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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12-14 (금) 11:50 5년전 1898  

본문) 애 3: 19-33, 눅 1: 68-79, 히 6: 9-20  

 

NCCK 인권(人權)센타가 주최하는 2018년도 인권상 수상자들은 두 분이었는데, 하나는 서지현 검사였고, 또 다른 이는 일본인 사토 노부유키 선생였다. 사토 씨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재일 한국인의 인권보호와 신장에 앞장서 왔던 분으로 수상했다.하지만 서지현 검사(檢事)가 수상대상이 된 이유는 특별했다. 그가 인권보호를 위해 일해 온 검사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법조계의 권력 구조 안에서 직접 당했던 성폭력 상황과 아픔을 JTBC에 출연하여 증언하므로서, 소위 ‘미투’(Me Too!)운동을 전 영역으로 촉발시키면서, 여성들의 성(性) 인권 보호 및 향상운동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거론하는 이유는 그의 수상 소감에서 밝힌 하나님 만남에 대한 증언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를 직접 표현을 하지 않았으나, 그가 전한 하나님 체험에 대한 증언은 그날 증언의 압권(壓卷)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는 기도나 눈물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자리에서 상사로부터의 성 폭력과 수치를 당하면서 갖게 된 고통과 괴로움에 빠지자,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특히 공개 증언으로 인한 후폭풍에 시달리게 된 때는 더욱 절박히 기도했다고 하였다. 그때는 억울함과 분노를 당하는 자신에게는 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며, 불의한 가해자에게는 왜 징벌하지 아니하시느냐며 따졌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침묵하실 뿐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의 공개 증언이 점차 이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파장과 도전의 바람을 일으키며, 자기처럼 억눌렸던 여성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출구의 물결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비로소 하나님을 감격 속에서 새롭게 뵙게 되었다고 했다. ‘아, 하나님이 여지껏 나와 함께 계셨구나. 나의 이 고통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이 괴로움에도 더욱 함께 하시는구나-!’ 그의 이러한 하나님의 재발견은 결국 자신을 그 불행의 터널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했으며, 오히려 새로운 소명을 확인하여주었다고 했다. 뜨거운 신앙 고백이었다-! 

 

우리에게도 ‘고난의 쓴 물을 마셔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흔히 잘 나갈 때가 문제는 아니다. 막힐 때가 문제이다. 앞뒤가 안 보일 때, 그 사람됨과 그 사람의 역량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때는 대체로 두 갈레로 나타난다. 그 역경을 통하여 전혀 새롭고 강한 인물로 거듭나는 이들과 반대로 완전히 주저앉는 이들이다. 

 

그 갈림길의 결정적 요인(要因)은 무엇일까? 크게 보면, 서 검사처럼, 그 고난과 어둠의 밑바닥에서 이 모든 것(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여부(與否)로 갈라지기도 하지만, 좀 더 세부적인 분석을 해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마치,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경우처럼(마25:4참조), 그를 어둠의 터널에서도 지치지 않고 견디도록 받치고 끌어줄 여력(餘力)의 영적 힘을 평소 얼마나 보유하고 있느냐의 여부에서 결정된다고 본다. 그게 무엇인가? 다음의 세 가지 영적 기둥들을 그 핵심 요인들로 소개한다. 

 

첫째는 시련 중인 자신을 밑이나 뒤에서 밀어주고 밑받침해줄 힘으로서의 믿음이다. 그 믿음은 누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하나님의 오랜 언약과 약속의 말씀들이다. 예컨대,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나와 함께 하신다’(시23편), ‘하나님은 미쁘사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시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언약의 말씀(고전10:13)등을 의지하는 믿음의 힘이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언약의 말씀에 대한 기억과 믿음 때문에, 역경을 이겨낸 이들이 참 많다!

 

둘째는 앞에서나 위에서 나를 끌어 줄 힘으로서의 소망(희망)이다. 이것은 내가 이 시련을 이겨야할 이유와 당위성을 제공하므로서, 나로 하여금 부딪친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뚫고 가게 하는 강력한 힘을 준다. 내가 고난에서 승리하는 일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기대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살아서 이웃들에게 기여할 분명한 소망의 이유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주저앉지 아니하고 참고 견디며 이겨낼 인물이 되게 한다. 성서의 인물들은 예외 없이 이런 믿음과 소망의 힘으로 승리를 이룬 위인들이다. 그 중에 믿음의 족장인 요셉은 훌륭한 모범이다(창37-45장). 

 

그런데 이 이외에도 하나 더 있다. 이것은 고난의 현장 내부에서 나와 공동체를 결속시키며 생동(生動)하게 할 사랑이다. 자신의 처지가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생각이 들어도, 함께 고생하고 삶을 나누는 동지들과 공동체(가족&교회)들의 사랑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는 절망을 이겨낸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해진다. 서로의 사랑의 힘이 고통의 관문을 뚫고 갈 강력한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단, 오늘 세 본문에서는 믿음과 소망의 영역에만 집중한다)

 

그렇다. 여러분이 평소 이 믿음-소망-사랑의 등불을 밝히고 사신다면, 여러분은 오시는 주님을 언제든 기꺼이 영접 받게 될 것이다. 주의 할 것은 그 힘들이 미련한 처녀들처럼, 금방 바닥날 천박(淺薄)한 수준이 되지 않도록 여분(餘分)의 몫도 있게 하여야 한다. 요즈음엔 자살하는 이들이 많다. 그 요인은 무얼까? 저들에게 자신의 삶을 지탱해 낼 이 영적 에너지, 믿음-소망-사랑의 힘이 바닥났기에, 삶을 견디며 지탱해낼 자신감을 잃고 절망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대림절 셋째 주일인 오늘에 주신 말씀들을 그런 눈으로 다시 보자. 이들 세 본문들이 안고 있던 상황들은 모두가 어둠이요 절망이며 암흑이었다. 그런데도 결국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견디어내면서, 생명의 역사를 물려주며 주의 평강(평화)의 길에 들어섰다. 무엇이 그런 대 역전의 변화와 성취를 가능하였을까? 그 답을 오늘의 말씀에서 찾게 된다면, 우리도 이 극심한 어둠과 고통의 시대에서도 승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구약의 애가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애가(哀歌)서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가 될 자격조차도 없어서(?) 본토와 예루살렘에 버려진 무리들의 슬픈 이야기이다. 당시 바벨론은 포로로 끌어갈 대상을 여러모로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들로 한정하였는데, 그러기에 본토의 남은 자들은 그런 축에도 끼지 못해 버려진 자들이었다. 즉 안팎으로 한없이 얕잡아 보이는 무리들이었다. 그러기에 그곳은 마치 주인 없는 빈 집처럼 간주되어, 제국(帝國)뿐만 아니라, 주변의 족속들에게도 계속 노략과 착취와 짓밟힘을 당하며 지냈다. 그것도 70여년 계속되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무슨 여력이 있었을까? 그런데도 결론은 그들이 그 고난의 엄청난 무게를 견디어 낸 것이다. 무슨 힘 때문이었을까? 

 

1) 그 시대 그들이 노상 먹고 산 양식은 ‘고초와 재난, 곧 쓰디 쓴 쑥과 담즙’이었다(19절). 

2) 그런데도, 그들이 끝까지 붙들고 매달렸던 굵은 생명선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것들이었다.

 

① 자기들을 낙심시켰던 고난과 재난들은 뜻밖에도 또 다른 소망을 품게 하였다(19-21절)

② 그것은 아침마다 기도하게 되면서(23절), 새삼 얻어진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즉 여호와의 무궁하신 사랑과 긍휼 때문에, 자기들은 결코 진멸되지 않았다는 믿음이었다(22-23,31-32절). 여기에는 ‘오직 여호와 자신이 기업이다’는 오래된 언약들을 새삼 기억(記憶)하게 되고(창21:21,민18:20참조), 또 그것을 고백하며, 그렇게 되리라고 희망하는 자들을 여호와께서 당신의 때에 반드시 선대(善待)하시리라는 믿음이 그들의 가슴에 자리하였기 때문이었다(24-26절).

③ 특히 여호와는 자기들이 지금 -죄의 결과로 얻게 된- 나쁜 경험이나 불행의 배후에도 계셔서, 당신의 선하고 의로우신 뜻과 계획을 펼쳐 가신다고도 보게 되었다.(앞서 증언한 서검사가 그런 영적 깨달음을 했다고 본다). 

④ 하나님의 본심(本心)을 이해하고 고난 자체의 역할의 한계(限界)까지도 보게 되었다. 즉 그는 인생이 고생하고 근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님을 간파했다(32-33절 참조). 특히 고생도 이른 때일수록 좋을 것이며, 인자와 긍휼이 풍부하신 주님은 그를 바라는 자를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심도 확신했다(27-33절 참조). 동시에 자기들을 괴롭히는 고난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제 하에 이용되고 있는 종속(從屬)된 도구로 본 것이다. 이런 다양한 영적 각성의 힘이 그들을 포로기의 참혹한 생활에서 견딜 수 있게 한 것이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본문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제사장인 사가랴의 찬미(讚美)이다. 이전의 애가서가 고난의 질곡을 믿음과 희망으로 견디어 낸 증언이라면, 이 복음서는 질곡 체험의 경험을 통하여 활짝 열린 메시아가 임하신 세계를 성령 안에서 미리 호흡하게 된 자의 승리의 외침이다. 

 

1) 사가랴는 ‘요한이 그들의 아들로 태어나리라’는 천사의 예고를 잠시 의심한 바람에, 혹독한 대가를 치뤘다. 요한이 태어나기까지 그는 벙어리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예고대로 그 아들이 태어나고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명명하게 되자, 그의 막혔던 입이 마치 간헐천(間歇川)처럼 터지면서, 오실 분을 전하는 예언(預言)성 찬양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①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뿔인 메시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선지자를 통하여 예고하신 대로, 다윗 왕가를 통하여 오실 분이시다(69-70절, 시132:17참조). 

② 그의 오심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자기들을 미워하는 원수(怨讐)에게 고난을 당하고 시달리는 모든 자들을 구원(救援)하시는 일이다(71절). 이 원수들은 당시의 제국만은 아니다. 백성들을 그릇 인도하는 거짓 종교와 거짓 지도자들과 모든 악행하는 자들도 포함한다. 

   둘째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그 어떠한 억압도 없이 오직 성령과 진리로 드릴 수 있게 하심이다(75절, 요4:23참조). 이런 응답들 역시 하나님의 긍휼(矜恤)과 특히 아브라함과의 맺었던 거룩한 언약에 대한 기억(記憶)의 성취로 된 것이었다(창22:16-17,26:3참조).

2) 사가랴는 자기 아들 요한이 그런 메시아의 구원을 알게 하는 선지자의 사역에 쓰임 받게 됨을 인지하면서, ‘돋는 해’로 오시는 메시아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모든 죄인 된 자들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다가 부활하심으로서, 속량을 받는 자들에게 어둠과 죽음 너머의 영생을 안겨주며, 삶의 발걸음도 평화(平和)로 인도할 것을 예고하였다(76-79절).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로마 제국이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잔악한 탄압과 박해로 생명들을 위해(危害)해 오자, 그 대응을 위한 영적 지침(指針)을 제시한 곳이다. 당시 상황은 적잖은 신도들이 그 잔인한 위협 앞에서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포기 했었다. 배교(背敎)한 것이다. 하지만 주 관심은 그 위협을 견디고 있는 남은 자들었다. 그들을 어떻게 지키고 이겨내게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일시적인 피신이 결코 답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최악의 시련까지도 이겨낸 최강의 믿음의 전사들로 세우는 일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성령께서는 아셨다. 그런 불의한 힘에 밀리면, 복음과 교회의 시대가 닫힐 수밖에 없고,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하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헛되고 무력한 것이 되게 함을 잘 아셨다. 그리고 바로 그 위기가, 성령의 능력을 받은 교회야말로 세상의 가장 포악한 권세까지도 이겨낸 최고의 거룩한 힘과 생명력을 보유한 공동체임을 확인시켜 줄 기회임도 아셨다. 이 승리를 위한 싸움은 대단히 협소한 외길이었는데, 본문은 그 길을 두 가지 측면에서 열어 보여 준다. 

 

1) 먼저, 그들이 이미 성령에 의한 구원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음을 공인하면서, 그들이 특히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성도들을 꾸준히 섬기며 보여 준 여러 사랑의 행위들 주님이 깊이 기억하심을 전한다. 즉 식지 않은 그들의 하나님 사랑을 축복하며, 동시에 살아계셔서 그들의 모든 일체를 지켜보며 평가하시는 임마누엘 신앙을 고취한 것이다(9-10절).  

2) 다음에는 그들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켜주며, 거기에 걸맞게 살도록 독려(督勵)한다. 그들은 누군가? 그들은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번성의 약속들(창22:16참조)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었다(12,17절). 마치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확증하듯, 하나님 자신의 맹세가 담긴 그 약속을 받아낸 자들이다. 그러기에 참고 기다리면, 그 약속의 성취를 100% 보게 될 당사자들이다(13-18절). 하나님이 예수를 대제사장 되게 하심도 하나님의 그 언약의 확증의 표지이기도 하다(20절 참조). 

3) 성도들은 그런 놀랍고 영광스러운 위치에 있는 자들이기에, 이제 결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약속에 대한 의심은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 다만,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계속 믿음과 사랑의 행진을 계속하면서, 주님의 약속의 성취가 곧 이루어질 것을 믿고, 끈기 있게 기다려야 된다(11-12절). 주님은 바로 그런 이들에게 성취의 축복을 안겨 주신 터이니까-! 

 

결론은 이렇다

 

영적으로 보면, 지금 우리 시대는 성경의 그 시대들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유혹과 혼란의 강도는 더 커졌다. 이런 때, 가장 중요한 출구가 어디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와의 관계를 이전보다 더욱 강화시키는 일이다. 

 

나와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오직 주의 말씀이다. 어떤 인간이나 돈이나 지식이나 권력이 절대 아니다. 유혹되어서는 안 된다. 어느 때, 어디에서나 나의 마음과 의식과 존재와 행동과 영혼을 살도록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이 어둠과 거짓으로 길찾기 어려운 시대를 뚫고 갈 에너지와 비전도 말씀 속에 있다. 나를 ‘영생(永生)의 항구(港口)’로까지 데려다 줄 구원선(救援船)도 바로 그 말씀뿐이다. 그래서 이것을 일찍 깨달았던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했다. ‘주님,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온데, 제가 어디로 가오리까?’(요6:68)

 

이제는 그 말씀이 내 안에서 휴면(休眠)이 아닌 동력(動力)하게 해야 한다. 나에게 그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찾아보자. 내 마음에 담아 있어야 한다(애3:21). 서재이나 성경책 속에만 있으면 소용없다. 내 가슴에 채워져 있어야 하고, 내 기억과 추억과 입술의 고백 속에서 언제나 입출입(入出入)이 가능해야 한다. 말씀이 내 삶의 전반을 조정하게 해야 한다. 그 말씀이 내 삶을 받쳐 주고 응원하며, 내 삶을 끌어주고 인도하시게 해야만 된다. 이번 성탄은 그런 말씀의 주님을 반드시 내 구주로 다시 만나는 계절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나는 어떤 역경에도 주의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게 주님의 확고한 약속이요 맹세이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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