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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10-03 (수) 21:20 6년전 1811  

본문) 창 8:13-22, 눅 17:11-19, 골 3:12-17

 

가을이 한창이다. 지난여름에 있었던 무더위의 위세를 생각하면, 이 가을은 왠지 호사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선뜻 찾아온 이 계절을 그저 고맙고 겸손하게 받아야 하겠다. 게다가 이웃 일본이 연달아 겪고 있는 태풍과 지진으로 인한 시련들을 엿보고 있노라면, 게다가 인도네시아에 밀어닥친 강진과 쓰나미로 인한 대 참사(慘事)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우리의 가을은 선택 받은 자만이 누리는 특별한 것이라는 느낌까지 든다. 

 

사실이 그렇다. 마침 이번 가을의 출발은 남달랐다. 우리 8천만 민족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과 기쁨을 안겨 준, 남북의 두 정상의 평화를 위한 만남의 자리를 활짝 열어준 백두산과 저 남쪽 한라산의 물까지 기쁘게 받아들인 그곳 천지(天池)의 그 청아하고 넉넉했던 물결은 우리 한반도의 이번 가을을 더욱 특별한 희망의 계절로 만들었던 풍성한 선물들이었다. 그러니 이 가을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어떤 마음을 드러내야 하겠는가? 

 

다시금 감사(感謝)를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 계절의 의미와 가치를 살려내는 데에는 역시 감사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감사는 참 신비로운 감정이다. 우리 인간이 창조주에게 진정으로 감사할 일은 우리 인간에게 감사를 알고 또 감사하며 살면서 감사의 열매를 누리고 살게 하신 일이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주에게서 받은 엄청난 선물이다. 만일 감사란 이런 긍정적 영성마저 없다면, 인간들은 자기에게 밀려온 그 숱한 문제를 성숙하게 풀 수 있는 길이 과연 있을까? 불가능하다! 인간은 결국 보복과 미움의 노예가 되어 절망하다가 피차 망하게 될 것이다. 

 

감사란 영성은 참 신비(神秘)롭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러나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특별한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축복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이 감사를 풍성히 누리며 구가(謳歌)하고 산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이 감사를 자신의 생명과 구원과 모든 축복까지도 해결할 핵심(核心)적 영성으로 활용하며 산다. 그러기에 참 능력자는 범사(凡事)와 매사(每事)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살전5:18참조) 

 

누가 진정 감사를 극대화시켜서 자신의 삶을 복되게 세우는 사람일까? 어떻게 감사를 행사하기에 그게 가능한가? 하나를 소개한다. 그는 감사할 꺼리가 있어서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부터 함으로서 감사의 세계를 열어가고 또 맛보며 사는 사람이다. 즉 진정한 능력자는 감사함으로 시련과 역경의 상황까지도 반전(反轉)시키고 역전(逆轉)시켜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에게 온 시련과 시험에 불평하거나 원망하기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보다 크고 강한 사람으로 성장 내지 성숙하게 해 줄 연단의 기회로 판단하면서, 감사한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감사의 사람들 기억하시면서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 그러기에 그런 감사의 사람들에게는 기적과 변화의 삶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미국 추수감사절의 기원에 관한 밴쟈민 프랭클린의 기록을 소개한다( 옥한흠 목사의 글에서 ).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들의 사정은 최악이었다.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절반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다. 남은 이들도 겹치는 흉년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그래서 남은 이들은 금식(禁食)을 선포하고 ‘우리를 도와주소서’라며 탄원의 기도에 매달렸다. 그럼에도 형편은 악화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또 다시 금식기도를 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 중 한 농부가 갑자기 새로운 제안을 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하며 하나님이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을 달리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우리가 흉년에 형제자매들이 병들어 쓰러져 갔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유럽에서 신앙의 자유를 잃고 얼마나 쫓겨 다녔습니까? 그러나 여기는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식량의 여건 또한 유럽보다는 편안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신앙의 자유 뿐 아니라 정치적 자유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앞에는 광대한 대지가 열려 있잖습니까? 그러니 이것들을 가지고, 금식 대신에 감사 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참석자 모두가 그 농부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금식기도 방식 대신에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와 광활한 새 삶의 터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주간을 갖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그들은 그 감사로 자신들에게 찾아 온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부여하신 새로운 창조와 번영의 새 시대를 맛보며 새롭게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하는 믿음으로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그들의 미 대륙의 영광스러운 믿음의 조상들이 될 수가 있었다. 

 

오늘의 세 본문들 역시 감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집중 조명해주면서, 그 감사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새로운 세계를 안겨 주셨는지를 잘 전해 준다. 참 놀라운 증언들이다!

 

구약 창세기의 내용을 보자 

 

근 1년간의 홍수 대재앙을 통하여 세상 심판의 참혹함을 경험한 노아와 그 가족들이 생존한 이후의 첫 행동은 매우 중요했다. 새 세계를 어떻게 여느냐의 첫 몸짓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순간 노아가 보여 준 모습은 어떠했나? 실로 하나님께서도 매우 주시한 순간이었다-. 

 

그 때 노아가 보여 준 모습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敬拜)와 감사(感謝)였다(20절). 노아의 이런 몸짓은 개인적인 영적 대응 그 이상의 의미를 담았다고 본다. 그것은 이번에 홍수의 심판을 받았던 예전의 사람들과는 매우 차별화된 영적 행위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감사를 되찾고, 또 자기들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새 인류의 삶부터는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나아가겠다는 행동의 고백과 선포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아의 이런 자세는 성서의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모든 새 일을 시작할 때에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하는 일부터 해야 된다는 모범을 제시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사람을 기쁘게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일을 생활화하도록 길잡이가 되어 준 것이다. 

 

감동 받으신 하나님의 반응은 놀라웠다. 두 가지 새로운 차원의 세상 경영을 밝히신 것이다. 

① 다시는 홍수와 같은 물의 심판으로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21절.상) 

② 인간 구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정하셨다. 즉 지금까지는 다수의 죄인에 대한 저주와 분노 때문에 전체를 심판을 하셨는데, 이후부터는 소수의 의인들만 있어도, 모두가 그들의 덕택에 심판을 면하게 되는 의인 중심의 구원론을 설정하신 것이다(22절,하). 인간의 생각은 본래부터 악하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자각이나 갱신에 의한 구원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그 보다는 좋은 본보기나 속죄의 은혜와 감동을 통한 변화와 각성이 보다 가능한 구원의 방법으로 택한 것이다. 

 

하나님의 그런 구도 설정은 노아의 경배와 감사를 받으시면서 착상(着想)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그때부터 인류 역사는 소수의 의인들 때문에, 다수가 멸망을 면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은혜를 받게 되는 구도로 바뀌었다.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계보를 통한 이스라엘의 출현이나, 예수님을 새 인류의 모델로 삼아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 일도 모두가 노아의 경배와 감사로 인하여 얻어낸 산물이었다. 그 중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당한 소돔성의 사례는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사실상 하나님의 세상 구원은 감사하는 자들을 앞장세우시는 방법으로 본격화하셨다고 본다. 

 

복음서는 어떻게 보아야하나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의 불치병을 일시에 깨끗함을 받은 내용이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예수의 지시를 좇으면서, 환자들 전부가 일시에 나병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반응은 똑 같지 않았다. 돌아와 감사한 자가 사마리아인 단 1명뿐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출신들 9명은 다 그냥 가버린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될 그들이 감사를 외면하고 말았다. 쓸쓸해진 예수께서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며 그들을 찾으셨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당신을 찾아 와 엎드려 감사드린 그 한 명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은혜를 은혜로 알고 그것도 제 때에 감사할 줄 아는 그의 모습을 축복하시면서, 그에게 최고이자 삶의 궁극적인 선물인 구원을 선사하신 것이다. 노아의 경배를 받으셨던 하늘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아들인 예수께서도 느낀 것이다.  

 

감사자와 비(非)감사자의 비율이 1;9였는데, 그런 모습은 오늘날의 현상의 축약인 듯싶다. 물질이 풍요로워지고 편리성이 추구되는 시대일수록, 우리의 감사가 고갈되고 있다.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이럴 때일수록 주님은 감사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서신서인 골로새서를 보자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의인의 계보에 참여한 사람답게 사는 자에게 필요한 영적인 다양한 영적 메뉴들을 제시하였다(12절). 무엇이었나? -동정심, 친절, 겸손, 온유, 인내, 용납, 용서, 사랑, 평화, 말씀. 지혜의 권면, 찬양 등이었다(12-17절) 

 

그래도 사도가 세 차례나 반복하여 요구했던 내용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15절).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힘을 얻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라고 권했다(15-17절). 감사하는 영성 속에 성도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나 공동체와의 관계 모두를 형통하고 복되게 할 수 있음을 증언한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감사의 영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복주시고 또 풍요하게 하시려고 창조해주신 영적 에너지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감사에 눈이 떠야하고 마음이 열려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어 살기를 원하면, 더욱 감사하고 감사하기에 힘쓰라. 좋은 일이나 기쁜 일에만 감사하려고 하지 말고, 힘들고 고난 중에도 감사로 승부하라. 

 

감사를 외면하거나 감사가 없는 자에게는 주어질 것도 없다. 미래(未來)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하는 자에게는 밝은 미래가 활짝 열려 있다. 이것이 놀라운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의 선물이다. 노아의 감사와 1명의 사마리아인이 실재로 보여 준 감사의 마력(魔力)이다. 부디 이 좋은 축복된 인생을 불러 올 하나님의 귀한 선물인 감사의 능력을 묵혀두지 말고 마음껏 활용하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실 풍성한 인생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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