 참조).
서신서를 보자
본문은 교회가 세계화되면서, 각 곳에 흩어진 교회들 간의 일치(一致)와 서로 사랑의 돌봄의 일환으로서, 헌금(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던 사례를 전한 내용이다. 이 일에 앞장 선 이는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당시 세계교회의 모(母)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가 오랜 흉년에 시달리면서, 선교와 유지 등에 어려움에 처하자, 예루살렘의 사도회의에서 결의된 바에 따라서 각처에 흩어진 교회들로부터의 모금(헌금)하기에 앞장섰다(갈2:10, 고전16:1-4, 롬15:25-26참조).
그것은 기근 내지 곤궁한 신도들을 위한 구제금이기도 하였고, 동시에 자기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 준 모교회를 향한 이방 교회들의 감사 예물이기도 하였다. 이 헌금을 통하여 그들 모든 교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일치의 표시도 확인하였다(9:12-13절).
이 일이 앞장 선 교회들은 그리스 북부의 마게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이었다. 그들은 고린도교회가 포함된 남부의 아가야 지역교회들 보다도 늦게 소식을 듣고도 더 열심히 헌금하여 모금을 마쳤을 정도였는데, 그에 비해 아가야 교회들은 매우 속도가 더디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교우들의 안이한 태도에 대한 권면을 담고 있다. 우리에게 큰 지침(指針)이 될 것들이다.
1)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것들을 주시면서 주님은 의의 열매도 더하신다(10절).
2) 신자들은 모두가 심는 자들이다. 다만 적게 심는 자와 많이 심는 자가 있을 뿐이다(6절).
3) 심는다는 것은 가진 소유를 흩어 가난한 자에게 줌으로서 하늘에 쌓는 행위를 말한다(9절).
4) 여기에는 올바른 마음가짐과 확실한 믿음이 필수적이다(7-8,10절).
☞ 마음에 정한대로 바치고, 인색한 마음으로는 안 된다. 주님은 즐겨내는 이를 기뻐하신다.
5) 이렇게 드린 물질은 몇 가지 중요하고도 놀라운 역할들을 수행한다(11-14절).
①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 하나님께 감사하게 한다.
② 성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봉사를 하게 한다.
③ 서로의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해 준다.
④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사모하게 한다.
☞ 하나님은 바치는 헌금(모금)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와 착한 일들이 넘치게 하려하신다(8절).
결론이다
인생에도 종종 태풍이 발생한다. 그 태풍은 인간에게서, 질병으로, 사업의 실패로, 판단 착오로, 자연 환경 등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에 대한 대응 능력을 얼마큼 확실하게 보유하고 사느냐에 있다. 누구든 그의 평소의 삶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면서, 주변의 이웃들과 사랑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을 견고히 하며 살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그 어떤 환난과 태풍의 역경에서도 자유롭고 안전할 것이다. 그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의 확고한 신뢰와 보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더욱 매진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