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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관리자 2018-11-08 (목) 08:56 6년전 1768  

본문) 잠 3: 13-23, 눅 6:39-45, 약 3: 13-18 

 

오늘은 어느 덧 11월 둘째 주일로서,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이다. 그 동안 우리는 매 주일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에 필요한 과제들 하나하나를, 어떻게 만들어 제공해 주셨는지를 매우 새롭고 놀랍게 듣고 확인하며 은혜를 받는다. 실로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창조의 솜씨와 능력, 또 우리 인간을 향한 그 분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에 깊이 감사(感謝)를 올린다. 

 

그 중에도 최근에는 모세의 십계명에 담긴 우리 신앙의 핵심 뼈대들을 확인하면서, 그 선행 부분인 하나님 사랑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번 주일에는 어떤 말씀일까? 그렇다. 당연히 후속 부분인 인간 사랑에 관한 말씀들이다. 인간 사랑이 왜 필요한 지, 어떻게 해야 가능하며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눌 수 있을지에 대하여 말씀을 듣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 사랑을 떼어놓고 말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의 자각이나 각성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나 부모와 같은 외부로부터 사랑을 먼저 받고난 후에, 그 응답과 감사로서 나온 행위가 바로 나의 사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학습(學習)받은 대로 성장하는 존재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본래 가장 극복하기 어렵고 변화되기 어려운 대상이 누군 줄 아시는가? 바로 한없이 이기적이요 탐욕적이며 정욕적인 본능을 가진 자기(自己) 자신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하늘의 놀라운 동력이 나를 깨뜨려 주지 아니하면, 외부의 선한 충격이 나를 일깨우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 사랑과 생명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초이성적인 아가페적 사랑, 곧 십자가의 사랑을 맛을 본 사람이라야 비로소 참 이웃 사랑의 길에 들어선다. 

 

그런데 오늘의 이웃 사랑의 길로 인도하시는 말씀들은 매우 신선(新鮮)하고 이채(異彩)롭다. 그것은 사랑에도 반드시 지혜가 필요함을 일깨워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 만능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혜 만능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 사랑이든, 이웃 사랑이든, 사랑이 사랑으로 참 빛을 발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지혜와 명철(분별력/이해)이라는 양념이 담가져야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혜 없는 사랑은 제 맛을 못 낸다. 마침, 요즈음은 김장 씨즌인데, 다 같이 복창해 보자. ‘사랑에도 지혜와 명철이라는 양념이 쳐져야 제 맛을 낸다-’ 

 

그런데, 지혜에도 두 종류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가짜 지혜가 있고, 진짜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 구별을 어떻게 하는가? 야고보 장로가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인데, 지혜는 하늘이 주는 것과 세상이 주는 것이 있다. 그 중에 이웃 사랑의 결실은 어떤 것을 받아야 될까? 그렇다. 오직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일 때 적용(適用)될 뿐이다! 땅 위의 것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것을 잘 알고 사랑하는 것이 지혜 중의 지혜가 될 것이다.

 

이제 목표는 ‘참 지혜’이다. ‘하늘이 준 지혜’를 받아 무장하는 일이다. 본래 땅의 지혜는 땅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에도 아무런 능력이 없다. 오히려 온갖 부작용과 갈등만 고조시킬 뿐이다(약3:16). 하지만 하늘의 지혜가 임하면, 그곳에는 즐거움과 평화가 있다. 아담 부부가 끝내 취하지 못했던 바로 그 생명(生命)나무도 있다(잠3:17-18). 

 

그러니 보라!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흐트러진 교회의 재건을 위해, 평신도 지도자들 일곱 명을 세울 때, 그 최고의 자격 조건 중에 하나가 무엇이었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였다(행6:3참조). 공동체가 지혜의 충만한 인사를 필요로 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서로 다른 이질적 집단체인 신도들을 하나 되게 하여 한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리더십이 그 지혜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점이 충족되자, 교회는 어떠했나?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개종자들도 대거 들어오는 파격이 발생하였음을 본다.  

 

지혜와 명철은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도 이 세상 경영을 위하여 처음부터 행사하셨던 핵심적 도구였다(잠3:19-20). 그리고 당신의 창조 세계를 관리하기 위하여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우리 인간들에게도 부여하셨던 차원 높은 선물이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직시(直視)하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지혜를 사모하며, 지혜의 사람이 되며, 지혜를 행사하는 능력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고, 또 이웃과 공동체를 넉넉히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자들이 되게 된다. 

 

구약의 내용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지혜와 명철에 대한 예찬(禮讚)으로 가득하다. 이 증언은 마치 산상수훈에서 증언한 예수님의 팔복(八福)에 관한 강론을 듣는 듯하고, 시1편의 복 있는 자에 대한 증언과도 유사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지혜가 세상의 것이 아닌 위로부터 내린 것일 때, 복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솔로몬이 받았던 그 지혜가 그것이었고, 일곱 집사들이 받았던 성령의 은사(恩賜)로서의 지혜가 그것이었다. 다만, 여기에서는 전도서나 욥기 등에서 언급될 수 있는 차원의 지혜는 다루지 않고 있음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에는 우리가 쉽게 범접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섭리 영역과 통치 영역에서만 논할 수 있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은 인간 사랑을 위해 부여된 지혜의 근본 사상을 표현한다고 보아야 한다.

 

본 말씀은 ‘내 아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21절), 이것은 중동 지역의 관습에 따르면, 지혜의 스승이 자기 제자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지혜자의 이 말씀을 마치 ‘스승이 주시는 말씀으로 겸손히 받을 수 있는 다수의 제자 된 마음의 소유자들’을 상대하고 있다고 보면 좋겠다(잠1:8,3:1,11,21 참조). 말씀은 다음과 같은 틀로 구성되어 있다.  

 

1) 지혜와 명철을 얻은 자들이 왜 복(福)이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13-15절).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소유하고 싶어 하는 최고의 것들인 은.금.진주 등의 보화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높고 귀한 가치(價値)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2) 참 지혜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놀라운 영적 선물들을 열거(列擧)하면, 이렇다(16-18절)

-장수(長壽), 부귀(富貴), 기쁨(喜樂)의 삶. 평화(平和), 생명(生命) 나무 등이다. 

 

3) 여호와께서도 천지 만물을 바로 이 지혜로, 명철로, 지식으로 창조(創造)하셨다(19-20절). 

4) 그러기에 지혜자는 당신의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뜨겁게 권고(勸告)한다(21-23절).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21절). 그러면, 그것들은 내 영혼을 지키는 생명(生命) 줄이 될 것이고, 목에 맨 장식(裝飾)이 되며, 앞길도 평안(平安)하게 하고, 삶도 형통(亨通)하게 하여 줄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부자들인데도, 삶은 매우 황패해진 가련한 무리들이 너무도 많다. 왜 그럴까? 바로 그들에게는 땅의 지혜만 있을 뿐, 하늘의 지혜를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인생을 거꾸로 살지 말아야 한다. 세상 것을 먼저 붙잡으면 삶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져서, 더욱 허망(虛妄)해진다. 그러니 우리는 내 마음에 하늘의 지혜부터 구하고 채우자. 그러면 세상의 모든 귀한 것들은 뒤따라온다. 삶이 즐거워지며, 이웃 사랑의 폭도 커진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예수님의 제자 교훈(敎訓)의 일부인데, 주님은 이웃 사랑을 못하게 하거나 오히려 해(害)치는 요인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특히 그 요인(要因)이 외부가 아닌 자기 내부의 요인들에 있음을 지적하시면서, 그것을 먼저 극복하고 해결하도록 요구하신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는 이웃 사랑이 잘 되지 못하는 원인들을 바깥에서 찾는 경우가 압도적이다. 그 바람에 이웃 관계가 해결이 아니라 악화되고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주님의 강력히 권고를 귀담아 듣고 실천해야만 한다. 들보를 가진 자신을 먼저 볼 수 있어야. 비로소 남의 티끌도 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런 측면에서 주님의 몇 가지 중요한 지침(指針)을 전한다. 

 

1) 신도들은 먼저 자신에 대한 망상(妄想)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39-42절). 자기 성찰(省察)을 깊이 할 줄 알아야 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리고 어떤 수준에 있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을 냉정히 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인간들 앞에서의 자신의 위치, 수준, 역할에 대한 성찰도 냉정(冷靜)히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실수나 결례를 면하면서, 동시에 이웃들을 따뜻하게 사랑할 수 있고 또 돌볼 수도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 몇 가지를 우리의 성찰의 과제로 던지셨다. 

 

-‘맹인(盲人)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39절) - ‘너는 정말 맹인이 아니냐’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못하다는 것을 아느냐’(40절)- ‘스승의 가르침을 좇아 살기나 했느냐’

-‘제 눈 속에 들보가 있는 데에도, 어찌 남의 눈 속의 띠 끌에 그리도 관심이 많으냐’(41절)

-‘정말 이웃의 띠 끌을 빼어 주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 자기 문제에 대한 반성부터 시작하라’

 

2) 신도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아주 겸손(謙遜)해야 한다(43-45). 존재의 열매는 말에서 보다는 행실에서 나온다. 교만한 말과 거친 감정과 무례한 태도로서는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 자신이 이미 나쁜 나무요 열매임을 고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참 이웃 사랑을 위하여서는 남을 비판이나 평가하기에 앞서서, 먼저 선을 쌓고 덕을 쌓는 삶을 훈련하라. 특히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약자들을 향한 신도들의 태도는 더욱 낮은 자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사도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신도들의 이웃(형제) 사랑과 섬김의 구체적 방안으로, 땅의 지혜가 아닌 하늘의 지혜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는 신도들 간의 관계 발전과 사랑 증진이 지혜의 유무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보면서, 지혜 그것도 땅의 지혜가 아닌 위(성령)로부터의 지혜를 힘입도록 강하게 요구했다. 그에게서의 지혜는 완숙한 판단을 뜻하는 것이었고, 좋은 품행으로 믿음을 확증하는 데 필요한 전제였다(13절). 그래서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다 싶으면, 하나님께 구해서 꼭 얻어내서 이웃 사랑을 반드시 이루라고 말했다(1;5참조). 

 

1) 무엇보다도 그는 신도들 사이에 일어나는 시기와 다툼과 거짓말, 그리고 그것들로 일어나는 각 가지 혼란(混亂)과 모든 악행(惡行)들을 주목하면서, 그것들은 모두가 땅(세상)의 지혜와 정욕과 귀신이 준 지혜를 받아서 일어난 것들로 규정하면서, 신도들에게 엄히 주의를 내렸다(14-16절). 그런 사악(邪惡)한 지혜를 받지 않고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와 그 안에 모인 성도들을 그토록 해치고 미워하고 갈라놓는 행태들이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신도들이 하늘의 지혜를 실제적으로 받게 되면, 그들에게는 어떤 행위가 따를까? 

이것 역시 사람의 행실(行實)로서 입증되는 모습들인데, 그 대표적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13,17-18절). 

-온유함(겸손=humility), 거짓 없는 순수함(purity, holiness),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긍휼(矜恤)함(sympathy), 그리고 평화(화평)을 도모하려는 양순(良順)한 자세를 드러낸다(마5:9참조). 물론 선(善)한 열매와 의(義)의 열매들을 맺게 하는 지혜이기에, 그에게는 어느 한 편에서만 보는 편견(偏見)이나 수단 방법을 서슴치 않아서 발생하는 거짓(가짜)도 있을 리 없다. 

 

요즈음엔 가짜 뉴스가 판을 치면서, 우리 국민의 판단을 얼마나 왜곡(歪曲)되게 하는가? 거기에 노예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부터 땅의 거짓된 지혜를 분별해내는 총명과 함께 하늘의 지혜로 옷 입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하늘의 지혜를 입은 자의 모습이 그러하다면, 그 누가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누군들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긍정적 관계가 형성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론은 이렇다

 

진정한 이웃 사랑에는 참으로 ‘하늘의 지혜’가 요청된다. 사랑이라고 물론 만능은 아니다. 잘못된 사랑, 편애(偏愛)는 오히려 상대와 주변에게 큰 해악(害惡)을 끼치고, 모두를 파탄 나게 하게도 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가족의 일원이 한 때 남.여 관계에서 잘못된 사랑관계로 인하여, 애꿎게 남은 일가족들이 몰살을 당하기도 하는 참상(慘狀)을 목격하기도 하잖은가. 

 

지혜도 만능은 아니다. 세상 지혜는 자기이익 중심해서 나온 것이기에, 참 사랑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이웃 사랑은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입증해서 보여 주신 하늘 지혜를 담아낸 것이어야 한다. 참 이웃 사랑은 입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행실로 입증 된다. 참 이웃 사랑의 사람이 되자. 그래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나라의 영원한 상속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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