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5:1-12, 신11:26-32, 고전13:1-13
기해(己亥)년 돼지띠의 새해를 맞이했는데-, 여러분은 복(福)을 많이 받으셨는가? 아마도 지난 며칠 동안, 우리는 지인(知人)들과 숱하게 많은 ‘복 많이 받으시라’는 덕담(德談)들을 주고 받으셨을 터인데-, 그렇다면 여러분은 정말 새해 들어 복을 많이 받으셨는가? 받으셨다면 무엇을 받으셨는가, 또 어디에서 받으셨고 누구에게 받으셨는가? 무엇보다도 이전의 복과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좀 실감나게 소개할 수 있겠는가?
며칠 전, 페이스 북(Facebook)에서 본 기사가 생각난다. 그는 자기를 강원도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말했다. 자기는 소위 동해바다에서 새해 일출(日出)을 맞이하며, 새해가 주는 복을 받겠다고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드는 이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일갈(一喝)한 것이다. 그 요지(要旨)는 이런 것이었다.
‘새해든 석달 그믐이든, 사람이 정해 놓은 날자에 따라 하루를 넘기고 나이 한 살 더 먹었을 뿐이고, 또 동해에 뜨는 새해의 아침 해는 그 전날과 전년에 뜬 해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해에 불과한데, 도대체 왜 한결같은 날과 해를 그렇게까지 구별 지으며 매달리고 있는 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들이 너무도 인위적이고 감정적이라는 비판이었다.
그의 지적은 좀 냉혹하기는 해도, 내용은 매우 정확하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가 갈구하고 얻으려고 하는 복이 거의 대부분 우리 스스로가 설정해 논 영역 구분을 통하여, 복과 저주가 부여된다고 판단하면서, 거기에 매달리는 경향이 뚜렸하기 때문이다. 복(福)이라는 것이 분위기나 감정의 전환(轉換)으로 해결되는 차원의 가벼운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기에 더욱 그렇다.
만일 우리가 받고자 하는 복이 전국의 어느 지역이나 명소를 통하여 주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다. 어느 특정일이 나에게 복을 준다면, 그것 역시 특별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그 때, 그곳에서 기분 좋게 받았던 그 복(?)이 그 후의 나를 얼마나 복된 삶으로 인도하던가? 그 복이 얼마나 유효(有效)하던가? 그 복이 내 삶을 변화와 성숙으로 조금이라도 이끌어 주었던가-?
그렇다고 오해(誤解)는 마시라. ‘복을 외면하자’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복을 받되 제대로 알고, 받자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다. 복은 귀한 것이다. 연약한 우리 인간에게 복을 받지 못하면, 삶을 제대로 지탱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에, 복은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받으면 내 생에 큰 도움과 축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야만 하는 것이 복이다. 그런 점에서 주목하라! 성경만큼 우리 인간들에게 복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선포하는 곳은 없다-!
천지 창조 시에 첫 사람, 아담과 이브에게도 하나님의 복이 임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 의인의 계보를 열게 된 아브라함을 비롯한 신앙의 족장들에게도 하나님의 복이 임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 모세도 여호와의 복을 받으라고 백성들에게 외친 이였다. 시편들도 모두 하나님의 복을 갈구하며 받아 누린 자들의 찬양이다. 어찌 그뿐인가? 오늘 마태복음 본문을 보면, 우리 예수님의 공식적인 첫 대중 설교의 주제도 바로 8복 선언이요, 행복 선언이며, 구원 선언의 내용이었다. 그렇다. 우리 예수님의 오심은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저주의 고리를 끊고, 복된 인생을 기리기리 누리며 살도록 도우시고자 하심이었음을 명심하자. 그러면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여정에 필요한 복은 어떤 것일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복에 대한 이해(理解)와 그 방법(方法)을 제대로 인식하고 접근하는 일이다. 복된 삶, 복을 누리고 사는 삶에 필요한 요소들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씨가 좋아야 한다. 둘째는 밭이 좋아야 한다. 셋째는 환경이 좋아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좋으면, 그 사람은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씨는 무엇인가? 우리 마음과 생각이란 밭에 떨어지는 내용물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고 어떤 말을 듣고 어떤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이 결정되잖은가! 처음부터 뭔가를 스스로 깨닫고 만들어 사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영감을 받아서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좋은 품종의 씨앗을 많이 받고자 힘써야 한다. 좋은 종교, 좋은 부모, 좋은 교육, 좋은 스승, 좋은 친구가 필요한 까닭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밭은 무엇인가? 주어진 씨앗들을 받아들이는 마음 상태이다. 밭고랑이 잘되어 있으면, 떨어진 씨앗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히 결실로 이어진다. 하지만 받아드리는 마음이 왜곡되어 있거나, 밑 빠진 독처럼 되어 있으면, 아무리 좋은 씨라도 소용없다. 결코 아무 것도 결실하지 못한다.
환경(環境)은 무엇인가? 돕는 여건들이다. 낳고 자라서 결실하도록 돕는 주변 환경을 말한다. 우리가 전쟁 없는 평화의 나라를 열망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질 좋은 정당과 지도자를 선출해야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좀 더 유복하고 건강한 생활환경을 만들고자 함도 그 때문이다. 좋은 부모와 조상의 되고자 함도 그 때문이다. 성숙한 교회 환경을 이루고자 함도 그렇다. 주변 환경이 너무 척박하고 살벌하면, 그곳에서 자라는 생명들은 언제 꺾일지 모르잖은가?
우리의 복을 바라보는 시각이 새롭게 열렸으면 좋겠다. 제발 세상적인 복의 시각을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다. 제대로 된 시각과 보는 눈만 열려도 우리는 이미 복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오늘 새해 첫 주일이자 주현절 첫 주일의 세 본문 말씀이 우리가 관심하는 진정한 복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시고 있다. 정말 감사하다. 부디 제대로 듣고 배우고 실천해서, 진정한 복된 새해, 복된 교회와 가정, 복된 백성의 삶을 열어가 보자.
내 눈에는, 세 본문들 중에서, 복음서의 말씀은 복의 씨앗 부분을 말씀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유는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께서는 자신을 모든 사람들이 가슴에 받아야할 복의 근원(根源)이자 씨앗으로 인식하시고, 모두가 당신을 믿고 받아들여 따를 것을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선포하신 복은 매우 독창적(獨創的)이다. 구약 일반에서 제시된 삶의 풍요로운 환경들을 복으로 말하던 차원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무엇보다도 그 누구의 복이든, 당신과 무관(無關)한 것은 복이 아님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도 연관되지 아니하거나, 이 땅에서만 필요한 것은 진정한 복이 아님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의 복은 하늘과 땅, 모두에 유효한 것이어야만 된다. 영원한 나라에까지 이어갈 것이어야 진정한 복이 되었다. 지금 좋았다가 잠시 후에는 쓰레기처럼 되는 복은 당신의 복이 결코 될 수가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좀 더 생각해 보자. 예수의 청중들이 누군가? 그들은 실로 천차만별(千差萬別)의 인물군(人物群)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개별적 상황을 일일이 상대하려 하시지 않으셨다. 다만 거기 모인 사람들이 안고 있던 다양한 영적인 처지-심령이 가난한 것, 애통해하는 것, 온유한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긍휼히 여기는 마음, 청결한 마음, 화평케 하는 마음, 의를 위해 박해를 당하는 자-등등의 처지는 바로 당신 안에 있는 처지와 영성과 같았음을 아셨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선물은 무엇이며, 가장 적합한 선물은 무엇이었겠는가? 예수께서 판단하신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풍요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당신 자신을 그들의 가슴과 영혼 속에 심어주는 일이 그들에게 가장 큰 복이 되리라고 보셨다. 비록 그들이 서로 다른 처지에서 목마름의 해소를 원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런 자들 속에 바로 당신의 존재, 말씀, 세계, 인격, 치유, 사랑 등이 씨앗처럼 뿌려진다면, 그것이 바로 그들 모두의 삶의 변화와 구원을 동시에 안겨다 줄 마스터 키(Master-Key)와 같은 큰 선물이 되리라고 보셨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 말씀은 하늘에서 오신 새 인간이요 참 인간인 예수 당신을 자신의 삶속에 생명의 씨앗으로 받는 자들에게 일어날 다양한 경우의 영적 반응들을 상정(想定)하면서 축복하신 선언들이다. 인간은 본래 누구나 옹졸하고 편협한 존재이다. 하지만 성육하신 주님은 크고 높으시며 무한히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인간은 누구나 예수를 영접하고 그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면, 한동안 피할 수 없는 깨어짐의 몸살을 하게 된다. 사람이 커지고 성숙해지며 새로운 차원의 인물로 거듭나게 되는 데에서 겪게 되는 필연적 코스이기도 하다.
내용만 보면, 예수님의 이 산상 설교는 매우 도전적이고 직선적이며 역설적이다. 비록 본문이 ‘행복 선언’, ‘팔복 선언’, ‘여덟 가지 구원’이란 등등으로 불리지만, 그러나 성탄으로 성육해 오신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된 인생들은 그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진통들이 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이유는 자신이 예수로 인해 겪는 삶의 그 가시적인 힘든 여건들(?)은 불행을 가져오는 요인이 아니라, 도리어 하늘의 위로와 복과 영광을 불러오고 또 자신을 생명(生命)과 구원을 받은 존재가 되게 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하늘의 복(福)을 끌어드릴 그리스도인들의 두 가지 차원의 변화된 삶을 말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예수를 알고 믿게 되면서 자신이 변화를 받아 보여주게 될 자세들인데,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것들이고(3-6절), 또 한편으로는 세상과 이웃을 향한 것들이다(7-10절).
1) 예수님을 알게 되면,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절감한다. 빈곤한 자신의 영혼을 본다(3절).
예수님을 알게 되면, 자신의 허물과 죄 된 모습에 아파한다.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4절).
예수님을 알게 되면, 자신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그 분께 항복하였기 때문이다(5절).
예수님을 알게 되면, 그의 세계와 성품과 인격을 흠모하게 된다. 의에 목마르게 된다(6절).
2) 예수님을 알게 되면, 이웃의 연약함과 공감하며 그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7절).
예수님을 알게 되면, 죄 짓기가 두려워지며,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8절).
예수님을 알게 되면, 평화를 위해 일하게 되며, 다툼과 미움을 버리고 사랑하게 된다(9절).
예수님을 알게 되면, 불의와 범죄에 저항하게 되며, 그로 인해 당하는 고난도 즐긴다(10절)
그렇다. 예수를 생명의 씨앗으로 받는 자는 존재의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면서, 세상에서의 삶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과제들을 끌어안고, 거룩한 씨름을 하면서 살게 된다. 거기에는 좁은 길이 보이고 십자가도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너머에서 열리는 새 하늘 새 땅도 함께 본다. 아니, 영원한 세상의 지평(地平)까지도 보게 된다. 세상을 이길 능력과 지혜도 누리며, 모든 시련을 극복할 평화도 맛본다.
11-12절 말씀은, 그 점을 보다 분명히 요약하여 준다.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구약의 내용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본문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곧 이주(移住)하여 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설교이다. 내용은 이렇다. 출애굽한 후, 광야 40년 생활을 마감하고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될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福)을 기리 누리며 사는 백성이 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 내용은 어떤 것이었나? 바로 그들의 마음 밭에 가장 좋은 생명의 씨앗으로 뿌리신 율법(律法)이란 하나님의 말씀(명령)을 듣고 순종(順從)하며 사는 삶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하나님의 그 씨를 받은 이스라엘의 응답하는 태도를 중요시 한다.
1) 하나님은 그들이 취할 복(福)과 저주(咀呪)를 그들 앞에 함께 전시하시면서, 그것에 이르는 길들이 어떤 내용의 것인지를 각각 상세하게 알려는 주시되, 그러나 최종적인 선택을 하는 데에는 절대로 개입(介入)하시거나 강압(强壓)하시지도 않는다. 비록 아무리 위험한 것이라도, 선택권(選擇權)과 그에 대한 책임(責任)은 오로지 그의 인간들의 몫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26-28,31-32절). 마치 창세기 에덴의 첫 사람들에게 선악과 선택권을 부여하신 상황이다.
2) 말씀에는 그렇게까지 친절히 하나님의 씨를 받은 인간들은 그래도 각각 자기의 마음 밭의 상태에 따라서, 서로 다른 행동으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며 갈 것을 예고하였다. 흔히 그 정도면 누구나 아멘하게 되리라 보이지만, 그러나 실재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불신, 의심, 나태와 게으름, 주변의 유혹들, 이방의 신에 대한 믿음들에 빠지면, 결국 그들은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어둠의 어리석은 자기 갈 길에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26-28절).
3)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백성에게 다시 한 번 간곡한 권고를 던진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그 땅에까지 들어와 살게 되었으니, 너희는 복된 삶을 위해 베푸신 규례와 법도를 지켜라’(31-32절). 그렇다. 새해에는 하나님이 베푸신 말씀의 복들을 받아낼 내 마음 밭의 상태를 최상으로 만드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박토(薄土)에서 옥토(沃土)가 되는 하는 일이 가장 큰 과제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과제는 좋은 환경(環境)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아무리 좋은 씨앗과 좋은 토양이 만나서, 잘 자라기 시작했어도, 그들이 자라고 성장하는 환경이 좋지 못하면, 결국 최상의 결과는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환경의 범위는 무한하지만, 그러나 가장 필요한 기본적인 주변의 환경만은 건강(健康)해야 되지 않겠는가! 복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한 특별 환경이 요청되는 이유이다. 그게 무엇인가?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본문은 성경에서 ‘사랑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여기만큼 사랑을 말하고 예찬한 곳이 없다. 바울이 왜 이렇게까지 사랑의 절대성을 이야기한 것일까? 거긴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혼란한 영적 상태를 매우 우려했다. 그들은 풍성한 인력과 다양한 은사들을 자랑한 무리들이다. 자신감이 넘쳤고, 자기주장들이 강했다. 하나님께 받은 선물들도 풍성해서 자랑거리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자기가 강하다보니까, 서로 하나 되지 못했다. 마치 모래알 교회, 콩가루 교회가 된 샘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으나,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그들의 실존이었다. 복을 많이 받은 듯했으나, 사실은 한없이 가난했다. 한마디로, 교회의 환경이 너무 나빴다. 그런 환경에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산될 수 없었다. 단호한 처방이 필요했다. 무엇이었나?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일이었다.
사도는 교회에게 ‘사랑이 없는, 은사나 인간적 재능들이나 인간의 그 어떤 영웅적인 행위들이 과연 복이냐’를 신랄하게 묻는다. 바울은 그 질문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아무 유익이 없다’는 선언으로 묻는다(1-3절). 본래부터 그는 사랑을, ‘가장 큰 은사’요, ‘가장 좋은 길’로 보았다(고전12:31)던 연고 때문이다. 가장 중요하고 큰 것을 외면하고, 하급의 낮은 것들끼리 자기 자랑 경쟁에 빠진 행동은 일종의 코미디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주장은 인간의 다양한 은사나 재능이나 능력을 거부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좋은 것들이 온전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교회와 가정은 가장 좋은 은사인 사랑을 극대화시키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인간들과 그들의 재능들을 살리게 된다. 하지만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그것은 무가치할 뿐이며 결국은 화(禍)가 되고야 만다. 사랑 없는 그 무엇도 복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사랑으로 행하면, 거기서 생명은 살아난다-! 사랑 환경 조성에 매진하자.
결론은 이렇다
새해를 맞이하였다. 이 새해가 나와 가정과 교회와 나라가 복된 때가 되어야만 하겠다. 어떤 경우에도 미리 염려하거나 두려워말자. 마침 주현절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이미 참 복의 근원이시며 참 인간되신 예수를 생명의 씨앗으로 받았고, 그 분이 내 마음과 영혼의 밭에서 잘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감사할 일이다.
다만, 긴장해서 씨름해야할 일은 ‘좋은 환경(環境)’을 가꾸는 일이다. 우리 주변은 서로 분열시키고 대립하게 하며 하나 됨을 해치려는 어둠의 세력들이 기세를 부린다. 그런 환경에서는 결코 좋은 인물을 생산해낼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사랑의 힘을 어떻게 극대화시키고 자원화 시킬 것인지가 우리의 큰 과제이다. 나부터 사랑의 지수를 높여가자. 사랑하면서 후손들을 키우고,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며, 우리 민족을 돕는 자, 곧 복을 일구어 내는 존재로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