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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11-22 (목) 13:44 5년전 1768  

본문) 신 26: 1-11, 막 6: 30-44, 롬 12: 1- 8  

 

오늘은 창조절 둘째 해의 열세 번째 주일로서, 절기의 마지막 주일이다. 대림(待臨)절기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주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동안 지난 세 달 동안 지켜 온 절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한 구세주가 아니라 창조주로서, 이 땅에서 새 인류의 모범이요 새 역사와 문화의 창조자로서, 또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인간 삶의 전반에 걸쳐서 새로운 삶(New life)을 창조해가는 무리들로 이끄신 메시아이셨음을 계속 확인하며 배워 왔다. 

 

그런 점에서 이 설교를 계속 들어 온 우리는 이제 이 말씀으로 인하여 나에게 어떤 변화와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는지를 주의 깊게 성찰(省察)해야 할 때도 되었다고 본다. 이는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론)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행함)에 있기 때문이다(고전4:20). 기실 반응과 응답이 없는 영혼은 살았다고 볼 수가 없지 아니한가! 다시 묻는다. 여러분에게 창조주의 영은 어떤 새로운 변화를 안겨 주셨는가? 그런 점에서 이 절기 마지막 주일의 말씀 역시 중요하다. 여러분은 오늘 주신 세 본문이 어떤 내용의 말씀으로 보이는가? 

 

이번 주간에는(11.19) 주변에 뜻있는 신학(神學)모임이 있어서 참석했다. 칼 바르트 센터가 개원하면서 개최한 기념강연의 장소였다. 그 첫 주제는 칼빈과 바르트의 성만찬에 관한 입장을 살피는 자리였는데, 강연 후의 목회자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그것은 성만찬의 역사적 논쟁에 관한 입장 파악이 아니라, 오늘날에 비(非)종교화된 세상과 인간들에게 이 예수의 성만찬이 도전과 충격(impact)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포인트가 무엇인지에 관한 궁금증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신학자와 목회자의 관심의 포인트가 차이가 있음을 보았다. 

 

물론 신학자들의 능숙한 답변은 있었다. 믿음과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성만찬에서 답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말씀 자체에서 답을 찾는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 대답은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는 현장 설교자들의 몫이 아닌가 싶었다. 특히 최근에는 성만찬에 관련된 세 본문의 메시지를 증언하면서(창조절(5)), 나는 성만찬이 이 세상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주기 위한 접근은 역시 인간의 현실적 필요성에 입각한 성서적 접근을 통해야만 힘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성만찬을 이렇게 본다. 창조주이신 예수께서 세상의 더럽고 탐욕스럽게 오염된 것들을 먹고 살아서 병들어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 세상 죄인들에게 당신의 흠 없고 깨끗한 몸을 내어주시면서, ‘나를 먹으라’면서 특별한 치료식(治療食)으로 자신을 주신 은총의 행동으로 본다. 그 바람에 그 음식을 먹는 자는 새로운 몸의 변화를 경험한다. 즉 그를 닮은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어간다. 따라서 그의 몸을 먹는 성만찬은 치유식이면서 또한 생명식(生命食)으로서, 그가 바로 ‘우리를 먹이시고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고, ‘그를 닮은 인간을 생산하는 신비로운 식탁’임을 체험하게 된다. 

 

성만찬도 성서적(聖書的) 접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강조점과 적용점도 다양해진다. 특히 구약에는 성만찬의 문을 여는 두 개의 통로(通路)가 있다. 하나는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유월절 희생양의 개념에서 성만찬의 기원을 찾는 일이다. 그 희생양의 피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했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아사셀 염소의 제물 됨을 거쳐, 예수님의 유월절 맞이 피의 성찬으로 이어가는 접근이다. 여기를 통하면, 성찬의 의미는 아무래도 회개와 속죄의 주(主)와 그의 은혜를 강조하게 된다. 물론 예배와 경건에 큰 묵상의 자료가 된다. 

 

하지만, 출16장에 나오는 광야에서 먹이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성만찬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이런 주제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하여 그의 자녀들을 먹이시는 하나님이심을 거쳐(왕상17장, 왕하 4장 참조),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역사를 통하여 먹이시는 하나님을 더욱 구체화시킨다. 그런 주님이 ‘내 몸과 피를 먹고 마시라’ 하시며 내어주신 성만찬은 그것을 받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간식(間食)일 수도 없다. 먹이시는 하나님 자신을 음식으로 취하는 자들에게도 분명한 미션(mission)이 주어지는 매우 특별한 음식이 된다. 그 미션이 무엇인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막6:37)는 오늘의 말씀 안에 그 대답이 있다고 본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하나님이 이 마지막 시대에 세우고 싶어 하신 사람이 누구인지를 새삼 일깨워 주신다. 한마디로, 그는 위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자기에게만 쌓아두거나 누리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감사(感謝)하며- 베풀고 나누고 주며 살아감으로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외면하지 않고 응답(應答)하는 인간이다! 오늘의 세 본문을 그런 시각으로 보면 좋겠다. 

 

구약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던 행동 지침인데,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값비싼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며 지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 말씀이다. 두 가지 차원의 대응을 담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 수확의 첫 열매로 감사하는 일이며(1-11절), 둘째는 받은 복들을 가지고 이웃과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일이다(12절). 내용은 이렇다 :

 

1) 대상은 머잖아 가나안 땅의 주역이 되어 살아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이다(1절).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여 농사하며 수확의 기쁨을 누릴 터인데, 그 때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축복으로 그 땅에 정착하고 수확까지 하게 될 터인데, 뭔가 그 때 그에 타당한 응답과 반응이 없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게 되고 주신 분의 뜻과 의지를 저버리는 망극(罔極)한 백성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복된 미래가 사라지게 된다.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 불행을 막기 위해 내려진 지침들이다. 

 

2) 그때는 토지소산의 맏물(First-fruits)을 첫 열매로 성별(聖別)하여 성소로 가져와 여호와께 감사예물로 드려야 한다. 첫 열매 신앙의 등장이다. 이는 이스라엘 주변의 종교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수확은 신적 자연 세력들의 작용으로 곡식을 수확하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그러한 류의 감사가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베푸셨던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며 다음과 같이 삼 단계로 구체적으로 고백(告白)한 후에, 여호와 앞에 그 첫 열매를 두고 경배 드린다(2-10절). 그 요지(要旨)는 이렇다. 

 

①-“자신들은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 땅에 정착했음을 고백한다” (3절). 

②-“아람 후손들로서의 민족의 아픔의 역사가 자신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으로 극복되면서, 이곳에 이르게 되었었는지를 기억(記憶)하며 고백한다”(5-9절,상)

③-“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서 소산을 주셨음에 감사하며, 그 증표로 첫 열매를 드린다”(9.하-10절). 

 

3) 또 있다. 받았던 모든 복으로 이웃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이다. 대상들은 레위인과 자신들의 집에 거류하는 손님들이다(11절). 레위인은 여호와를 섬기는 성직을 맡은 그룹이어서, 12지파 중에서 땅을 할당 받지 못하고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받은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인데, 백성들은 바로 이들과 추수에서 받은 복을 나누는 일이 요청된다. 오늘의 목회자들의 생활 대책이 평신도들의 협력에 의한 것임을 담은 암시(暗示)와 지시(指示)라고 본다. 나그네와 손님(난민)들도 배려해야할 대상들이다. 이런 감사와 나눔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복음서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겉보기에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오병이어의 기사이지만, 세 본문 차원에서 보면, 성부의 마음이 성자이신 예수님에 의하여 재현되면서, 사도들(제자들)을 향한 배려와 그의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목자로서의 먹이시는 사역이 그의 제자들에게까지도 실행되도록 훈련시키시는 곳이다. 

 

1) 제자를 사도(使徒=보냄을 받은 자)로 표현되고 있음은 이미 교회 공동체의 상황을 담고 있음을 말한다(30절). 그들을 파송하셨던 주님은 그들의 활동 보고를 들으시고, 뜻밖의 지시를 내리신다. ‘조용한 곳에 가서 잠깐의 휴식(休息)을 취하라’(31절). 그들은 사실 음식 먹을 겨를이 없이 바쁘게 일했다. 주님은 적절한 휴식의 힘을 모르는 사역자들의 위험성을 깊이 알고 계셨다. 이런 배려는 레위인을 챙기셨던 성부의 마음에 연동(連動)된 일이었다. 다만 예수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경제적 배려에다 육체적(영적) 배려까지도 챙겨주시는 분이심을 보이셨다. 

 

2) 휴식을 취한 제자들은 더 큰 과제를 떠안게 된다. 주님으로부터 몰려 든 ‘큰 무리들’을 위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37절). 처음엔 200 데나리온이나 엄청난 떡값이 필요해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방식으로 그들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주님은 전혀 달랐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결국 소수문하여 찾아 낸 오병이어를 주님의 손에서 해결하고, 오히려 떡 5조각과 물고기 12바구니 정도를 남기게는 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 이것은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것일까? 

 

3) ‘주고 베푸는 인생으로 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도 양이 많기에 주는 것이 아니라 적지만 함께 나누려는 큰마음의 소유자로 살라는 메시지였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적으니까 못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주님에게 큰 자는 적은 것이라도 나누려는 자이다! 기적은 거기에서 나오며, 사람의 마음도 그 순간에 모아진다. 진정한 큰 것도 거기에 있다. 많이 있기에 준다는 것이야 누군들 못하겠는가? 하지만 극히 적지만 그래도 더 힘든 이들을 긍휼히 여기며 함께 나누려는 것은 아무나 못하는 일이다. 이런 마음은 실로 적은 것을 주면서도 큰 것을 먹은 것으로 만든다! 예수의 성만찬과 십자가 희생이 오병이어가 되어, 인류를 구원한 것 아닌가! 그런 인생을 살면 실제로도 큰 인물이 된다. 신도의 삶이란 그래야한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 속에서 로마교회 가족들을 권면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1절). 헌신의 주체를 말이 아닌 몸(body)으로 설정했다. 자신의 삶을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바치기를 요구한 것이다. 이 세대는 간교하여 말의 성찬은 풍성하지만, 몸의 헌신은 한없이 빈곤하다. 그러기에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의 믿음에 응답해달라는 것이다. 

 

1) 그런 행동을 통한 증언은 먼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분별력(分別力)과 지혜롭게 행사되어야 한다(2-3절). 이 근거는 하나님이 각 사람들에게 모두를 섬길 수 있는 은사(gift)와 기능들을 다양하고 골고루 부어주셨다는 데에 있다(4-8절). 따라서 남이 가진 은사에 너무 관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부여된 그 은사에 집중(集中)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모두에게는 충분히 오병이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러면 한 가지를 가지고도 모두를 유익하게 하고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사도는 대략 7가지 분야로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①예언하는 일, ②섬기는 일, ③가르치는 일, ④위로하는 일, ⑤구제하는 일, ⑥다스리는 일, ⑦긍휼을 베푸는 일 등이다(4-8절). 여기에는 기능적인 차이(差異)가 있으나, 내용상의 우열(優劣)은 없다. 하지만 자기 것을 전체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만들고 싶으면 길은 있다. 자기 은사를 최고의 수준으로 집중해 보라! 

 

결론은 이렇다

 

응답하는 인간이 되자. 이를 위해 먼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오병이어의 은사는 무엇인지 성찰해 보자. 누구든 그 선물은  내 안에 이미 와 있다! 그것을 땅에 묻혀 두지 말라. 먼저 확인하며 감사하자. 남이 가진 나와 다른 은사들을 부러워하지 말자. 나의 것에 먼저 감사하며 집중하자. 분량의 적음에도 절대 고민하지 말라. 내 기준에 맘이 안 든다고 무시하지도 말라. 무엇이든 주님의 손에만 들어가면, 그것은 세상과 환경을 바꾸는 자료가 된다. 

 

목표는 분명해야 한다. 부족한 나에게 그런 소중한 선물들을 안겨주신 분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나누어야 할 이웃과 교회를 유익하게 할 방법이 무엇인지에 집중해보자.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 세상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찾아 세우려고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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