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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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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11-30 (금) 10:39 5년전 1866  

본문) 말 3: 1-7, 눅 3: 1-17, 계 3: 4-22  

 

예수의 오심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절기인 대림절(Advent)이 열렸다. 교회 절기로서의 대림절은 12월 성탄절 이전의 4주간과, 11월 30일 무렵에 가까운 주일을 대림절기의 시작 주일로 간주하여 지킨다. 그래서 올 해는 12월 2일부터 시작된 대림절을 4 주간 동안 맞게 된다. 오늘은 또한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의 첫 주일도 된다. 그러기에 오늘 주일은 대림절과 함께, 올 한 해의 삶에 대한 평가와 반성, 그리고 다가 올 신년에 대한 계획 등을 설정하는 일에 분주해질 수밖에 없다. 

 

올 해의 우리나라는 어땠나? 가장 축복 받은 해로 보인다. 그것은 분단 70여년의 아픔을 씻어낼 남북 평화와 화해의 시대가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작년의 이 맘 때를 생각하면, 실로 뽕밭이 바다가 되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를 경험했다. 전쟁의 위기를 절감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냈었는데, 이제는 남북 정상이 세 번이나 만나고 백두산과 한라산 물을 합수(合水)도 시키며, 급기야는 남북의 끊어진 철도를 복원시키려는 활발한 움직임을 시작되었다. 

 

그러면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두어 가지를 제시할 수 있겠다. 하나는 시작된 평화의 물결이 우리 한반도에 확고히 정착되도록 합력(合力)하는 일이다. 올 해의 몫은 시작일 뿐이다. 반드시 좋은 끝을 보게 해야만 한다. 마치 야곱이 에서와의 해후를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우렸던 그 노력이 새해에도 집중해야 한다. 이 일도 우리 교회가 앞장서야만 할 일이다. 

 

게다가 내년 2019년은 3.1운동 제100주년이 되는 기념비적 해이기도 하다. 3.1 정신은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에게는 더욱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 외세 의존의식을 벗고 우리 국민들의 주권의식과 자주의식을 공고히 하며, 그 동안의 분열의 부끄러움을 씻고 세계 평화의 주역으로 발돋움하는 한민족이 되도록, 마음과 뜻을 모아야 하겠다.

 

또 하나는, 우리들 자신을 평화(平和)와 진리(眞理)와 의(義)의 사람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일이다. 진정한 평화와 축복은 세상만 좋아진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앞서가도, 정작 그 세상을 밑받침해야할 내 자신부터가 수준이 낮고 분별력이 부족하고 자질이 형편없다면, 이 세상을 통해 오는 모든 축복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건강한 미래의 준비는 바로 ‘나를 온전히 세우는 일’들로 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 서로의 미움과 시기와 다툼의 마음을 씻어내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참된 힘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자. 나를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위에 이전보다 더욱 분명하게 올려 세우는 일도 더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이야말로, 말씀이 내 삶을 어떻게 복되게 할 수 있는가를 온전히 체험할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의의 사람으로도 내가 다시 서야한다. 이 의는 의(義)도 되고, 의(意)도 된다. 의(義)의 추구는 사적 경향의 인간을 공적 경향의 인간이 되게 한다. 또한 의(意)의 추구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의지적인 존재가 되게 한다. 우리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늙은 모세처럼 허물어질 수 있음을 이미 보았다. 그러기에 끝까지 견디어서 승리의 면류관을 쓰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보다 의지(意志)적 인간으로 다시 세워야만 한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이다. 절기상의 대림절은 첫 번째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을 증언한다. 하지만 또 다른 기다림의 약속도 있다. 바로 재림(再臨)의 메시아를 향한 기다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신 분이었지만, 동시에 다시 오실 분이시다. 하지만 오심의 목적은 완전히 다르다. 첫 번째 오심은 죄인인 우리를 죄악과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셨다. 그 일을 위하여 당신의 몸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은혜를 베푸셨다. 하지만 두 번째 오심은 심판이 목적이다. 우리 모두는 그의 냉정한 평가 앞에서, 최종적인 구원 여부를 판정 받게 된다. 

 

우리는 지금 두 가지 기다림 속에 있다. 중심(中心)을 잘 잡아야 한다. 중심 잡기에도 그 답은 오직 예수이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시작과 끝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예수이심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하다. 곧 은혜와 자비의 예수님의 도움을 여전히 기다려야 할 때이다. 심판의 주님은 첫째의 대응에 대한 결과로 보면 된다. 따라서 이 대림절은 첫 보혜사이신 그 분을 겸손히 기다리면서, 나와 너를 그 분으로 말미암아 더불어 새롭게 세우는 계절이 되게 하자. 그런 눈으로 오늘 주신 세 본문들을 다시 보자. 

 

구약 말라기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구약의 최후기(最後期)에 활동했던 선지자 말라기는 그 시대의 널리 퍼져 있던 유대인들의 낙담(落膽)하고 무기력해진 분위기를 되살려내고자 헌신한다. 

당시의 유대는 비록 포로에서 귀환했고 제 2성전(스룹바벨)까지 복원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 및 신앙 문제 등에서 야기된 허약한 상황으로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의 위상은 바사 제국의 한 지방에 불과했고, 빈곤의 문제도 심각했으며, 이방 여인과의 결혼문제는 그들의 정체성까지 위협했다. 학개와 스가랴로 이어졌던 예언운동도 계속된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제사장들의 나태와 무능함으로 예배도 변질되었고, 율법도 무시하는 경향도 일어나, 유대 사회는 전반적으로 밑바닥 분위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매우 오랫동안 구원자 메시아도 기다렸으나, 답이 없다는 냉소(冷笑)까지 터져 나왔다. (2:17참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회의도 그 만큼 깊어진 것이다. 진정 큰 위기(危機)였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자(使者)’란 뜻을 가진 예언자 말라기의 사명은 컸다. 저들에게 드리운 낙담의 원인들을 찾아내어 책망하고 퇴치하며, 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하여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백성들이 되도록 일깨워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이 무엇인가? 어떻게 이 질식(窒息)된 영적 상황을 극복해 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대안으로 나온 예언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사자를 특사로 파견(派遣)하리라는 예고였다. 

1) 특사(特使=사자) 파견을 통보하신다. 사실 이 특사는 그들이 아주 오랫동안 고대하던 바로 그 존재라는 점에서, ‘언약(言約)의 특사’이었다.(1절) 하지만 오신 그 특사 앞에서는 자유로울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그 특사 자체가 용광로의 불같고, 표백하는 잿물과 같은 존재로서, 모든 죄악에 빠진 자들에게, 그 중 다음 두 대상들에게 거친 자요 변혁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2절). 

 

① 첫째의 겨냥 대상은 하나님의 일들을 맡아 집행하는 레위인들이었다. 마치 금속을 다루는 정련공(精鍊工)과 같은 정화(淨化)의 손길을 가진 주의 사자는, 먼저 주님께 드리는 제물을 다루는 레위 자손과 율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제사장들을 겨냥할 것이다(1:6-2:9참조). 그것은 그만큼 당시의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은, 세상의 총독도 받기를 미워할 정도로, 저질스럽고 역겨운 것이었기 때문이며, 제사장들 역시 백성들에게 율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결국은 주님께 불순종하는 범죄자들을 만들었기에, 그들을 우선 찾겠다고 선언하였다.(3-4절). 

 

② 불의로 악행(惡行)하는 자들도 그 대상이었다(5절). 이는 ‘불의한 자들이 범람에도 그 징벌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냐’라는 백성들의 냉소(2:17참조)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응답이었다. 그러면서 그 심판하실 대상들도 매우 구체적으로 지목(指目)하셨다. 그들이 누군가? 

-점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 증언하는 자, 일꾼들 품삯 떼어먹는 자.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신)자들이다.(6절) 

 

2) 그러기에 이제 백성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불변(不變)하신 하나님을 시비(是非)할게 아니라(6절), 서로를 속이고 하나님까지 속이면서 스스로의 이익을 꾀하므로서 자신들이 여전히 야곱(=도둑)의 후손임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자태부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돌아가 기리 함께 하여 주신다(7절, 계3:20과 흡사). 그러자 그들은 물으리라. -‘돌아가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How are we to return? 7.하)

 

말라기의 이 예언은 그 후,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에게 분명한 길잡이를 제공했다. 즉, ‘오신다는 주의 사자는 언제 오시며, 그게 누구며, 또 그의 외칠 심판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떤 행동으로 응답해야할 것인가' 등등이었다. 이런 궁금증과 기다림의 성취(成就)는 대략 40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를 만나야 했다. 특히 그 역사적, 우주적 대 사건이 될 카이로스는 심부름하는 하나님의 사자만 와서 되는 일이 아니었고, 그가 소개하려는 진짜 메시아의 오심의 때도 맞물려 있었던 일이었다. 그 조정과 결정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어지는 복음서의 증언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이 지구촌의 여명(黎明)의 아침을, 말라기의 예언을 발판삼아, 어떻게 열고 오시는지를 상세하게 전한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1)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된 사자를 그의 역사의 선발대로 보내신 때는, 유대가 네 명의 분봉(分封) 왕들(빌라도-헤롯-빌립-루사니아)에 의하여 통치되던 때였다. 그들은 당시 제국의 대왕인 로마의 황제로부터 임명 받아, 그곳 팔레스틴을 분할해서 통치하고 있었다. 국민종교인 유대교는 안나스와 가야바로 대제사장이 장인-사위 관계로 세습(世襲)되던 형국이었다(1-2절). 

 

상황이 그러하니, 나라와 백성들의 의식과 생활상이 과연 어떠했을까? 정치적으로는 벌써 수백 년을 제국들(바벨론-페르시아-헬라-로마)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로마는 왜 그 적은 땅에 네 명이나 되는 분봉왕들을 세웠을까? 그런 상황 속에서 유대교는 도대체 백성에게 무슨 희망이 될 수 있었을까? 이런 상황들을 고려해보면, 그 시대는 말라기 때보다도 훨씬 더 악화된 상황이었음이 분명하다. 실로 메시아 오심에 대한 깊은 희망 없이는 숨 쉴 수가 없는 시대였다. 드다와 유다의 거짓 메시아 운동들도 그 이유에서였다.(행5:36-37)

 

2) 세례자 요한이 그 어둠의 활로를 활짝 연 인물이었다! 특징이라면, 그 활로의 출구를 제국을 향해 각을 세운 것이 아니라, 무기력해져서 범죄의 일상화에 빠져 사는 백성들의 내면의 변화와 각성을 목표 삼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죄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에 집중했다(3절). 그는 말라기의 예언대로 왔지만, 사역의 내용은 이사야의 예언을 좇는 것이었다(4-5절). 그는 특히, ‘모든 육체(사람)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임을 선포하였다’(6절,사40:5참조). 이 증언은 오실 메시아가 유대인을 넘어 온 세상까지 담고 있어서, 새 차원의 선포이기도 했다. 

 

3) 백성을 향한 요한의 책망은 매우 신랄했다. 몰려 온 무리들을 향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에 걸 맞는 자들이 되기를 촉구하면서, 범죄한 무리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 외치며 그들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했는데, 그 회개는 임박한 심판 앞에서, 메마른 입술만의 것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를 요구한 것이다.(7-9절) 요한의 그런 책망의 파장은 매우 컸다. 일반인, 세리, 군인 등을 포함한 군중들의 마음이 요동친 것이다. 그래서 나온 반응은 이미 말라기 때 예고된 그 반응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였다(10,12,14, 말3:7하 참조). 

 

4) 요한의 답변은 매우 새롭고 신선(新鮮)했다. 회개하려면, ‘그 악하고 부정한 자리에서 떠나라’가 아니라, ‘서 있는 자리에서의 자기희생과 정의를 선택을 하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10-14절 참조). 사실 회개를 그 자리 포기나 회피로서의 응답하는 것도 쉬울 리 없다. 하지만 부정하고 더럽다고 판단되는 자리를, 도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곳에서의 변화와 정의를 추구하면서 그곳을 범죄가 아닌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드러내는 곳이 되게 하려는 입장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세례 요한은 청중들에게 물러나지 않고 맞서면서, 그곳에서 정의를 세우는 삶을 요구한 것이다. 정의 실현의 주체를 하나님에게만 떠넘길 것이 아니라(말2:7참조), 자신들이 직접 감당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런 그의 신학은 당시 도피(逃避)파였던 경건한 에쎄네파와는 결이 달랐다. 고난의 참여(參與) 신학과 십자가 신학을 견인하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오실 분에 대한 사자 역할을 요한이 그런 점에서 착실히 수행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요한은 순교 후에도, 그와 그의 가르침을 좇는 제자공동체들이 국내외에 많았다.(행13:25,요1:15,19-23참조). 

 

5) 사자로서의 그의 정체성도 확고했다. ‘나는 내 뒤에 오셔서 여러분에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을 위해 있을 뿐이다. 그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러 올 것이다’(15-17참조). 

 

서신서 계시록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다가올 하나님의 세계를 전하기 위해 교회의 사자로 부름 받았던 장로 요한의 소아시아교회들을 향한 주님의 증언을 소개한 곳이다. 대상은 라오디게아 교회이지만, 전 교회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 교회 문제 역시 심각한 나태와 영적 침체였다(말라기시대&요한의 시대 상황처럼). 그들에 대한 주님의 신랄한 경고가 다음과 같이 전달되었다. 

 

1) ‘나는 네 행위를 안다. 차든지 뜨겁던지 하지 않으면 너를 뱉어 버리리라’(14-16절). 

2) ‘조금 가진 것(은행, 양모산업, 의료학교)이 너희를 지켜 주리라고 착각하지 마라. 열심을 내라. 내 음성에 마음 문을 열고 영접(순복)하라. 그러면 내 보좌에 앉게 해주겠다’(17-21절)

 

결론은 이렇다

 

대비하자. 영원한 심판자 주님이 곧 오신다. 그의 지체는 우리에게는 대비할 적기이다. 나태와 태만의 옷을 벗고 열심과 헌신의 옷을 입자.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터전에서 변화를 선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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