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21:1~14, 사63:7-14, 행13:26-35
부활절 넷째 주일이다. 완연한 봄이어서, 대지에는 화사한 꽃들이 만발하고 코로나로 움츠러든 인간들과는 달리 생명체들의 활동도 활발하며, 대기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깨끗한 기운도 가득하다. 보도들에 의하면 세계의 인적이 드물어진 도시 길거리에는 야생 동물들이 등장하며 뛰고 활보하는 등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놀라운 일이며, 잃어버린 세상을 되찾은 기분이다. 이대로 가면, 코로나가 지구 생태계의 지도를 새로 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계절도 오월에 접어들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조금씩 완화되면서 길거리와 삶의 현장에는 거리로 나온 사람들로 제법 활기가 찬다. 모임이 시작된 교회들도 활기를 되찾아간다. 오늘은 첫 주일로서, 청소년주일로도 지키게 되었고 총회에서는 교회교육(敎育)주일로도 지킨다. 가정의 달과 교육의 달이 함께 겹치면서 우리의 미래 세대와 가정의 영적 기반을 강화시키려는 시도들도 잇따르고 있다. 부모나 자녀들의 역할도 새삼 되새겨 보아야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넷째 주일인 오늘에는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찾아보자. 제시된 복음서를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또 다시 찾아 가셨다. 벌써 부활 후 세 번째 제자 찾기 행보이다(14절). 이번의 방문의 특징은 주님이 디베랴(갈릴리) 호수로 이미 되돌아가 있는 7명이나 되는 주요 제자들을(2절), 그 생업 현장(現場)으로 찾아가신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미 부활의 주님을 두 차례나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디베랴 바닷가로 돌아간 것은 무엇을 말하나? 뭔가 이미 자신들의 생계(生計) 대책을 찾아 나섰음을 말한다. 예수 부활만으로도 자신들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그들은 그런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그런 상황을 모르실 리가 없으신 주님이 왜 그들을 찾으셨을까? 그냥 제자들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는 주님의 이 제자들을 찾으시는 모습이 ‘마치 교회의 목회자들이 교인을 가정과 직장으로 심방하는 모습과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 이 장면을 주님의 ‘제자 특별 심방(尋訪)’으로 부르려 한다. 우리는 뜻밖에 교회심방의 원조(元祖)인 예수를 뵙는다.
목회자들은 어떤가. 목적 없이 심방을 하는가? 그럴 리 없다. 반드시 목적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심방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제자 찾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라. 마치 뭔가 희망을 잃거나 믿음의 기반이 무너져서 낙심하여 옛 것으로 되돌아간 교우들을 찾아간 목회자의 모습이 연상되지 아니한가? 그렇다. 주님의 이번 제자 심방은 그런 점에서 매우 큰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은 ‘제자들을 다시 부르고 세우기’에 있었다-! 그런 주님의 마음을 찾아보자.
첫째는 주님의 제자 찾기에는 당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천박하여, 조금 더 기다리지도 못하고 옛 것에로 되돌아가서 제 살길을 찾아 나선 제자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표하고자 하심이 절대 아니었다. 즉 당신의 말을 잘 안 듣고 믿지도 않는다며 혼내고 야단쳐서-, 들으면 좋고 안 들으면 내치고 결판 짓기 위해, 찾으러 가신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주님에게는 그들을 향한 간절함이 있었기에 찾아가신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얻어낸 인물들인가, 어떻게 교육하고 양육해온 제자들인가, 앞으로 얼마나 큰일들을 감당해야할 위인들일까를 꿰뚫어 생각하며 알고 계신 주님이셨다! 그러기에 지금의 그들의 얄팎하고 연약한 대응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으셨다. 이 고비만 잘 넘기면, 그들은 인류사에 기록될 위대한 인물들이 될 존재임을 확실히 기대하신 것이다. 그 기대감이 담긴 심방이었다.
둘째는 이전 일들에 대한 잊을 수 없는 회상(回想)과 기억(記憶)을 통한 방법으로 제자들의 재출발을 이끄셨다. 예수님의 ‘제자들 다시(再)불러 세우기’는 이전에 그들과의 맺었던 첫 경험들을 회상하게 하는 일을 통해서였다. 부활의 또다른 실체를 선보이신 것이다. 무슨 회상거리들이었나? 시몬 베드로는 물론 제자 그룹에서는 도저히 잊을 수 없었던 한 사건 때문이었다(눅5:1-11참조). 사실 그 사건을 시작으로, 예수의 제자 공동체가 출범했기 때문이었다.
☞ 잠시 그때로 가보자. 그날따라 게네사렛(디베랴-갈릴리) 호수의 어부인 시몬 베드로는 밤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빈 그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 계신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면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셨다. 의심은 되었으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렇게 순종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심히 많은 고기가 잡혔다.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몬 베드로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라 이제 후로는 내가 사람을 취하리라’(10절). 그 때부터 시몬과 함께 있었던 동료들은 삶의 전체를 버려두고, 예수로 승부하는 인생들이 된 것이다-!
예수 때문에 새 인생길에 접어든지 어연 3년여의 세월이 지나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스승의 충격적인 십자가 죽음과 극적인 부활의 다시사심도 잇따랐다. 하지만 미래의 삶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제자들은 여전히 불안했고 두려웠다. 주의 다시 사심이 자기들의 앞길을 어떻게 인도해 가는 일이 될 지를 그들은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선 것이다. 바로 디베랴에서의 옛 어부 생활이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전혀 달랐다. 제자들의 그런 과거로의 회귀(回歸)가 그들의 몫이 아니고 이제 그들에게는 새로운 사명(使命)이 부여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명인가? 주님이 그들과 처음 만나서 예고하셨던 일, 즉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일이었다(눅5:10). 그것은 주님이 친히 이 세상에서 행하시며 생명들을 깨우치고 살리셨던 선교(宣敎) 사역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주님이 친히 디베랴 현장으로 낙향(落鄕)했던 제자들을 심방하신 것이었다.
복음서를 다시 보자
그렇다면 주님의 심방으로 어떤 일이 있었나? ‘그 날 그 때’를 연상시키는 두 가지가 있었다.
1) 시몬 베드로와 동료들이 밤샘 고기잡이에 매달렸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 바로 그 시점에 주님이 바닷가에 서계셨다.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 한마디, 곧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6절)는 한마디에 상황은 급변했다. 순종하자,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잡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일로 당신 존재를 알리셨으며, 왜 당신이 그들을 그곳으로 찾아오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셨다(3-7절).
2) 해변에 모인 제자들은 주님이 마련하신 조찬(朝餐)에 참여했다. 보기에는 숯불-생선-떡 등으로 차려진 조반상이었으나, 성격은 고난 직전에 주님이 자기들에게 베푸신 성찬(聖餐)이었다(9절. 눅22:19-20참조). 제자들 모두가 주님이신 줄 알기에, ‘당신이 누구냐’ 묻질 않았다
☞ 이 두 가지 행위들을 통하여 제자들은 주님의 어떤 마음을 알아차리며 깨달았을 까? 우선 물고기 잡게 된 일을 통하여 망각해가는 자신들의 소명(召命)을 기억하며 되찾게 되었고, 주님의 몸인 성찬을 받으면서 그들은 이제 주님과는 더 이상 떨어져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재 각성하게 되었다고 본다. 주님의 기억을 불러온 심방의 힘이었다! 그러기에 이제 그들은 자기들이 서서 살아가야할 자리가 고기 잡는 곳이 아니라, 생명 구원하는 선교의 자리임을 찾게 된다!
구약을 보자
본문의 이스라엘은 깊은 고통과 시련에 처해 있었다. 원망도 깊었다. 바벨론의 침공을 받고 포로 된 이래, 예루살렘과 온 유대가 파괴된 모습을 회복하지 못한 체, 민족적 무기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묘하고 특이한(?) 자산(資産)이 있었다. 그것은 재물이나 자원이나 군사력 같은 힘은 전무했지만, 예전에 여호와로부터 독보적으로 사랑과 돌봄을 받아서 주변으로부터도 부러움을 누렸던 영적 경험들을 풍부히 보유했기 때문이다.
참 궁금하다. 지금의 것이 아닌 과거의 것이, 그것도 물질도 아닌 영적인 추억거리에 불과한 것이 어찌 백성이나 개인에게 자산이 될 수가 있겠느냐는 의문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좋은 추억이나 기억들을 가진 이들은 그런 것들이 없이 사는 사람들과 삶이 같을까, 다를까? 다르다면 그 차이는 무얼까? 그렇다. 아주 다르다! 전자가 훨씬 더 우위에 있다.
축적된 좋은 추억은 언제나 현재의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풀어가는 데에 큰 도우미가 된다. 현재의 난관의 원인을 성찰할 계기도 주고, 회개와 반성의 실마리도 제공한다. 즉 무경험자의 실패와 방황과는 달리, 좋은 경험보유자는 재기와 승리의 리듬과 방정식을 탈 줄을 안다. 승리 경험이 많을수록 승리확률도 높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넘어졌어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다시 재기하고 새 역사의 무대를 주도하는 인물들이 된 것도 모두 그 연유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부모와의 좋은 경험을 많이 쌓은 자녀들은 행복하다. 스승과의 밝은 경험을 쌓은 제자들도 행복하다. 목회자와 긍정적인 접촉들을 축적한 교우들도 행복하다. 친구들과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들을 축적한 이들도 행복하다. 치열한 씨름에서 승리해본 경험자도 행복하다. 이스라엘의 경우가 그랬다. 비록 그들의 지금이 힘겹고 탄식의 나날이었을지라도, 그들은 결코 불행해 빠져 살 수가 없었다. 하나님과의 압도적인 사랑의 시절을 회상할 거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를 추억하며 다시 돌아가기만 하면, 그들은 재기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1) 본문은 예루살렘이 파괴당한 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에서 불렀을 탄원과 간구의 노래들 중의 하나로서, 시44편, 89편의 배경을 이룬 예배 시로 보인다. 내용은 삶의 난관과 역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자신들의 무기력을 고백하면서, 그 해소를 위해 이전(以前)의 전능자 여호와가 자기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추억(追憶)하며 그들 안으로 그 때를 다시 불러드리는 내용으로, 즉 ‘-하셨던 이(여호와 전능자)가 이제 어디 계시냐’를 읊고 있었다(11-13절 참조). 그 추억의 내용을 보자.
☞ -모세 때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11절.상)
-그들(모세와 아론)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11절,하)
-바다에 길을 내셔서 적들을 심판하고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12-13절)
2) 이 탄원에는 여호와와의 관계 회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그게 희망이며 자산이다! 비록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여호와가 그들의 대적(對敵)이 되고 매를 들어 치시는 이가 되었으나(10절), 그들은 부모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그 부모의 옷자락에 매달려 용서와 보호를 요구하는 자식의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여호와와의 관계에서 사랑과 축복과 승리의 추억들이 그 밑바닥에 잘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집나간 둘째의 자각(自覺)처럼 말이다(눅15:17-참조).
3) 그 점을 꿰뚫어 알고 있는 여호와의 백성을 향한 말씀에는 어떠한 견책이나 비난이 없다. 제자들을 찾은 예수님에게서 제자들의 퇴행적 행위에서 전혀 책망을 하지 않았음과 같았다. 그 대신 여호와의 은혜의 증거들만을 풍성하게 알리면서, 그것을 기억하고 회개하여 돌아오면 다시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와 평안과 영광을 상속하게 될 것만을 전하였다(7-9,14절 참조).
서신서를 보자
본문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존해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부활 예수를 전한 설교내용이다. 문제는 바울이 예수의 친(親)제자그룹인 12사도 동아리에 들지 못한 인물로서, 부활 예수를 직접 뵙지 못했으며, 부활하신 주를 영으로 만난 이였다는 점이었다(행9장 참조). 그래서 사도로서의 정통성에 의심을 계속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간접적인 부활 예수 만남이 과연 부활 예수를 전하는 데 치명적인 장애가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에 그 점에 문제가 된다면, 12사도 이후 시대에는 더 이상 증인은 없게 된다. 매우 큰 문제 아닌가?
그 점에서 바울은 사도 이후의 부활 증인의 모범을 예시(例示)하였다. 곧 보지 않고도 믿게 되고, 또 미래에도 부활 증인이 될 수많은 후배들을 위하여, 증인 자격에 필요한 요건을 선보였다. 그것은 당신이 부활 예수의 제1 증언자이었던 사도 베드로의 증언의 내용과 대조(對照) 도식(圖式)에 따른 틀을 그대로 인용(引用)하면서(26-30절), 증인으로서의 사도들의 권위를 확실히 인정하고, 그들이 전한 주의 부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고 믿을 것을 촉구한 모습이다(31절).
바울이 베드로에게서 인용했던 틀(frame)은 무엇이었나? 유대인의 악한 행위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대조시키면서, 마무리에다 예수 제자들(사도들)이 바로 그 모든 일의 목격자들이며 증인임을 강조한 것이다(31절, 행1:8참조). 그러면서 바울은 추가로 시편에 있었던 부활의 말씀들을 기억하고 회상케 하면서(시2:7,시16:10참조), 모두가 부활신앙에 설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도 바울의 이러한 예시를 좇아서, 예수의 부활과 부활신앙의 증언자로 살아가야 하겠다.
결론이다
기억과 추억은 부활의 영성이 제공하는 또 다른 선물들이다. 되살려내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어진 말씀들과 은혜들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 훈련이 잘 된 자들은 건강하다. 넘어져도 쉽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우들은 물론, 청소년들의 교육과 자녀들의 신앙교육에도 좋은 기억과 추억들을 적극 활용하면 좋겠다. 강압적이나 주입적인 방법은 더 이상 효과가 없으니, 피해야 할 것이다.
부모와 선생과 선배가 달라져야 한다. 자손들과 후배들과 좋은 경험과 만남을 쌓아가야 한다. 좋은 추억과 아름다운 기억들이 풍성할수록 좋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선한 투자가 될 것이다. 빈곤하고 상처뿐인 과거에는 행복한 미래가 있을 수 없다.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과 추억의 힘을 내 신앙 향상과 상호 관계증진에도 적극 잘 활용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