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17:5-8, 마6:25-34, 엡6:10-20
세상살이가 갈수록 사막화(砂漠化)되었다. 인간 세상이 모든 면에서 인정이 메말라가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다. 조금만 불편하고 불이익을 당한다 싶으면, 성질을 못 참아 화를 내고 욕을 하며 심하면 상대를 죽이려고 든다. 갈수록 자기통제 불능자와 감정조절 장애자들이 급증하면서, 파괴자들도 늘고 자살자들도 늘고 있어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꼭 인간관계 차원에서만의 일이 아니란 데에 있다.
지구촌의 환경의 위험도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溫暖化)의 부정적 영향이 이미 상상을 넘어서 있다. 추위와 더위의 임계점(臨界點)은 해마다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지난겨울의 무서운 추위와 올 여름의 숨 막히는 더위의 고통을 우리는 이미 체험하였다. 올 겨울도 더 맹추위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그 바람에 식탁에 오를 먹거리 식량들 생산에도 심각한 위기가 동반되고 있다. 크고 작은 지진들이 처처에서 잇따르고 있고, 초대형 태풍과 자연 재해들도 잇따르면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그치질 않는다. 이웃 강대국 일본의 잇단 자연 재앙 사태로 인한 피해가 상상을 넘어선다. 산다는 것이 마치 호랑이 등에 매달린 느낌이다.
그래서인가 네델란드 대학교 학자들은 현재의 지구촌의 생태 환경을 분석하면서, 이렇게 예고했다. ‘이대로 가면, 2035년에는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들어설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상의 세계 종말을 예고한 것이다. 가볍게 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제 하나님의 창조 세계 보전을 위해 청지기로 부름을 받은 우리로서는, 그런 소리를 듣고만 묵묵부답(黙黙不答)만 할 수는 없다. 이 위기에 대하여 어떤 복음적 응답(應答)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어디에서부터 이런 어긋남을 되돌리려는 시작을 해야 하나? 결국 인간(人間)이다! 인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지만, 현재의 생태계의 위기는 이 창조 세계의 관리를 위임 받은 인간의 잘못된 삶의 태도와 탐욕의 산물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근원부터 찾아내서 인간의 삶의 방향을 되돌려 놓는 작업이 가장 지름길이다.
그 시작은 어디에서부터 일까? 인간의 자기 한계를 아는 정체성을 일깨우는 일로 시작하는 것이다. 지배자로서의 삶과 탐욕자로서의 삶을 회개하고 창조 질서를 보전하도록 위임 받은 청지기 의식을 되찾아, 이웃과의 공존과 섬김의 삶에로 변화를 돕는 일이 중요하다. 그와 동시에, 제대로 된 청지기의 의식과 윤리도 함께 무장하도록 돕는 일도 병행해서 감당할 일이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그런 위기 선상에 선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방향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창조주 하나님을 보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가 누구신가, 세상의 창조주요 지배자이며 주관자가 아니신가, 그러기에 주인은 그 분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관리자요 그의 청지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 필요한 것은 진짜 주인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구약 예언서의 말씀을 새겨듣자
분량은 짧지만, 그 내용은 인간 유형(類型)을 둘로 간결하게 나누어 소개한다. 즉 저주(咀呪)를 받을 사람의 모습과 복(福)을 받을 사람이다. 저주와 복, 이 둘의 차이가 상상이 되는가? 땅과 하늘만큼의 차이를 내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인간을 그토록 차이(差異)나게 만드는가? 인간 자체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다. 인간이 보고 추구하며, 붙들고 사는 것이 아주 달라서 존재의 운명을 가를 그런 차이와 결과들이 나올 뿐이다.
살펴보면, 저주 받는 사람은 저주 받을 이유를 안고 살고, 복을 받는 사람은 복을 받을 이유를 안고 산다. 그런 점에서 신명기서의 다음의 주님의 말씀은 항상 경청하여야 할 내용이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시니”(신30:19-20)
1) 하나님이 아닌 인간(人間)을 자기 힘과 방패로 의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따른다(5절). 이 증언을 입증했던 당사자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대신에, 주변의 강대국들을 의지하고 그들의 종교들을 더욱 추종하고 따랐다. 그들을 호시탐탐 노리던 제국 바벨론과 그 우상 종교를 의존하며 살았다. 그 결과는 어땠나? 그들의 보호와 사랑을 받았나? 아니다. 결국 한순간에 그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포로가 되어, 70년간의 비참하고 외로우며 저주스러운 광야의 가시덤불 같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5-6절).
2) 인간이 아닌 하나님을 주(主)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이 따른다(7절). 이 증언을 입증했던 당사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사드락-메삭-아벳느고)들이었다. 그들은 전체 이스라엘 포로들과 같은 곤고한 처지에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목숨을 걸고 지켜냄으로서, 자신들의 안전과 영광은 물론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이방 세상과 제국의 권력자들에게 전하며, 후에는 동포의 무사 귀환을 견인하게 했던 주인공들이었다.
3) 이런 진리의 증언은 예수께서 마7:24-27에서 말씀하신, 집을 반석위에 세운 지혜로운 사람과 모래위에 세운 어리석은 사람의 구별법과도 상통한다.
복음서의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창조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예수의 사람들은 세상을 사는 마음가짐부터가 일반인들과 달라야 함을 강조하셨다. 그것도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인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마음가짐에서 세상 사람들과는 뚜렷이 달라야함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눈만 뜨면, 의식주 문제로 염려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며 염려하고 또 염려하며 산다. 그런 염려가 삶을 구원해내는 것이 못되는 데에도, 사람들은 그런 습관적 염려를 버리지 못한다. 바로 그런 비생산적 흐름을 차단하고 긍정의 새 문을 열어 줄 주역이 바로 예수의 사람들이라 하셨다. 주님의 이런 요구는 생각 없이 살아온 인간들을 향한 엄청난 도전이며 의식 변화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이다. 주님의 이런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계속 염려의 줄을 놓치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과 능력을 못 믿겠다는 불신감을 드러낸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러면 우리가 최우선으로 관심하며 지내왔던 의식주 문제에 대한 염려와 관심을 대체(代替)할 것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인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관심하지 아니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관심하며 살라는 것인가? 주님이 바로 그 점을 모르실 리가 없고, 맹목적인 요구나 맹신적 복종을 요구하신 것일 리도 없다. 그런 점을 감안하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당부의 말씀이 바로 이렇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32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절).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보다 일상을 뛰어 넘는 창조적 사고를 하기를 원하신다. 인간 자체의 생각보다는 하늘 아버지의 생각과 원하시는 뜻을 헤아리고 그것이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헌신하기를 원하신다. 그럴 때,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몫들은 당신이 친히 보너스처럼 챙겨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까지 인류가 실험해보지 못한, 하나님을 상대한 빅딜(Big Deal)의 삶을 제시하신 것이다. 이제까지는 어떤 삶이었는가? ‘각자 자기 일은 자기가 해결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시하신 실험적 방법은 하나님의 일은 자녀 된 인간들이 우선적으로 협력하고, 자녀들의 삶의 모든 필요들은 하늘 아버지께서 챙겨주신다는 상호교류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은 전적으로 상호 신뢰와 믿음, 상대를 자기보다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하다. 예수님의 이런 새로운 방향 제시는, 그렇게 방향을 잡아야 이 세상에 부작용이 없는 하나님 나라가 정착하게 될 수 있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나의 삶의 내용은 어떤가? 습관적 걱정에 빠져 지내는 것은 아닌가? 내일 일을 앞당겨 걱정하는 수준까지 간 것은 아닌가?(34절 참조).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를 섬기는 자가 분명하다면, 어서 걱정하는 삶을 회개하고 청산해야 한다.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나 삶에 대한 탐구에 나서야 한다. 새 인생이 열릴 것이다.
서신서인 에베소서를 어떻게 보아야하나
강(强)해져야 한다(10절). 높은 꿈과 비전을 가지고, 새 역사를 위해 행진하려는 우리에게는 반드시 마귀의 저항과 훼방이 강하게 밀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의 새로운 영적 행진을 주저앉히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귀의 표적은 세상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그를 대적의 능력과 지혜로 무장해야만 한다.
바울 사도는 악마와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들을 몇 가지를 제시하였다.
①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여 입고 무장하는 일이다(11,13절). 이것은 보호 장비들이다.
-진리, 의, 평안(平安), 믿음, 확고한 구원의식, 하나님의 말씀(성령의 검으로서)이 그것들이다.
② 무엇보다도 쉬지 않고 작동(作動)시켜야할 영적 무기는 바로 기도와 간구이다(18절).
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 수단으로서, 나의 모든 부족과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응답을 견인하게 하는 지고한 영적 무기이다. 따라서 기도가 계속 작동하는 있는 한, 모든 성령의 갑주들은 제 힘을 발할 것이지만, 기도를 통한 에너지가 주입되지 아니하면 모든 장비들은 전시용에 불과할 것이다.
주님이 귀신 좇아내지 못해 자기 무기력에 허덕이던 제자들로부터, ‘주님 우리는 왜 하지 못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하셨음을 기억하자. ‘오직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種類)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8-29절 참조).
결론은 이렇다
세상은 종말의 징후들로 가득하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일들이 그만큼 넘친다는 말도 된다. 염려할 일들이 범람한다. 그러기에, 창조주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더욱 일깨우신다. 결코 어둠의 세력들에게 포기당할 수 없는 당신의 창조된 세상이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희망으로 세우심을 받은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패배의 DNA가 아니라 승리의 DNA가 있음을 확인하며 발휘해야할 때이다. 염려하고 비관하지 말고, 성령의 전신갑주로 이 어둠의 세력과 대적하며 세상의 갱신과 변화를 견인하기 위하여, 우리의 비장의 무기인 기도와 간구를 강화시켜가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 세우기를 우리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살아가자. 우리의 필요한 것들이 하늘 아버지로부터 친히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자.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한 창조 공동체의 멤버가 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