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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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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11-16 (금) 16:53 6년전 1722  

본문)  민20:1-12, 마18:1-9, 약3:1-12   /  추수감사주일(참조) 

 

가을도 매우 깊어졌다. 늦가을의 정취가 새삼스럽다. 나는 지난 두 주간(10.28-11.10) 동안, 지구촌의 남반부인 대서양의 큰 땅 덩어리인 피지-뉴질랜드-호주 등을 돌아보고 왔더니,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심한 기후 변화로 인하여, 이미 가로수들이 한 해 동안 함께 했던 날개들을 잃고 앙상한 뼈대들만 드러낸 상태가 되었음을 보게 되었다. 그곳 지구촌 남반구엔 이제 여름으로 다가가고 있기에 가는 곳마다 꽃과 잎들이 무성한데, 북반구의 우리 땅은 이제 겨울을 재촉하면서 입었던 옷을 벗고 있음이 매우 대조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의 창조절(12) 말씀들도, ‘나의 겨울 준비는 어떤가’란 질문에 집중한다. 소위 ‘고참(古參)됨의 준비는 어떤가’를 묻는 듯하다. 지금의 한국교회들도 은퇴자들을 포함한 고령자들의 몸짓들이 큰 사회(社會)문제화 되고 있다. 확실히 고령자들의 힘은 옛날의 노인네 수준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훨씬 더 ‘젊은 노인들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힘이 어느 때보다 기승(氣勝)하고 있다. 이제는 칠십대나 팔십대가 고령층이 아닌 중년층으로 인정받은 시대여서, 뭔가 새로운 인생 지침이 필요한 때가 되기도 했다. 

 

소위 장수(長壽) 시대가, 문제가 아닌 진정한 축복이 되게 하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육체적인 문제 차원만은 아니다. 영향력에 있어서나, 영적-정신적인 삶의 품질에 있어서, 고령사회를 건강하게 사는 일은 예전보다 훨씬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자칫 폐품(廢品)과 같은 쓰레기 인생이 아닌, 이전 보다 더욱 귀한 골동품(骨董品) 인생으로 사는 일이 더욱 큰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평생을 수고한 고참이 다음 세대에 장애나 부담이 아니라 더욱 신선한 영향력을 주면서 지혜를 제공하며 살 수 있겠는가? 

 

누구나 고참 됨은 피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젊은 세대 역시 고참들의 추한 뒷모습에 질타와 비판만 하는 일이 능사는 아니다. 그런 시각만으로는 우리 역시 그 틀의 노예가 될 것이다. 따라서 신(新)세대는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의 옛 것을 뿌리치는 용기와 결단을 배워야 한다. 그가 아버지 데라의 우상(偶像)에 관련된 직업을 뿌리치고, 여호와의 부름을 좇아 고향과 본토와 아비의 집을 떠났던 그 기상(氣像)을 흡수해야하자는 말이다(창12장 참조). 

 

시간이 많지 않다. 이런 대비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라 평생 훈련해야 될 일이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은 비단 우리 인간 자신들만의 것만은 아니다.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관심사이며 원하시는 바이기도 하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이 바로 그 점을 밝힌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축복되고 건강한 장수 인생으로 살다 갈 것인가? 한걸음 더 나아가자. 어떻게 하면, 후배들에게 건강하고 신선한 역사를 전승해 줄 수 있을까? 

 

구약 민수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성경에서 가장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바로 이곳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었던 모세의 뒷모습이 그토록 쓸쓸할 수 없게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곧 그토록 온 민족과 더불어 지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의 시련을 극복하고 고대해왔던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주(移住)하기 직전에-, 모세와 아론이 한 순간의 실수(失手)로(?) 그 영광의 몫을 상속 받지 못하고 배제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나이는 이미 120세의 고령자였다. 80세에 부르심을 받고, 민족과 함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광야를 행진해 온 지난 40년 세월까지 합치면, 그의 나이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육체는 여전히 강건해 있었다(신34:7참조). 그래서 여전히 민족을 이끄는 리더십을 강하게 행사해 왔다. 그것은 여력이 여전했음을 말한다. 그런데도 그 때의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서 어떤 점을 보셨기에, 그의 행보를 ‘거기까지로’ 중단(中斷)시키셨단 말인가? 

 

모세의 영적 내면(內面)이 허약해 있음을 보신 것이다. 너무도 오랜 세월을 억세고 거친 백성들과 함께 지내오면서, 모세의 마음과 감정이 많이 상(傷)해져 있고, 그로 인하여 그는 백성들에게 따뜻한 마음보다는 분노가 앞서고, 저주와 책망의 마음도 앞서는 경향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상황까지 갔음을 보신 것이다(10절 참조). 뿐만 아니다. 그의 지도자로서의 권위의식은 이미 강고해져 있었다.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행동을 거부 없이 수용하고 허용할 정도의 막강한 자신으로 착각하는 지경에까지 간 것이다(11절 참조). 이런 모습은 본래의 모세의 것은 아니었기에, 더욱 그 점이 하나님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즉 만일, 모세의 그런 어두워진 상황을 숙지하시고도 하나님께서 계속 인정에 끌려서 그런 행동을 묵인 또는 허용하게 되면, 그 앞으로는 무슨 일들이 하나님과 모세, 그리고 백성들에게 발생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대답은 충만히 가능하다. 그 때부터 모세는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계속 실천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도리어 심각하게 훼손하면서 십계명을 앞장 서 무력화시키는 장본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지금까지 훈련해 온 이스라엘 전체를 무너뜨리게 위험 인자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바로 그 시점에서 냉정히 결단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낡은 모세를 배제시키고, 여호수아로 새로운 리더십을 대체하시면서 그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새 출발하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자신과 모세는 물론, 전체 이스라엘의 건강성을 유지, 보전, 계승, 발전시키는 지름길이 된다고 보신 것이었다. 하나님으로서는 모세도 소중하지만, 그러나 그의 백성과 역사를 살리는 일은 더 소중한 일임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조치를 모세에 대한 정죄와 심판의 차원으로 보면, 안 된다. 오히려 모세의 지난 40년 동안의 노고에 대한 위로와 그를 더 큰 위험과 상실로부터의 보호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 그 점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드보산 정상에서의 모세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에서 새삼 확인된다. 비록 직접 그 땅을 못 밟게 되는 섭섭할 수 있었던 모세이지만, 그러나 미리 그 땅을 직접 보게 하시는 친절을 극진히 베푸셨기 때문이다(신34:1 이하 참조). 

 

1) 문제의 진원지는 가데스였는데, 이곳 방문은 13:26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곳에서 백성들은 마실 물의 고갈로 인해, 총회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신랄하게 비방했다. 마치 17:1-7의 재판과 같았다. 

2) 심각한 위협을 느낀 모세는 회막 어귀로 가서 엎드려 여호와께 기도했는데(6절), 주의 즉각적인 응답이 임했다. 지팡이를 잡고 회중을 모으며 그들 앞에서 저 바위에게 명령(命令)하면, 그 바위가 속의 물을 쏟아낼 것이다‘는 요지였다(2-8절 참조). 

 

3) 자신감을 얻게 된 모세 일행은 총회를 바위 앞에 불러 모으고, 그들을 심하게 책망하며 이렇게 행동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10절). 그러면서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다. 그랬더니 많은 물이 솟아나와 모두가 마시게 되었다. 

  

4) 하지만 뜻밖에 하나님의 질책이 모세 형제에게 떨어졌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12절). 

 

이 마지막 대목이 문제였다. 즉 모세의 큰 실수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 결정적인 시기에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을 계속 믿도록 발언한 일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백성들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를 찾아야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세는 그런 불경한 의도로 외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실수는 그 순간에 갑자기 뛰쳐나온 실수가 아니라, 이미 오만(傲慢)해진(?) 모세 마음의 표현이 분명했다. 사실 모세는 본래 매우 온유한 사람이요 겸손한 자였다. 하지만 오랜 풍상을 겪은 고참 생활에서 모세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 낡은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미래 세대까지 책임질 지도자는 더 아니었다. 하나님이 바로 그 점을 심각히 보신 것이었다-!

 

고참(古參)의 윤리와 책임이 막중함을 느낀다. 감정에 얽매여서는 안 되겠다. 허황된 권위의식을 멍에에서도 해방되어야 하겠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내 위치나 역할이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닌지를 성찰하는 노력이 더욱 깊어져야 하겠다. 내 중심사고에서 전체중심 사고가 필요하다. 그 점에서 복음서는 교회와 인생의 선배 된 이들에게 매우 타탕한 교훈들을 제공한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예수님의 제자 교육, 공동체 교육, 교회교육 지침서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헛된 명예욕(누가 더 높으냐)이 최고의 배제 사항이다. 누구든 그런 권위 의식에 매이는 한, 그는 공동체 발전의 주체가 아니라 퇴락의 주역으로 전락(轉落)할 뿐이다. 대신 그 함정에서 자신과 모두를 구원할 대안은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심성과 겸손으로, 주변 가족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이다. 이런 어린이다움(childlike)을 어려서부터 익히고 인격화하여 평생 빼앗기지 않고 계속 유지하는 일이다. 그래서 겸손한 예수의 품성과 인격의 소유자로 나를 세우는 일이다(1-5절). 

 

우리는 종종 교회 공동체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들을 본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인데-, 그 원인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안에 잔존해 있는 ‘또 하나의 모세’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모세의 가시’들이 우리 안에서 쓴 뿌리로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남을 넘어지게 하고 죄짓게 하며 실족(失足)케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너무도 매섭다(6-9절)! 놀랍게도 주님은 저들을 죄짓게 하고, 실족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자신도 지옥불에 떨어지게 하는 흉악한 무기와 도구가 내 몸 안에 있음을 일깨우신다(8-9절). 무엇인가? 바로 내 손과 발이 그 일을 한다. 내 눈도 그 악역을 맡기도 한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 지체들을 잘 단속해야 한다. 내 몸의 지체들이 생명을 죽이는 흉기가 아니라 축복의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매일 매일 기도해야 한다. 지옥 불이 아닌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살아야 한다. 게다가 오늘의 서신서는 이 보다 더 치명적인 ‘모세의 촉’이 우리에게 있음을 전한다. 무엇인가? 바로 말(언어)이고, 내 입 안에 있는 혀이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교회의 최고 지도자 중인 한 분인 야고보 역시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그 중에서 특히 교회 공동체를 위해(危害)하는 우리 몸의 있는 도구로서의 혀(말)를 지목하고 있다. 그 시절에도 교회들 안에는 교우들이 내뱉는 거친 언어들로 인하여 교회와 성도들이 큰 몸살을 앓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 입으로 찬양도 하지만, 저주도 서슴치 아니했기 때문이다(9절). 단물도 내지만 쓴 물도 내면서, 초신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1-12절). 곧 단속 내지 정재(淨財)되지 못한 혀 놀림으로 실족하는 자들이 잇따르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지금도 교회에는 여전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야기하는 대상들이 새(초) 신자가 아니라, 고참 신자들이라는 점이다(1-2절 참조). 그들은 그만큼 공로자요 업적을 이룬 이들이어서, 그들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큰 과제 중의 하나는 고참 신도들과 선배들이 후배들과 새 교우들에게 어떻게 해야 ‘모세의 실수’를 저지르지 아니하고, 그 축복하며 살 수 있을까를 관심해야 한다. 

 

결론은 이렇다

 

내 몸의 가장 작은 지체이면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우리의 혀의 역할에 대한 묵상이 깊어져야 하겠다. 혀는 배의 키처럼, 가장 작은 지체인데도, 우리는 그것을 성실히 다룰 줄 모른다. 그러기에 노력과 지혜가 매우 필요하다. 사실 혀는 스스로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다(8절). 마음을 표현하는 성실한 도구일 뿐이다. 마음에 악한 것이 가득하면, 혀도 별 수 없다. 독을 품어내게 된다. 마음에 선(善)이 가득하면, 혀는 최상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전하게 된다. 

 

그런데 가장 경계해야 할 우리의 마음은 바로 한 마음이 아니라 이중적(二重的)인 마음이다. 그 때는 내 혀가 진실(眞實)보다는 간교(奸巧)함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내 혀 놀림 때문에 많은 고통과 갈등을 겪게 된다. 특히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인생의 고참들이 그렇게 되면,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가정도, 후손들도, 교회도, 사회도, 걷잡을 수 없어진다. 오늘날 가족과 교우들의 거친 혀로 인하여 분열하며 가슴앓이 하는 곳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기에, 혀를 위하여 우리는 내 마음을 먼저 의와 겸손과 사랑으로 채워두는 삶을 지속해야 한다. 내 가슴을 말씀으로 채우고 복음의 언어들로 채우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이 상실되지 않도록 내 의식을 항상 일깨우며 살아가자. 이 일은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이 아니기에, 하루라도 속히 내 마음을 의와 사랑으로 숙성시켜 두자. 혀와 말이 나이 든 모세처럼 실수하게 하지 않도록 힘을 내자. 영생으로 인도할 은혜의 도구가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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