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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후(1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8-15 (수) 11:06 6년전 1590  

본문)  행 21: 39-22: 16, 사 42:14-16, 막 10: 46-52 

 

지난주일 우리는 영육(靈肉)간의 시청각(視聽覺)의 장애에 빠져 불구(불행)의 인생으로 지내던 당신의 백성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가, 그들로 하여금 다시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며, 정상적으로 말하며 살도록 회복(回復)의 은혜(즉 에바다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소개 받았다. 

 

믿는 자들이 시청각 장애에 빠져 드는 것의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이었나?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말로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즉 언젠가부터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마음을 닫게 되면서부터, 하나님께 열렸던 모든 기능들이 무섭게 닫히게 된 것이다. 눈이 멀고, 귀도 안 들리고, 입도 닫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하늘로부터 임하는 거룩하고 신선한 생명의 기운이 차단되고, 그 빈 마음은 세상의 유혹들과 우상들과 이념이나 사상과 헛된 환상들로 대체되었고, 또 육체적인 자랑거리로 만족하며 사는 함정이 된 것이다. 그 바람에 세상과 육체의 욕망에는 시청각이 활발하게 열려 있으나, 하나님을 향해서는 기도와 찬송과 감사와 전도와 섬김의 문이 닫힌 자들이 된 것이다. 사망에는 살고, 생명에는 죽은 존재가 된 것이다.

 

이 질병의 치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죄인인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입으로 시인하면 된다. 그래서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으며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해야 한다(롬10:9-10,13참조). 

 

그러면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또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가? 여전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회복케 하시는 능력을 전하는 말씀들로서, 특히 맹인(盲人)들의 눈을 다시 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린다. 그런데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理由)가 있다. 그것은 당신과 당신의 뜻을 받아, 그 뜻을 온 세상에 전하는 증인(證人)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체포당한 사도 바울이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 자기를 죽이려한 히브리 동포들 앞에서 자신의 대 변신(變身), 즉 엄격한 율법주의자로서 예수를 좇는 무리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자였던 자기가, 왜 지금은 바로 그 나사렛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되었는지의 연유(緣由)를 변명한 연설이다.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의 영문이었고, 언어는 히브리어여서 그곳 유대인들이 누구나 들을 수 있었다(행22:1-2). 그 요점은 이러했다. 

 

1) 때는, 다메섹(시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그 날도 대제사장으로부터 영장(令狀)을 발부받아 다메섹 근처에까지 가던 중이었다(27:12참조). 

 

2) 오정(午正)쯤 이었는데, 홀연히 하늘로부터 ‘햇빛보다 더 밝고 강렬한’(27:13) 큰 빛이 나타나 그를 둘러 비쳤다(6절). 그 바람에 그는 땅에 엎드려졌고, 낯선 음성을 듣게 되면서, 다음과 같은 짧은 대화가 있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迫害)하느냐’(7절)

-‘주님 누구시니이까’(8절,a)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8절,b)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10절,a)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10절,b)

 

3) 그 빛은 바울을 눈이 멀게 하였으나 소리(말씀)는 듣게 하였고, 동행자들에게는 빛을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게 하였다(9-11절 참조). 

 

4)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 간 바울은 거기서 경건한 사람 아나니아를 만난다. 그리고 아나니아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證人)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13-16절) 

 

5) 결국 바울의 회심(悔心)과 복음 전파(傳播)의 사역은 ‘다시 보게 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13절). 여태껏 보아왔던 정죄와 심판을 일삼던 율법에는 눈이 멀게 되고, 여태껏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용서와 긍휼의 세계에는 눈이 활짝 뜨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바울은 나중에 이 때에 하늘의 빛과 말씀으로 경험했던 카이로스의 순간, 즉 박해자요 살인자였던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기를 이렇게 되돌려 당신의 사역자로 불러 쓰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魁首)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3-16)

 

6) 바울은 아나니아가 전한대로, 그 때 그곳에서 나사렛 예수를 만나고 그의 뜻과 세계를 듣고 알게 되면서, 그가 바로 유대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고대하며 기다리던 모두의 메시아(구세주)이심을 믿으면서 전하게 된 것이다. 그 때의 바울의 마음은 오직 예수의 영과 인격과 생명이 충만해 있었다. 그는 그런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고 박해하고 있는 동족들에 대한 분노나 미움은 없었다. 그보다는 자신의 이런 체험적 증언을 듣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마음을 돌이켜 예수께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원했을 뿐이다. 이게 먼저 눈 뜬 자가 갖게 된, 또 다른 차원의 아픔이며 소명이 아니겠는가! 

 

구약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오랫동안(70여 년간) 자기 백성의 수난과 고난의 세월을 지켜보시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다만 참고 잠잠해야만 하셨던 성부 하나님의 쓰라린 가슴이 서술되고 있는 곳이다(14절). 하지만 이제 그들의 포로 생활의 복역(服役)기간이 끝나가고 해방(解放)이 코앞에 닥쳐오자, 하나님의 가슴은 급하게 설레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당신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참된 하나님이심을 드러낼 때가 임박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두 가지 차원에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새 시대의 도래를 감지하지 못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긴급 메시지를 보내신다. 

 

1) 아직도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다 신뢰를 두고 사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산들과 언덕들을 황폐하게 하며 그 모든 초목들을 마르게 하며 강들이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다’라고 심판의 강한 경고를 하셨다(15절).

 

2) 그러나 분별력이 없는 일반적인 맹인(盲人)된 백성들을 향해서는 심판 대신에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실 약속을 해주셨다. 그 내용은 매우 가슴 설레는 것이었다.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16절). 

 

복음서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앞에서 말한 구약 이사야의 예언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상세히 전한 내용이다. 그 확인 대상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였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관찰해야할 일은 ‘바디매오의 맹인 됨이 과연 언제였느냐’는 점이다. 나면서부터였는가, 아니면 후천적(後天的)인 경우인가 하는 점이다. 세 가지 차원 때문에서 이 질문을 하는 것이다. 

 

1) 성경에는 일반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설명에서 ‘나면서부터’라는 표현으로 당사자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구별하는 경향이 있음에 비하여(요9:1-2, 행3:2참조), 여기에서는 그런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2) 이 맹인의 ‘보기를 원(願)한다’는 열망의 강도(强度)가 유별나기 때문이다. 예수를 향한 외침과 주변의 압박에도 그 부르짖는 강도가 더했고, 나중에는 예수를 대면할 때에도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일관되게 요구한 내용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도 그렇다. 선천적인 맹인과 후천적인 맹인 중에서, 누가 더 보기를 간절히 원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그 대답은 확실해 진다. 답은 당연히 후천적인 경우이다. 선천적인 경우에는 다시 보려는 의지가 그렇게 크지 않다. 처음부터 바깥세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천적 맹인의 입장은 다르다. 이미 이 세상과 인간들을 오랫동안 보고 살아온 사람이기에, 그의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하기 마련이다. 

 

이 바디매오의 맹인 된 원인은 모르지만, 맹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비참하게 한 것인지는 뼈저리게 절감하며 살아온 그였다. 게다가 예수가 자기 같은 불쌍한 인간들을 기꺼이 치유해 주는 능력자요 메시아란 소문을 이미 들은 터였고(47절), 게다가 바로 그 예수의 자기 동네인 여리고에 왔다가 떠나가는 지금은 그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 순간에 그는 목숨을 건 행동을 그토록 과감히 행했던 것이다. 

 

3) 예수께서는 그의 그런 행동을 믿음으로 규정하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며, 구원(救援)이 그에게 임했음을 선포하셨다. 그의 구원은 육체적 불구의 멍에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장애인으로서 사회적. 종교적으로 매도된 죄인이란 멍에로부터의 자유와, 주 예수와의 새로운 교제로 인하여 얻게 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새 출발 등, 모두를 융합(融合)해서 얻어낸 구원이어서, 대단한 가치가 있었다. 

 

복음서 마지막에는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52절)고 전한다. 무슨 의미일까? 그의 극적인 변신은 이사야 본문 16절에 이미 예고된 예언이 바디매오에게서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 사건이 분명하다. 특히 길에서 예수를 좇게 된 바디매오의 모습은 소명자의 새 길에 들어 선 사도 바울의 경우와도 비견(比肩)된다. 동시에, 그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선명히 거명된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예수 이후 예루살렘교회에서 복음전파와 교회 부흥에 크게 기여한 전사였다고도 보인다. 그 만큼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체험적으로 능력 있게 간증할만한 인물이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여리고 출신 인물인 삭게오도 그와 유사한 인물이리라)

 

그렇다.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세계와 그 은혜에 눈이 뜬 이들은 왜 내가 그 은혜를 받았는지 깊이 성찰하며 살아야 한다. 보게 되고 알게 된 데에는 큰 이유가 있다. 주를 따르기 위함이요 내가 본 주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여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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