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대하 1:7-12, 마 7:1-12, 살전 5:12-28
오늘은 팔월 한가위 추석(秋夕) 명절이다. 이 때는 년 중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반가움과 기쁨을 나누며, 삶의 묵었던 회포(懷抱)도 푼다. 삭막한 세상살이에서 가족만큼 반갑고 소중한 존재들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모처럼 아름다운 가족들이 모였으니,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고 덕담을 나누면서 새 힘을 얻어 앞에 주어질 또 다른 삶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는 복(福)된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혹, 가족 간에라도 모처럼의 소중한 만남을 해치는 언행과 태도를 드러낼 수 있다. 매우 지혜롭지 못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모쪼록 이 한가위에는 서로 조심하고 배려하여 세상에서 얽혔던 모든 문제들과 피곤들이 해소되고 위로를 받게 되는 축복의 기회가 되게 서로 노력하자.
우리 믿음의 조상이었던 야곱을 생각하라. 그가 20년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귀가하는 과정에서 형 에서와의 오랜 얽힌 문제를 풀기 위하여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고 기도하며 화해하기 위하여 수고했었는지를 묵상하자(창32-33장 참조). 그 화해와 평화의 문을 통과해서야 비로소 야곱은 자기의 독자적인 축복의 세계를 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잖은가!
알고 보면, 인간이 얻어내려는 행복(幸福)이나 피하려고 하는 불행(不幸)은 대체로 모두 인간 스스로가 선택해서 얻은 결과물이다. 즉 행복한 사람은 행복할 이유를 안고 살아온 것이고, 불행한 사람 역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다. 사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어느 누가 행복을 원하지 않겠는가, 어느 누가 불행하고 싶겠는가? 그런데도, 현실은 압도적 인간들이 행복이 아닌 불행의 늪에서 허덕이며 살고 있다-!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이런 결과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은 있으나, 행. 불행을 분별하는 능력인 지혜(知慧)가 부족하거나 부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좋은 것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필요한 것을 분별하는 안목이 중요하다. 우선순위를 선별하고 나쁜 것이나 불필요한 것을 거부하는 결단력도 있어야 한다. 결국 지혜는 가장 좋은 것과 필요하고 중요한 것과 우선적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최상의 것을 선택을 하여 인생을 탄탄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지엽적(枝葉的)인 것이나 덜 중요한 것들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인생살이를 헛수고하고 후회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마음으로 진정한 행복을 원하거든, 행복 자체를 구하기 전(前)에 먼저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게 좋다. 행복은 지혜를 견인하지 못하지만, 지혜는 행복을 능히 안겨주기 때문이다. 아시는가? 지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기꺼이 주신다(고전12:8). 초대교회에서 평신도 지도자들을 선별할 때에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선택의 일 순위 대상이었다(행6:3). 지혜 있는 사람이 있으면, 공동체의 모든 얽힌 문제들이 다 평화롭게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모든 영역에서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고, 얽힌 실타래를 풀 능력자로 기여하고 봉사하기를 원하면, 반드시 다음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며 주시리라’(약1:5)
그렇다. 지혜 있는 자가 있는 가정, 직장, 교회, 공동체, 국가는 절대 망하지 않음을 명심하자. 반면에 지혜가 없는 곳들은 좋은 것이나 귀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 연고로, 그곳에 푯대와 방향 상실로 인한 시련과 환란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영적 현실이다.
마침 오늘 세 본문 말씀들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또 무엇으로 좋은 것들을 취하게 되어, 최상의 삶과 행복을 얻어 누리며 살게 될 것인지를 전하여 준다. 물론 이 복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지도자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약, 역대하의 내용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좋은 것을 택하는 바람에, 그의 평생을 상상할 수 없는 은혜와 축복 속에서 살게 된 사례(事例)를 전해 준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 1,000번제 제사를 드리자, 하나님이 그를 찾으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주기를 원하느냐 나에게 구하여라’라고 물으셨다(7절). 솔로몬의 대답은 이러했다.
-‘주는 이제 내게 지혜(知慧)와 지식(知識)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10절)
이 짧은 대화로 인하여 솔로몬은 세계 왕족사(王族史)에서 가장 지혜롭고 부귀영화를 누린 왕이 되었다. 그것은, 그가 자기 개인을 만족케 할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왕으로서 돌보아야할 백성들의 숱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지혜와 지식을 구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공적(公的) 역할에 필요한 것들을 우선해서 구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그의 요구는 하나님을 감동(感動)케 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을 말씀을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직접 실행했던 주인공임을 확인해 준다. 그 연유로 솔로몬의 삶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챙겨주시는 인생이 되었다. 즉 이 솔로몬의 경우는,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 확실한 사례가 되었다.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와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11-12절)
기억하자. 지혜와 지식의 그릇에는 재물과 명예와 장수(長壽) 등을 담아낼 공간은 넉넉하다. 하지만, 재물과 명예란 그릇 속에는 지혜나 지식을 담아낼 공간은 없고, 수단과 술수만 넘친다. ☞ 창조절 설교 자료집 p.183의 예화, <나라와 백성을 살린 만델라의 지혜>를 참고하라.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하나
사람들 중에는 유달리 남의 이야기, 특히 남의 허물과 문제에 민감하여, 그것을 덮지 못하고 공론화하여 자기가 마치 그 일에 심판자인양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아의 아들 함의 은사를 받은 이들이다. 이웃의 나쁜 것만 보는 불행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것도 믿는 이들 가운데 그런 부정적 시각이 유독 발달해 있는 이들이 있다. 자기는 ‘옳은 말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상처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그 자신이 모르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그런가하면, 사람들 중에는 자기의 부족한 것과 채워야할 것들에 대하여 겸손히 하나님께 엎드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며 기도와 간구에 힘쓰는 사람들도 있다. 누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 있겠는가?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엇이 어리석고 나쁜 것이며 무엇이 지혜롭고 좋은 것인지를 그 사례(事例)를 들어 구별하여 보여 준 곳이다.
1) 먼저 나쁜 것을 택한 무리들을 소개하셨다(1-6절).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들고 계신다. 놀랍게도 그들은 종교적 열정을 소유한 자들이고,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이다. 그러기에 유대교의 주류(主流) 세력들이 된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자기들과 같지 아니한 나약하고 미급한 자들에 대한 비판이나 정죄가 강경하다는 데에 있다. 그들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은 없다. 그들 자신부터가 신앙의 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자비를 크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연약한 이웃들에게 대하여서는 오직 무자비할 뿐이다.
주님은 그들의 무서운 영적 착각을 날카롭게 지적하신다. 그들은 매우 날카로운 비판론자들이다. 그래서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까지도 캐내려고 덤빈다. 그러면서 자신들만은 언제나 옳은 듯-, 남을 향하여서는 언제나 가차 없는 수정론자가 된다. 그 바람에 그들 주변엔 이웃이 없다. 주변을 얼음덩이로 만들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들끼리만 의인일 뿐이다.
주님은 그들을 외식(外飾)주의자들로 규정하신다. 머잖아 그들은 자신들이 가한 비판으로 자기들도 받게 될 것이며, 자기들 속에 있는 대들보 때문에 보다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보셨다(5절). 그런 자기 성찰이 없이 남만 정죄하는 우격다짐의 ‘돼지 같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 것도 피하라 하신다(6절 참조). 실질적인 율법의 파괴자들일 뿐이다.
2) 하지만 좋은 것을 택한 무리들도 소개하신다(7-12절). 바로 자신의 부족과 필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늘 아버지를 향하여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은 남을 비난하거나 비판할 여유가 없는 이들이다. 오직 자신의 성장과 성숙을 꾸준히 추구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그들은 언제나 풍요롭고 풍성하다. 전능자이신 하늘 아버지의 손길을 경험하며 항상 ‘좋은 것’을 받는 영적 능력을 보유하여 은혜 가운데 산다.
하늘 아버지께 항상 기도하며 사는 삶은 최고 양질(良質)의 삶이다. 기도야말로 우리가 필요한 좋은 것들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통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들은 언제나 좋은 것뿐이잖은가! 그러기에 기도 없이 사는 사람은 진정 좋은 것을 받게 되는 길을 외면하고 나쁜 것만으로 살겠다는 태도여서, 정말 어리석은 이들이다. 이웃 사랑도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실천하는 일이 좋은 것이다. 큰 사람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12절 참조).
서선서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통한 새로운 인류 창조사역에 나선 사도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통하여 낡은 세상과 차별화된 가치와 사고와 문화의 실천자로 살아야할 것인지를 깊이 숙고하면서 신도양육지침서로 보낸 서신이 본 본문이다. 그러기에, 전체 내용은 모두가 세상과의 엄중한 차별이요 성별된 거룩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들에게서는 가장 최고, 최상, 최선의 것들이 나와서 세상을 선도하고 이끄는 사명도 부여되었음을 전제하며 말씀했다. 그 중, 그의 말씀의 핵심은 이것으로 보인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21-22절). 이 길 잃은 시대에 길잡이로 살기 위해서는, 고도의 가치관과 선악에 대한 높은 분별력을 추구하지 아니하면 안 됨을 강조했다. 그 중에 몇 가지 정리해 둘 것들이 있다. 대부분 관계 유지 차원에서 주신 말씀들이다.
1)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회자(牧會者, 설교자)와 가장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12-13절). 그것은 목회자 자체를 편애(偏愛)해서가 아니라, 성도 자신의 영적 유익을 도모하기 위함 때문이다. 그렇잖은가? 누구든 목회자와 불편한 관계에 빠진 체, 영적 진보를 하는 이들을 찾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 뿐만 아니다. 동료(同僚) 신도들과의 관계 역시 매우 현명해야 한다(14-15절). 목회자와의 관계가 수직적(垂直的)이라면, 동료들과의 관계는 수평적(水平的)이다. 신앙생활에도 독야청청은 안 된다. 서로와 모두에게 ‘항상 좋고 선한 일’을 하려고 늘 헌신해야 한다(15절,하). 악한 일 개입은 자제하고,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무질서한 사람을 훈계하며, 마음이 약한 사람은 격려하며, 힘없는 사람은 도와주며, 모든 사람들에게는 오래 참아야 한다. 특히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으로 살면, 반드시 좋은 것이 따라오게 된다.
3) 자기(自己)의 영적 관리에도 치열하고 엄격해야 한다(16-22절). 용서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성령과 예언의 말씀을 귀히 알고 좇아 살며, 매사에 좋은 것을 취하는 단호함을 견지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영, 혼, 몸이 오시는 주님을 온전한 모습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흠 없이 보전되게 해야 한다(23-24절). 이런 사람들이라면, 이 땅에서부터 존귀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결론은 이렇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의 모습에는 항상 새롭고 신선함이 발산되어야 하리라! 그것은 성령의 도움 안에서, 옳고 그른 것과 우선적인 것과 뒤에 따르는 것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들에 대한 분별력이 분명하고 탁월한 데에서 나올 것이다.
기도하자. 가장 좋은 것은 하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지혜와 지식 구함을 익히자. 이웃들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격려하고 고취하는 심성과 시각으로 무장하자. 특히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목회자와의 좋은 관계 유지를 위해 힘쓰고, 이웃 신도들과의 관계 증진과 자기에 대한 엄격한 영적 관리에도 승리하도록 하자. 창조적 인간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