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12:1-9, 요 8:53-59, 갈 3:1-14
오늘은 창조절 셋째 주일이며, 총회가 제정하여 시행하는 남신도회(男信徒會)주일이다. 하지만 지난 한 주간은 온 나라에 때 아닌 바람들이 거셌다. 자연 바람과 사람 바람이 그것이었다.
바람 태풍인 ‘닝닝’의 거센 공세로 남북한 전체의 피해가 컸다. 특히 한 해의 수확을 눈앞에 두었던 과수원 등의 농작물과 밭작물 등의 큰 피해에 마음이 아프다. 풍년의 부푼 꿈이 한순간이 날아가 버렸으니, 농부들의 낭패감이 얼마나 컸겠는가? 부디 용기를 내시기를 기원한다.
인간 태풍도 거셌다. 대통령의 조국 법무장관의 임명 건으로 인한 찬반 논쟁이 역대급(歷代級)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국론이 분열된 듯하지만, 이제는 진정해야 한다. 대통령이 ‘국가의 권력기관의 권력남용을 막고자 그 제도적 개혁을 완수하려고 그를 선택하였다’는 결단을 믿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잘하면 나라가 한 차원 발전할 것이다. 정말 정신 차려야할 때이다.
이번 조국 사태는 우리 내부의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 순간에 처해 있는 지를 잘 보여주었다. 해방 후 지금까지 국가 전반에 걸쳐 득세해 왔던 낡은 세력들이 새로운 개혁 세력들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집단적으로 치열하게 저항하는 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의 거의 전 분야는 친일세력, 군사독제세력, 고위관리들과 언론계의 기득권세력, 지역의존적 패권세력, 반공이데올로기 의존세력, 낡은 보수 세력 등등이 장악해 왔잖은가! 그런 그들이 지금 이미 출애굽한 지금의 새 시대를 다시 옛 것으로 되돌리기 위하여 총력 저항을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보다 온전한 사람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대통령의 눈에 ‘국가 권력의 남용과 오용을 막을 시스템을 마련해낼 적임자(適任者)’로 조국이 들어온 것이다. 그러기에 대통령은 주변의 모든 우려와 반발을 안고도, 그를 끝내 법무장관에 발탁했다.
이런 우리 역사의 전환기에 우리는 남신도회 주일을 맞이하였다. 우리도 다시 생각해야 된다. 무엇보다도 ‘내가 하나님의 눈에 들게 될 인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길은 무엇인가?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의 개혁자로서 택하신 아브라함을 우리 남신도회원들이 반드시 본 받아야할 확실한 대상으로 선정하여, 제시하여 주셨다. 지난 주일에 이미 언급된, <하나님의 택하신 자>와 <남은 자>의 원조로서의 아브라함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개혁자의 첫 모델이라는 논리의 근거는 이것이다. 그에게 떨어진 ‘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는 말씀에 복종한 모습 때문이다. 당시는 씨족(氏族)주의와 종족주의 시대였기에, 본토친척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새 삶과 세상을 위하여 죽기를 각오한 결단력(決斷力)이 있었음을 말하고, 여호와의 지시할 땅으로 가는 일은 새로운 변화와 미래의 질서를 수용할 개혁자로서의 용기(勇氣)를 갖춘 이였음을 말한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당신의 세상 구원과 변화를 주도할 핵심으로 선택하시면서, 전적인 신임(信任)을 넘겨주셨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주저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3절,상). 마치 옛날 임금이 암행어사에게 부여한 전권대사(全權大使) 같은 놀라운 자격증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그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뢰는 신구약 66권 전체에 가득하다. 복음서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임을 첫 장절에서 선언하였고(마1:1), 예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늘나라에서의 심판권을 행사하는 인물로도 소개할 정도이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세계를 움직이는 지금의 4대 종교들(개신교,카톨릭,유대교,이슬람등) 모두도 그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이의 없이 인정한다. 실로 예수 다음의 큰 인물이다-!
구약을 보자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들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소원이 들어있고, 그가 누구를 사랑하고 구원하시는지를 알려 줄 정보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가 받은 복(福)에는 두 가지 차원의 선명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1) 아브라함 자신이 여호와로 인하여, 복의 뿌리요 시작이며 근원이 되는 복이다(2절).
2) 그와 그의 후손이 받은 복을 이웃에게 전하고 나누면서, 더불어 누리게 하는 복이다(3절).
그런데 이 복들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하나님은 이 두 개의 복들을 하나의 패키지(package)로 묶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아브라함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축복들’을 옵션으로 받았다. 혹 그가 그 중 하나만 취하려는 순간, 그 둘 전체를 잃게 되었다. 따라서 이 복들을 함께 감당하고 성취하기 위해서는, 전 생애적인 헌신을 꾸준히 해야만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첫 번째 복에 대하여 살펴보자. 인간이 어떻게 복의 근원이요 뿌리가 될 수 있을까? 스스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복의 원천되신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만 형성되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기에 이 복의 실현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절대적이다. 십계명과 예수님으로부터 요청되었던 그 수준, 즉 ‘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하라’는 지시만 따르면, 그 복은 받게 되었다(신6:5, 막12:30).
두 번째 복은 어떤가? 내가 받은 복을 나 혼자 즐기지 아니하고, 받지 못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며 사는 일이다. 이것은 얼마든지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음을 열고 펴서 살려는 의지가 필요할 뿐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 주신 복, 즉 당신의 백성 된 이들에게 내려주신 복은, 바로 그런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해야 할 내용의 복’이었다! 아브라함의 이 복은, 후에 십계명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二重)계명’으로 정리가 되었다. 인간의 구원 역시 이런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할 때 가능한 것이 되었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복들은 그 후손으로 이어지면서, 세상에 본격적으로 그 실체를 드러냈다. 그 복의 특징은 모든 생명체들의 두뇌(頭腦)가 되고 머리가 되는 복으로 나타났다. 함께 사는 원주민들이 못 보는 것을 나그네인 그들이 먼저 보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먼저 들으면서, 몰랐던 새 영역들을 그들에게 열어주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머리와 눈과 귀와 입이 되어 살아가기 시작했다(창26:12-22, 신28:13참조). 도움도 받고 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복의 근원이 되는 그 언약은, 모세가 나오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서 성취되었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로서, 모세는 율법을 동족에게, 예수님은 복음을 세상 만민에게 전하여 주셨다. 온 세계 만민들은 그 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발견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빛 아래로 모여 들게 되었다. 그 빛 아래에서 그들은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며, 입이 열리는 기적들로 어둔 세상을 밝히며 살아갔고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면, 궁금증이 있다. 왜 하나님은 이 복들 둘을 하나로 묶어 주셨을까 이유가 있었다. 하나님이 보신 인간은 한없이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어서, 복을 받으려는 열정은 강하지만, 나누어주려는 자비의 마음은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받은 복이 죄를 짓게 할 뿐이다. 그래서 이 둘을 하나로 묶어주어야, 비로소 인간이 받은 복을 모두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람을 하나로 묶어서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선택하여 이 두 가지 사랑을 실천하는 백성이 되는 훈련을 직접 받게 하셨다. 이웃 사랑의 실습은. 그들이 이집트에서의 고난당하는 족속으로 400여년 넘게 살아보면서 훈련을 받았다. 직접 노예로 고생해보고, 짓눌리고 빼앗기고 헐벗고 병들고 구금당하며 억울함도 당하면서, 주변의 외로워하는 이웃 나그네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연단도 받았다. 하나님 사랑의 실습은 출애굽 이후의 광야 40년 생활을 통하여 시행되었다. 한시도 생존이 불가능한 열사(熱砂)의 광야에서, 그들은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고 그에게만 복종하는 훈련을 집중해서 받았다. 실로 절묘한 훈련을 받았던 이스라엘이었다!
그런 훈련 후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그들 심장에는 스스로 뗄 수 없는 경고용 딱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너희는 종(從)이었었다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말라. 그것을 망각하면 내가 멸(滅)하겠다’(신15:15을 비롯한 신명기 전체). 그러면서, 그들이 받은 새 땅에서의 삶에는 언제나 주변의 고아-과부-나그네-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생활들을 하도록 끊임없도록 요구되었다. 사실 그 하나님 사랑이 이웃사랑과 더불어 하나되어 잘 지켜졌을 때, 이스라엘은 건강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끝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조상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이원적인 복들을 철저히 폐기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의 왕정(王政)체제를 택하고, 권력의 맛과 돈의 맛에 빠져들면서, 하나님 사랑만 붙잡고, 이웃 사랑의 계명은 포기(抛棄)한 것이다. 인간을 신분 차별의 대상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국가 종교였던 유대교는 인간 사랑을 하나님 사랑에서 분리시키면서, 구원 종교로서의 생명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에 가장 분노하신 이는 하나님이셨다. 당신과의 계약 위반이었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포기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약한 이웃을 착취하고, 불의로 재물을 모으며, 힘없는 자 위에 군림하면서, 당신 앞에 나와서는 경건히 제사하는 자들과 그 예배를 주께서는 단호히 거부하셨다. 그런 행위는 당신을 성전이나 경전의 글 안에 묶어 두고, 세상과는 상관이 없는 신으로 취급하는 짓들로 보시고 미워하셨다. 그 일로 유대교는 생명이 없는 위선 종교가 되었고, 모든 백성들을 ‘목자 없는 길 잃은 양들’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복음서를 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계명의 분리로 구원의 길을 잃어버린 양들을 되찾기 위해 오셨다. 즉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처음의 복의 실체를 되찾아,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 점에서 당시의 유대교도들은 핏줄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내용으로는 이미 마귀의 자식들이었다(요8:44)! 오늘의 복음서는 예수께서 얼마나 유대인 지도자들의 거짓되고 잘못된 신앙과 그 결과에 분노하고 계셨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들로서는 전혀 이해가 불가능한 아브라함과 당신의 관계를 거론하셨다. 그것은 구원사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선재론(先在論)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증언을 하셨다(요1:1-4,14, 요일1:1-4참조). 즉, 주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낳기 이전에 내가 있었다’(58절)라면서, 동시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절)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이 말씀으로 주님은 유대인들로부터 신성모독죄로 몰려서 투석(投石) 형벌을 당할 뻔했다(59절). 하지만 주님의 그 말씀 속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 같이 천상에 있던 아브라함은 지상에 있는 그의 후손들이 당신이 받았던 그 계명들을 분리(分離)시키면서,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종교와 백성들을 망치고 있는 현실에 깊이 개탄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던 중 성자(聖子)께서 지상에 내려가 그 어긋난 질서를 바로 잡아 세상의 구원을 도모하시려는 계획과 실행을 대하면서 한없이 기뻐하였음을 주께서 그렇게 증언하셨다고 본다. (물론 유대인 후손들이 알 리가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주님은 가장 큰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을 첫째로, 이웃 사랑을 둘째로 규정해 지키라 과 일관되게 가르치셨다(막12:28-31참조). 그러면서 당신은 친히 인간 사랑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보여주셨다. 죄인들, 여자들, 아이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 이방인들- 같은 삶의 그늘진 영역에 소외되어 있는 자들을 친히 찾으시며 교제하시며 그들을 격려하시고 친구가 되어 주셨다. 그런 소자들과 세상의 약자들과 적극적인 연대(連帶)를 취하셨다. 이런 인간 사랑을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아니한 자는 영벌(永罰)을 받으리라 경고까지 하셨다.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할 계명들이다!
서신서를 보자
교회 시대를 여신 성령의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은 이제 교회 설립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이웃 사랑이 지구촌의 온 세계인에게 부여됐음을 선포하셨다. 갈라디아 교회도 바로 그 은혜로 세워졌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이 이미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각하고, 율법에 매이지 말며, 그가 받은 믿음의 복을 계승하라고 요구하셨다(8-9절). 그렇다. 율법은 유대인만을 위한 소승(小乘)신자를 만들지만, 이웃 사랑의 복음은 만민을 위한 대승(大乘)적 교회와 인물을 만든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복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으로 우리가 복이 근원이 되고, 그렇게 받은 복들을 온 세상에 건네주어서, 세상 만민들까지도 함께 그 복들을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다. 구원의 길도 바로 거기에서 찾아야만 한다.
결론이다.
요즈음의 한국교회는 이 아브라함의 복을 옛 이스라엘처럼 사탄에게 빼앗겼다. 누구보다도 큰 복을 받았으면서, 이제는 나눔이나 돌봄 대신에 손에 쥔 것들을 지키는 일에 급급하다. 주변에 고통 하는 이웃들을 얕잡아보고,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정죄한다. 그 바람에 한국교회는 사회의 걱정거리가 되어버렸다. 이런 모습으로는 아브라함의 참 자손으로 살 수가 없다.
우리의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아브라함의 그 믿음과 그 복들을 제대로 전승하고 계신가? 혹 하나님 사랑만 받고, 이웃 사랑의 차원은 막혀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상을 살펴야할 때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개혁적이고 실천적인 믿음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아브라함의 받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균형 잡힌 그 축복을 제대로 행사하는 우리 남신도 회원들과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