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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후(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송년주일

관리자 2018-12-27 (목) 12:12 5년전 1739  

본문) 눅 2: 41-52, 삼상 1: 19-28, 히 2: 9-18 

  

오늘은 성탄 후(1) 주일이면서, 동시에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송년(送年)주일이다. 이 때 우리는 다시 오지 아니할 2018년의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해를 역사 속으로 보내고, 아직 밟아보지 아니한 새로운 해 2019년을 설래임 속에서 기다린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비하고 계신가? 이제 말씀을 통하여, 연말연시에 주실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을 받도록 하자. 

 

예수님의 소년시절을 전한 복음서 이야기나, 아이 사무엘의 이야기를 전하는 구약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하지만 서신서에 나타난 히브리서의 말씀은 예수를 보는 우리의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주목할 증언의 실마리는 뜻밖에도, 지난 성탄일에 우리가 받았던 미가 예언의 말씀에 있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根本)은 상고(上古)에, 영원(永遠)에 있느니라’(5:2)

 

어떤 내용이었나? 오시는 분은 그의 뿌리인 족보(族譜)가, 하늘에도 있고 땅(인간)에도 있는 분이시다는 것이다. 즉 성탄하신 메시아는,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실 이’임을 전한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너무도 중요한 증언이다. ‘완벽한 구원자의 절대 조건과 기준’을 제시한 지침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이단 사이비 교주들로 인한 피해가 극심한데, 바로 이 말씀은 그 혼란과 질서를 잡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좀 더 생각해보자. 만일 메시아란 존재가 신과 인간, 그 어느 한쪽만을 가진 이라면, 우리의 참 구원자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가 신의 영적 위치에만 있다면, ‘우리 인간과는 동질적(同質的) 차원이 전혀 없는 이’이기 때문에 못된다. 반면에 그의 전부가 우리와 같은 인간뿐이라면, 그 역시 우리와 하등에 다를 바 없는 존재일 뿐이기에, 인간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대도 자신을 메시아라고 고집한다면, 그는 거짓 교주(敎主)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 누구든 자신이 인간을 위한 참 그리스도이려면, 그는 완전한 인간이면서도 신(神)임을 보여 주는-, 일종의 통전(通典)적이고 융합(融合)적인 멀티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입증해야만 한다. 그러기에 메시아는 땅이나 육체나 인간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하늘과 영적 세계와 그 초월적 능력만을 보여주려고만 해서도 안 된다. 그는 하늘인 영과 땅인 육체를 동시에 말해 주어야 하고, 그것을 접목(接木)시키면서 보여 주실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다시 보시기 바란다. 과연 한 쪽 만 있는 분이신가, 아니면 양쪽 모두를 다 소유하신 분이신지-? 메시아가 분명하신가, 아니면 아무래도 거짓말쟁이일 뿐인가? 

 

마침 다음 새해주일부터는 예수님의 생애와 세상의 활동을 전하는 주현절(主顯節)을 맞이하는데, 그 때 바로 이 점을 주의해서 보시기 바란다. 여러분은 금방 나사렛 예수님이야말로, 완벽한 하나님이면서도 동시에 참 인간이신 분이심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도 사랑과 구원이라는 너무도 선한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신 참 신이심을 확인할 것이다.-할렐루야!!! 하나 더 묻자. 혹 여러분 중에 누가 하늘과 땅 모두를 다 함께 안고 있는 분이 계신가-? 물론 있을 리 없다! ‘바로 그거다! 그런 한계를 가진 존재가 우리이기에, 우리에겐 메시아가 절대 필요하다!’ 

 

이런 차원의 생각에 도움을 좀 더 드리기 위해서, 최근에 개봉된 영화 한 편을 소개드린다. <아쿠아맨(Aquaman)>이란 제법 긴, 미국의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이다. 제이슨 모모아와 니콜키드먼이란 멋진 배우들의 연기를 바탕으로 전개된 영화였다. 무대는 육지와 바다 양(兩) 세계다. 그런데, 어찌하다-, 바다의 대제국인 아틀라나의 여왕인 니콜키드먼이 육지에 표류(漂流)해 와서 등대지기인 순진한 남자의 도움을 받고 사랑하게 되면서, 거기에서 난 아이가 바로 주인공인 아쿠아맨이었다. 바다와 땅의 기능 모두를 가진 존재가 태어난 것이다. 

 

엄마 여왕은 아이가 자라기 전에, 사정상 아이를 둔 체 다시 바다로 떠나게 되는데, 남편에게 부탁한다. ‘내 아이는 바다와 육지를 구원할 제국의 왕’임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 아이는 성장하면서, 바다와 육지를 자유롭게 공유하고 왕래할 수 있는 ‘일인이역(一人二役)’의 능력자 아쿠아맨이 되어, 대 활략을 펼친다. 땅의 아들이자 바다의 왕이며 심해(深海)의 수호자로서, 내부의 불의한 세력들과 맞서서, 매우 치열한 전쟁을 하면서 끝내 승리한다. 그들은 누군가? 이 양쪽을 대결 구도로 몰고 가면서, 자기들만의 세상을 이루려고 하는 분리(分離)주의자들이었다. 승리자 임금의 마지막 선언은 이것 이었다- ‘바다와 육지는 하나다!’. 

 

나에게 그 통합 선언의 울림은 정말 컸다! 그 선언은 지금 우리에게도 너무도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 정치와 교회들의 현실도, 바로 강고한 배타주의적 분열(分裂) 세력들과 분열된 우리를 하나로 통합(統合)하려는 세력들이, 대 전쟁(戰爭)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바로 우리의 현실을 말하고 있었고, 우리도 우리 시대의 메시아인 아쿠아맨의 등장과 그의 선언인, ‘우리는 하나다!’를 듣고 싶어서- 목말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탄(聖誕)은 다른 게 아니다. 하늘과 땅을 분리시키고, 하나님과 인간을 대결하게 하며, 서로의 다른 존재들을 거부하고 싸움 붙이려는 세력들을 저지하면서, 서로 화해하고 공존하며 돕고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일이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아쿠아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게, 곧 성탄이었다

 

복음서을 다시 보자

 

그런 메시아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인간 안의 하나님의 모습을 담은 내용이, 바로 오늘 복음서의 내용이다. 그것도 12살짜리 소년 예수의 모습에서 그 메시아의 면모가 몇 가지 뚜렷이 보였다. 

 

1) 당시 이스라엘 아이들은 13세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유월절 등의 3대 절기에 참여하였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대략 120km 정도로, 도보로는 편도(片道)만 약 3일 걸렸고, 많은 순례자들로 인하여 그 때의 아이들은 주변 친족과 지인들과 동행하여야만 했다. 

2) 그런데, 12살짜리 소년 예수께서 부모의 유월절 순례 길에 동행(同行)하셨다. 관례보다는 조금 앞선 행보(行步)이었지만, 그 사유는 불분명하다(42절). 

3) 큰 문제가 발생했다. 순례 후 귀가 시에, 아들 예수가 없음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룻길을 간 후에야 그의 실종 사실을 안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행방을 계속 확인하지 아니한 부모의 부주의 때문이었다(43-44절). 

 

4) 부모들은 예수 찾기에 나섰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역(逆)으로 되돌아가면서 아들을 찾아 나섰다. 무려 3일간이나 걸려 찾은 곳은 놀랍게도 예루살렘 성전이었다(44-46, 상). 예수는 처음부터 부모의 뜻과는 달리, 나사렛을 향한 귀가 길에 오르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43절). 

 

부모가 더욱 놀란 일은, 그곳에 있던 아들 예수의 예전 같지 않은 낯선 모습 때문이었다. 모든 게 일반 소년답지 않았고, 그 모습과 언행은 차라리 그곳 예루살렘 성전이 그에게는 훨씬 더 편하고 자연스러웠음을 과시(?)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소년 예수는 어떤 점에서 그렇게 평소와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신 것일까? 다음의 몇 가지에서 그랬다 : 

 

① 부모 따라 가기를 거부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머무신 일(43절)이다. 일반 아이들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육신의 부모 좇기보다 그곳에 스스로 머무신 것은 그는 이미 하늘 아버지의 손길의 힘을 더 강하게 느끼며 따르기를 시작했음을 알린 것이다.

② 성전에 있는 선생들과 함께 앉아 그들과 주고받기의 토론을 하시면서도, 듣는 자들 모두가 그의 지혜와 답변에 놀란 일이었다(46-47절). 그것은 소년 예수 안에는 이미 하나님만이 말씀 하시고 생각하실 최고의 놀라운 지혜와 경륜이 채워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③ ‘어찌하여 나를 찾으십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라며, 찾아 온 부모를 향한 예수의 반문도 일반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자기 증언이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전이 곧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집은 육신의 거처인 나사렛에만 있은 것이 아니라, 그곳 하늘 아버지께 예배하는 예루살렘 성전도 바로 당신의 집이기에, 당신은 ‘아들로서 필연적(必然的)으로 그곳에도 머무를 수 있었던 자’임을 일깨운 말씀이었다. 하지만 그의 육신(肉身)의 부모는, 세상과 하늘- 두 세계의 담고 태어나신 아들인 예수의 그런 증언을 깨달을 수 없었다(50절).

 

④ ‘예수께서 함께 내려 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順從)하여 받드시더라. 예수는 지혜(知慧)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1-52절)는 증언도 놀랍다-!

소년 예수는 그런 자기를 이해 못하는 부모를 무시(無視)하거나 거스르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깊이 이해하시고 따르시면서, 순종하며 집안 일도 적극 받들어 드렸다(51-52절). 이 점도 놀랍지 않나? 세상의 대부분의 경향과도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처음부터 연약한 육신의 부모의 부족함을 겸손히 채우려는 효자(孝子)의 진면모를 잘 보여 주셨다. 바로 이 점이 예수님이 왜 완전(完全)한 인간이셨는지를 입증(立證)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 때부터 땅과 하늘-두 부모 모두를, 극진히 공경하며 살기 시작했다. ‘지혜가 자랐다’라는 말은 하늘 부모를 알고 섬기는 영적 수준이 커갔음을 말하는 것이고, ‘키가 자랐다’라는 말은 땅의 부모도 잘 공경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소년 예수는 바로 그런 분이었기에, 그는 양(兩) 부모인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실 수밖에 없었으며(52절), 그런 하늘과 땅을 향한 완전성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그에게만 부여된 세상 구원의 사명을 위한 십자가상의 화목제물(和睦祭物)이 되어, 인류의 영원한 구원자로 나아가실 수 있었다. 

 

구약의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스라엘의 큰 선지자인 사무엘은 어떤 인물이기에, 이 놀라운 현장에까지 등장하는 것일까? 그는 어머니 한나의 서원과 통곡의 기도와 부모들의 그 서원 이행(移行)으로 얻어진 존재였다(삼상1:10-11,참조. 본문). 동시에 사무엘은 그 기도를 들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응답의 선물’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아이 사무엘에게는 나약한 인간의 그릇 속에 전능자의 권능의 빛이 담겨 있어서, 복음서의 ‘소년 예수의 빛’이 진하게 엿보이는 인물이기 하다. 

 

그는 소년 시절 하나님으로부터 세 번이나 놀라운 부르심을 받으면서, 늙고 부패했던 제사장 엘리 가문의 멸망을 예언하였고, 제사장이 못 보던 하나님의 세계와 말씀을 일찍부터 받으면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쓰임 받았다(삼상3장 참조). 그 바람에, 사무엘은 일찍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이끌었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가장 큰 역할은 노후에 들어난다. 400여년에 걸쳐 지켜온 사사(士師) 시대를 종료시키고 새로운 왕정시대에로, 국가의 대변혁을 민족의 분열이 없이, 무사히 이끌어낸 일이었다. 국가적 분열과 통합의 혼란스러운 갈림길에서 ‘아쿠아맨 만이 감당할 큰 역할’을 그가 감당해낸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히브리서는 신앙 때문에 박해 받고 고난을 당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교회 공동체들을 돕기를 원했다(16절). 그 방법은, 예수가 인간되신 일이 고난당하는 인간을 구원하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핵심(核心)이었음을 기쁘게 전하는 일이었다. 그는 어떤 신(神)도, 인생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하고, 인간의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코 ‘구원자’(10절)가 될 수 없음도 역설한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오직 인간이 되셨기에 이루실 수 있었던 구원의 실상을 밝힌다. 

 

1) 당신의 종들인 천사(天使)들보다 못한 취급을 잠시 동안 받으셨다. 이유는 예수께서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맛보시면서(9절),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과 형제자매들을 하늘 영광에 이끌고자 하심이었다(10-13절). 

 

2) 혈과 육을 지니신 인간되어 오셨기에, 그가 죽음과 마귀들의 먹이거리가 될 수 있으셨다. 바로 그 점이, 예수가 죽음을 제압하실 구세주가 되실 수 있었던 열쇠였다. 만일 예수가 인간으로 오시지 않고 신의 영광의 자리만 고수하셨다면, 그는 결코 죽음을 직접 제압할 기회가 없어서, 믿음의 가족들을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해방자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14-16절 참조). 성육신은 실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였다! 교만했던 죽음과 마귀는 결코 삼켜서는 안 되는 불멸(不滅)의 존재를 삼킴으로서 영원한 패배를 자초한 것이다. 어둠이 빛을 이기거나 삼킬 수 없다는 진리를 무시하다가, 사망권세와 마귀가 예수에게 완패 당한 것이었다! 

 

3) 범사(凡事)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 창구이자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셨고,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속량하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시험 받는 모든 당신의 백성들을 능히 도우실 구주가 되셨음을 전하면서(17-18절) 모든 고난자들을 격려하였다. 

 

결론은 이렇다

 

메시아의 성탄을 다시 보자. 그가 지닌 신성과 인성의 놀라운 조합과 통전이 어떤 측면에서 우리에게 지혜와 구원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다시 보자. 그런 후에, 하나님이 이 시대에 어떤 사람을 쓰실 지에 대하여서도 관심하자. 우리는 예수와 사무엘과 같은 존재는 아닐지라도, 그가 지닌 두 측면의 신성과 인성을 우리의 구원과 생애를 위해 필수 자원으로 삼아야 하겠다. 이 둘 중의 하나 만으로는 복잡한 우리 인생 문제들을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 하늘과 땅을 함께 품은 영성의 소유자여야 가능하다.

 

물론 우리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다. 하지만, 우리의 분명한 가능성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며 돕는 메시아 예수님이시다. 그를 가까이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는 좋은 일들이 계속될 것이다. 그의 지혜, 그의 능력, 그의 가치관을 뜨겁게 사모하자.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 소중한 모든 것들이 내 생애를 이끌리라. 이 세상은 물론 영원한 세상에서도 생명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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