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9: 1-7, 마 25:14-30, 벧전 4: 1-11
창조절 일곱째 주일이다. 이번 주일에는 어떤 창조의 세계가 우리를 맞이할 것인가 궁금하다. 아무래도 살아남아 생존하게 된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하겠다. 그곳에는 말씀이외에는 허공 밖에 없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노아 일행하게 부여하신 말씀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어떤 말씀인가? 첫 절과 마지막 절에 오른 내용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편만)하여라’(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 NIV)
그러면 잠시 노아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후, 하나님께 경배 드린 노아에게 하나님은 위의 말씀으로 축복하셨다. 허허벌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대홍수의 후유증으로 모든 세상이 황폐해 져 있었는데, 노아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받은 것이다.
그러기에 생각해보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이 지시이자 축복은 그 가족에게 어떤 생각을 갖게 하는 말씀이었을까? 꿈만 같은 파라다이스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릴 터이니, 믿고 기다리라는 통보였을까, 아니면 이제부터 그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 황무지를 개척하며 죽도록 땀 흘려 일하고 관리하며 노동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을까? 답은 분명하다. 후자의 경우임을 우리 모두가 알 것이다. 생육과 번성과 충만은 그 후에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축복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연고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어디에서 열리거나 주어지는 것인지에 대한 혼란(混亂)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생육(生育).번성(繁盛).충만(充滿)을 축복의 언어로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얻기 위하여 내가 당연히 쏟아야할 땀과 눈물과 피에 대한 가치와 실재는 축복으로 인정하지 못한다. 고생(苦生)으로 알거나 어떻게 하든 외면하고 싶어나는 부담(負擔)으로 알 뿐이다.
그것이 바로 큰 문제이다. 이런 말과 실재에 대한 괴리(乖離)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의 축복은 언제나 그림 속의 떡과 같을 뿐이다. 제대로 된 축복을 누릴 기회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한다. 언어가 축복이면 그 내용을 채워 갈 실재도 당연히 축복으로 보아야 한다. 즉 숭고한 목표와 고생스러운 과정 모두가 다 분리할 수 없는 삶의 축복으로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축복된 삶을 위한 삶의 도구로 땀과 눈물과 피를 창조해 주셨다고 보아야 한다.
노아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자. 그들은 생육과 번영과 충만한 삶을 이루기 위하여 그 때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하나님의 축복을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노아 가족들은 들녘에 나가 씨를 뿌리고 소출을 위해 땀을 흘렸다. 배우자들을 찾아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후, 아이들을 낳고 힘겨운 양육과 교육도 하면서, 건강한 가계를 세워나갔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가난과 질병과도 맞서야 했고, 거친 환경과 기후와 폭력적인 이웃들로부터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일로 씨름해야만 했다.
그렇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한 삶은 분명히 축복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진정 고뇌와 역경의 산물이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때에는 바로 그런 영역까지 감당해서 취하도록 요구하신 것으로 보아야한다. 이런 정상적 생산과 수고의 절차를 외면한 축복은 진정한 것이 아니다. 냉혹한 수고의 대가로 얻은 것이어야 비로소 참 축복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나라에 범람하는 소위 ‘삼포(三抛)현상’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결혼포기, 아기포기, 양육포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결혼해도 아이 생산을 외면하려하고. 낳아도 하나 정도로 떼우려하는 풍조로 인하여 지금 우리 사회는 급격히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했다. 국가의 미래가 암담해져 간다. 원인을 알고 보면, 경제적 요인이 핵심 배후세력이다. 이런 세상의 풍조 앞에 생육. 번성. 충만이란 하나님의 축복관이 완전 무시당했는데, 이런 현상을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제 우리 교회가 답을 해야 할 때이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세상의 그런 포기논리에 맹종해도 되는 것인지 대답해야 한다.
구약 창세기의 내용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노아가 받았던 축복의 명령에는 질량(質量)의 양면을 다 담았음을 본다.
1) 질적(質的)으로는 사람됨과 인격(人格)과 재능(才能) 면에서 우리가 계속 성숙해가고 영향력 을 키워가야 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들도 여기에 담겨 있다(갈5:22-23).
2) 양적(量的)개념으로 번성(繁盛)과 성장(成長)의 면들도 담고 있다. 가정을 이루어 가계를 이루는 일, 기업을 일으켜 많은 생명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 좋은 제자와 후배들을 키워내어 건강한 세상을 도모하게 하는 일, 섬기는 교회나 국가 공동체를 계속 발전시키는 일들 일체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게 지금의 내 삶과 여정은 과연 창조주의 이 축복에 부합된 것인지를 점검해 보아야만 한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우리가 받게 되는 복음서의 내용은 내 자신을 재(再) 점검하는 데에 매우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우리에게는 달란트 비유로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하지만 본 비유의 의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고자 함에 있음도 관심하며 접근해야 한다(14절). 그러기에 결코 가볍게 받아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내용으로 이 본문을 보아왔는가? 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창조적 명령을 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구현해 가야할 것인지에 대한 예수의 재(再)해석이며 행동(行動) 지침(指針)으로 보인다.
내용은 이랬다. 주인에게 세 명의 종들이 불려나가, 당신의 여행으로 인해 장기 출타(出他)하는 동안, 당신의 재산들을 관리(管理)하도록 위탁(委託) 받았다. 하지만 그 분량들은 그 관리자의 개인적 역량을 고려하여 주인이 각각 다르게 맡겼는데, 첫째는 5달란트를, 둘째는 2달란트를, 셋째는 1달란트를 맡겼다(15절). 그러자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이 세 사람은 각각 나름대로 활동하여 오랜 후에 돌아 온 주인 앞에 서서 그 동안의 활동 보고를 하게 되었다(19절).
거기에서 이 세 종들의 운명(運命)은 두 갈레로 갈린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소유자는 ‘착하고 신실한 종’으로, 다른 한 달란트 소유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각가 주인의 심판을 받으면서, 전자는 더욱 많은 일을 맡게 되면서 주인의 즐거움을 공유하게 되었으나, 후자는 있던 것까지 빼앗기면서 쓸모없는 자로 판정 받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서 슬피 울며 후회의 이를 갈며 살게 되었다. 정말 하늘과 땅처럼, 이 종들의 운명이 갈린 것이다. 이 얼마나 두렵고 엄중한 심판인가! 특히 이 이야기가 우리의 ‘주어진 삶 전체에 대한 심판의 예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우리의 마음가짐을 더욱 숙연하게 한다! 나는 지금 어떤 흐름에 섰나?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갈라지게 한 것인가? 두서너 가지 요인들을 발견하게 된다.
1) 삶을 종말론적(終末論的) 시각으로 보고 사느냐 여부에서 갈라졌다. 자신의 종 됨을 철저하게 잊지 않고, 자신의 소유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도 잊지 않고, 또 얼마 후에는 주인을 만나 관리 상황을 보고해야할 자신임을 잊지 않고,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때가 그리 많지 아니함도 잊지 않고 사느냐 여부가 그들의 운명을 그렇게 갈라놓은 것이다. 그런 의식을 소유하고 산 사람에게는 삶을 열심히 살기도 바쁘기에, 삶을 한 쪽으로 치우쳐 살지 못한다.
노아가 그랬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래, 그는 타락한 세상과는 자신을 구별하면서 외롭고 나그네 같은 삶을 치열하게 살았다. 그 시대의 풍조와 악행을 거부하면서 참고 이겨냈다. 그래서 얻어낸 댓가가 바로 방주의 구원 사건이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복된 축복이었다. 하나님은 노아가 당신의 축복을 받을 만하니까 그렇게 복 받을 기회를 주셨다!
2) 사고(思考)와 의식(意識)의 중심이 자기가 아니라, ‘오직 주인 중심’으로 설정(設定)되었느냐 여부에서 갈라졌다. 자기를 항상 생각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육정(肉情)을 쫓게 되고, 자기 이익과 계산주의적 사고에 빠지기에, 소명(召命)이나 가치(價値)와 같은 높은 차원을 위하여 헌신과 수고의 땀을 흘리기가 불가능하다.
다섯과 두 달란트 소유자들은 오직 주인 중심의 사고에 집중하였기에 그렇게 땀과 눈물을 쏟으며 기업을 배(倍)로 키워낼 수 있었다. 주인의 뜻과 자기들을 향한 바램이 무엇인지에 대한 숙고가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할 수 있었다. 주인의 미래를 성실히 키워낼 자세를 보인 이들에게는 더 큰 몫을 부여 받게 될 수 있었다. (우리 설교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입장 중심의 설교자가 아닌, 주인이신 하나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중심의 설교자들은 모두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주인의 그런 축복의 마음을 무시하고, 자기의 안이하고 쉬운 길만 찾다가 주인에게 받았던 그 모습을 그대로 되돌렸던 그 허망한 종은 결국 퇴출과 버림당함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다. 피와 눈물과 땀은 정직한 것이며, 그 대가는 영접과 높임과 기림과 영광이다. 하지만 이런 귀한 창조의 출구(出口)들을 외면한 삶은 그 대가가 저주와 후회와 버림당함일 뿐이다.
3) 생명에 대한 깊은 존중심과 보호 능력을 가졌느냐 여부도 우리의 운명을 가른다(창.4-6절)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본문은 사도 베드로가 현장 교회에 보낸 목회 서신이다. 여기에서 그는 온 교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苦難)을 받으시므로서 인간의 죄를 그치게 하셨음을 상기시키면서, 교회들 역시 예전에 쫓았던 정욕을 버리고 주님의 그런 뜻과 마음을 같이 공유하여(1-2절), 오직 육체적 수고와 헌신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되는 교회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함을 집중적으로 권면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오직 땀과 눈물과 피를 통하여서만 이룰 수 있는 다음의 세 가지 성도들의 행동 지침들을 제시하였다.
1) 신도들끼리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일이다(8절). 열심을 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신도들끼리 서로의 약함과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을 보여주면, 그 공동체는 위기를 넘어서 번성하게 된다. 노아의 두 아들들인 샘과 야벳이 바로 그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2)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는 일이다(9절). 대접도 내가 먼저 손길을 펼치고 베푸는 데에서 번성하는 복이 온다. 상대를 자기보다 높게 여겨야 가능한 일이다. 아브라함과 롯이 그런 종류의 은사를 적극 활용하면서 큰 복을 받고 구원을 받았음을 보았다.
3) 서로 봉사(奉事)하는 일이다(10절). 우리는 서로 부족하고 가진 것도 미약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라도 서로를 채우고 나누려고 하면 모두가 충만해진다. 교회 공동체의 마력이 거기에 있다. 비록 내 것은 하나뿐이지만, 서로 다른 것들을 주의 이름과 사랑으로 나누고 섬기려는 데에서(11절), 나는, 저 오병이어 역사처럼, 열을 얻고 백도 얻게 되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결론은 이렇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 창조는 예전에 이미 끝난 것이 아니다. 그 창조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고, 또 계속 될 것이다. 그 창조는 성령을 받은 이들을 통하여 중단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창조는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깊이 받은 자들에 의해서 이어진다. 오직 하늘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보답의 ‘빚진 자의 마음’이 그를 계속 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은혜의 날개 아래 거하는 이들은 주님의 창조의 사역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삶을 목표해야 한다. 땀을 흘리고, 눈물을 쏟아야 하며, 피도 마다하지 아니할 소명과 책임의식으로 그 창조주의 축복의 성취를 이루려고 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내 존재의 삶에서 서로 사랑, 서로 용서, 서로 봉사로서 이 창조의 물결이 흐르게 해야 한다. 그게 십자가를 감당하는 삶이고, 그게 천국에 가까이 있는 자의 삶이다. 이제 안이(安易)와 나태와 무책임과 무관심의 자리에서 일어나자. 현재는 곧 다가 올 영원한 안식을 위해 땀과 눈물의 씨앗을 뿌릴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