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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장애인주일. 4.19혁명기념주일

관리자 2020-04-15 (수) 17:18 4년전 1489  

본문) 눅 24:13~35, 습 3:14-20, 벧전 1:3-12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이다. 지난 주간에는 제21대 총선을 통하여, 국정을 이끌어갈 새 선량(選良)들 300명을 뽑았다. 선출(選出)된 그들 모두에게 축하를 보내며-, 부디 그들 모두가 진정한 나라의 일꾼들이 되어서, 우리나라를 세계 일등 국가로 세워주는 이들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은 또 장애인(障礙人)주일과 4.19혁명(革命)기념주일도 겸한 주일이다. 우리 주변에 각종 신체장애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와 돌보심이 가득하시기를 빈다. 하지만, 요즈음 장애란 말은 꼭 신체장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 차원에서의 장애들과 신앙 차원에서의 영적 장애들이 훨씬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겉보기의 육체적인 장애보다도 정신과 영적인 장애가 훨씬 더 위험하고 피해도 크지 아니한가!

 

감사하게도 우리의 주님은 신체적인 장애들만 고치신 분이 아니다. 바로 정신이나 마음이나 영적인 장애까지도 다 치료하셨다. 마침 오늘의 말씀에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영적-정신적 충격으로 인하여 장애에 빠져 든 자들을 치유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은 이런 정신 및 영적 장애들을 겪고 있는 많은 이들을 생각하며, 본문에 담긴 메시지를 전하려한다. 게다가 오늘 말씀들은 분명히 이런 장애를 치유할 혁명적 내용들도 그 해답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온 세계 교회는 코로나19의 공습을 받으면서, 사회적-인간적 거리두기를 실시하고 있다. 그 바람에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예배 참석과 교회 가기가 강제로 금지당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였다. 벌써 근 2달 가까이를 그렇게 보내고 있고, 지난 주일에는 부활 주일인데도 가정 및 개인 예배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로마 바티칸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혼자 인터넷으로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이 방영하기도 하였다. 

 

그런 중에도 눈에 띄는 새로운 시도의 예배가 있었다. 소위, ‘드라이브-인 워십’(처지)이었다. 교우들이 넓은 운동장에 모여 자동차에 탄체로, 라디오 주파수에 따라서 주일예배를 함께 드리는 예배였다. 매우 도전적이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그를 보며, 주님이 요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께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다. 그 여인은 예배 장소문제로 오랫동안 영적 장애를 겪고 살아온 자였는데-, 그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해결책을 제시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靈)과 진리(眞理)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靈)과 진리(眞理)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그렇다. 영과 진리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예배들의 정확한 주파수이다. 성령이 함께 계시고, 말씀이 진리로 선포되는 곳은 예배가 가능하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하고, 환경의 구애 됨도 없이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정확한 주파수이다. 이것이 본질이다! 장소와 시간과 보다 나은 환경은 예배를 돕는 들러리들이다. 이 본질을 상실한 예배는 공허할 뿐이다. 본질이 빠진 곳은 예배로서의 생명이 없다. 환경이 미흡해도, 본질이 살아있으면 예배는 된 것이다. 

 

마침 오늘의 복음서인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 이야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영적 장애에 급속히 빠져 든 이들의 모습과 함께, 그들이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제자들의 위기(危機)의 실상은 어떤 것이었나? 예배(禮拜)와 영적(靈的) 위기였다. 그들의 가슴에 이미 희망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예수를 잃어버리고 나서 초래된 위기였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란 수단과 목표를 잃게 되면서, 발생한 충격 때문이었다. 

 

그 일은 그들에게 큰 재앙이었다. 천재지변(天災地變)급이었다. 주님, 곧 나사렛 예수가 저 잔인무도한 무리들에게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여 장례까지 치렀기 때문이다(20-21절). 그것도 저항도 전혀 해보지 아니하고, 그저 무기력하게 죽임을 당하여 장례까지 치른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억울하고 슬픔에 빠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복음서 기자인 누가는 그들의 그 모습을, ‘눈이 가리어졌다’(16절)고 전한다. 분별력(分別力)을 잃었음을 전한다. 이런 사람들의 결과는 어떤가? 퇴행(退行)이요 실패며 패배이다. 그들의 고향인 엠마오 행(行)은 바로 그 결과였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그 날이 지나기 전에, 급히 다시 떠나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올라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면서, 전혀 다른 존재로 새 출발하는 인생이 되었다. 실로 대 반전(反轉)이었고 큰 기적이었다. 대체 어인 일인가? 이 두 사람들의 삶의 행보를 그토록 급속히 뒤돌려 논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다시 사신 예수 때문이었다. 죽었다는 그가 그날 그 두 사람 사이에 찾아오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런 초유의 대 반전이 발생한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 대 반전의 드라마를 전한다. 그것을 추적해보자. 

 

복음서를 보자

복음서는 다시 예루살렘을 향할 때의 그 두 제자들의 변화된 상태를 이렇게 전한다. 첫째는 그들의 가리었던 눈이 다시 열리고 밝아졌다(16, 31.상절). 부활하신 예수가 자기들을 친히 찾아 주셨음을 확인한 것이다. 게다가 그 순간, 예수는 순식간에 그들 시야에서 사라지셨다(31.하 절).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을 찾아주셨던 부활의 주님에게 이미 마음이 붙잡혀 있었다. 오히려 자기들과 동행하시면서 주님이 성경(聖經)을 풀어주시고 성찬(聖餐)을 베푸시던 그 때, 자기들 가슴이 뜨거웠던 순간까지 회상(回想)하며 기억(記憶)도 하였다(30-32절). 

 

부활하신 예수와의 그런 만남의 충격의 여파는 너무도 컸다! 이 사건은 지난 몇 일간의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망가지고 고통 했던 모든 아픔들을 충분히 씻어내고도 남을만한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 엠마오 행을 고집할 수가 없었다. 그 주막에서 그날 밤을 묵고 갈 마음도 없었다. 어서 다시 떠나온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마음 뿐이었다. 가서 제자들을 만나서 자기들이 체험한 부활의 주를 만난 일을 상세히 알려서 시름에 잠겨있을 그들을 격려해야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33-35절). 새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제 이 과정에 얽힌 몇 가지 주요 내용들도 함께 살펴보자. 

1) 그들이 가던 엠마오는 지금의 킬로네란 이름을 가진 지역으로서, 예루살렘 서쪽 약 6km지점에 위치한 곳이었다(13절). 그들은 최근에 발생했던 나사렛 예수의 죽음에 관련된 일로 매우 상심해 있었다. 실로 그들의 대화는 희망을 빼앗긴 자들의 무너져 있는 모습의 전형이었다. 

 

2) 그들에게 한 나그네가 끼어 들었다.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이셨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 예수라는 줄을 전혀 감지(感知)하지 못했다. 슬픔과 좌절과 분노에 젖어 있던 마음 때문이었다. 특히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그들에게는 아직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화가 시작되었다:

 

-예수가 물으셨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상). 

-그들이 반응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모르느냐’

-예수가 물으셨다. ‘무슨 일이냐’

-그들이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19-21.상). 

 

-그들은 자기들이 들었던 예수의 부활에 관련된 소문에 관해서도 언급하였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 자신들의 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21.하-24절 참조).

-예수가 질책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6절). 

 

3) 그러면서, 부활의 주님은 그런 그들의 불행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조치로서, 그들에게 긴급 특별 과외 성경공부를 실시하셨다. 그 교재(敎材) 자료들은 구약의 세 본문들인 모세의 율법서-선지자들의 예언서-그리고 시편을 비롯한 성문서였고. 주제(主題)는 당신과 당신의 부활을 예고한 일련의 예언의 말씀들에 대한 소개였다(27절).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길거리 열강이 그들 두 사람이 엠마오에 거의 이르기까지 진행되었다(28절). 때도 이미 저물었다(29절). 

 

4) 그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주막에 들었고, 식사를 나누게 되었다. 주님이 그들에게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떼어 주셨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이 밝아지면서 그 나그네가 진정 누구인지가 보였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셨다! 그 순간이다. 또 다른 이변(異變)이 발생했다. 예수께서 그들 시야에서 사라지신 것이다(30-31절). 그렇다면, 대체 사라진 주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 그들을 떠나신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가슴과 영혼 속으로 들어가셨다! ‘사라지지 아니한 영적 현존체(現存體)’로 그들 안에 자리하신 것이다. 그 바람에 그들 자신도, 예수의 부활 생명체의 기운을 받고 맛을 보면서, 그 세계로 옮겨간 자의 행동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는 또한, 부활의 예수는 이제 부활 이전의 가시적 존재와 고난에 매여 있던 제한적 존재에서, 불가시성(不可視性)과 무제한적인 영광(榮光)의 영적 존재로서, 그를 영접한 자들과는 언제나 함께 현존하는 임마누엘의 주가 되셨음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5) 그때부터 그들은 주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가슴으로 그의 말씀을 뜨겁게 받게 되었다. 자연히 자기들이 있을 곳이 고향 엠마오가 아니라 예수의 무리들이 머물고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판단하고, 즉시 되돌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예수의 부활의 물결이 이미 그들 안에 밀려왔음이다.

 

6) 이제 부활의 주를 만나기 위한 방안들이 제시됐다. ①성경을 연구하라(32절,사 50:4). ②주님이 자신의 부활을 알게 해주신다는 것을 믿어라 ③주님의 식탁을 함께 공유하라.

 

구약을 보자

스바냐 선지자는 특이하게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4대(요시아왕-포로기까지)에 걸쳐 활동한 숨겨진 예언자였다. 스바냐란 그의 이름도 ‘여호와께서 숨기셨다’란 뜻을 담고 있다. 그를 통하여 여호와는 큰 고난을 넘어 새롭게 열릴 이스라엘의 밝은 미래를 펼쳐 보이시며 새로운 축복의 비전들을 보여주셨다. 그의 특징은,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다’라는 표현이다(15, 17절).  

 

한신대학의 배지의 내용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의 임마누엘(Immanuel)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오시되, 오셔서 어디에 계시냐는 답을 제공한 내용이기도하다. 바로 ‘너와 우리 가운데 계시다’다는 증언이다. 이는 앞에서 엠마오의 제자들 앞에서 금세 사라지신 부활의 예수께서 어디로 가셨느냐에 대한 암시이며 그 예고였다(눅24:31-32절 참조). 스바냐는 바로 이 자기들과 함께 계신 여호와를 깊이 관심하였다. 이 은혜가 후에 부활의 예수를 통해 이렇게 실현된 것이다 :

 

1) 기쁨의 노래를 하게 된다. 전심으로 즐거워하게 된다(14절). 

2) 그 까닭은 우리 형벌(刑罰)을 제거하시고, 원수를 쫓아내시며, 천하의 왕이 함께 계셔서 화(禍)를 막아 주신다. 낙심속에 지낼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15-16).

3) 여호와는 구원자(돕는자 & 구조자)가 되셔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신다(17절). 

4) 글로바 처럼 근심하는 자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지어진 슬픔의 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18,20절). 

5) 그들의 원수를 다 벌하시고, 구원하며 모으며 칭찬(稱讚)과 명성(名聲)을 얻게 하신다(19절)

 

서신서를 보자

예수 부활의 직접적인 체험자요 증인이었던 사도 베드로는 그런 부활의 주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예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부여되는 놀라운 선물(膳物)들을 몇 가지 열거하면서 우리들의 신앙을 독려한다(3절). 그 선물들은 이렇다 :

 

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3절,상). 세상질서가 아닌 하늘질서를 좇아 사는 존재가 되게 한다

② 산 소망 속에서 살아가게 하신다(3절,하). 낡은 사고나 이념이 아니라, 진리를 따르게 한다. 

③ 영원하고도 사라지지 아니한 하늘의 불멸의 유업(遺業-inheritance)을 잇게 하신다(4절).

 

1) 여기에서는 믿음이 절대적이다. 믿음은 우리가 최후의 구원을 얻기까지 우리를 하나님의 보호막에 거하게 한다(5절). 

☞ 이제 믿음이 수행하는 역할을 더 들여다보자. 믿음은 여러 가지 잠깐 끼어드는 시험들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게 한다(6절). 금(金)보다 귀한 역할을 하면서, 주님이 오실 때 우리에게 주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한다(7절). 예수를 보지 않고도 사랑하게 하며, 믿게 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한다(8절). 최후의 열매로서 영혼의 구원(救援)을 받게 한다(9절). 

 

2) 베드로 역시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시행하셨던 것처럼(눅24:27참조), 우리에게 임할 구원에 대하여서는 ‘선지자들과 성경이 주신 말씀들을 연구(硏究)하며 부지런히 살피라’고 요구했다(10절). 제대로 된 구원은 예언과 말씀에서 근거를 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요즈음 사이비 구원관이 얼마나 범람하고 있는가! 그 바람에 잘못된 구원관에 빠져 많은 영혼들이 황폐해졌다. 진정 구원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말씀과 성경연구가 절실하다.

 

3)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은 부활의 영이기도 하다. 자연히 주님의 고난과 영광을 섭렵하신 영이시다. 그러기에 성령 받은 이에게 발생하는 고난과 영광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이 점을 잊지 말고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자(11-12절). 

 

결론이다

지금의 나는 혹 엠마오의 제자의 길에 서 있지 않은가? 속히 벗어나야 한다. 부활신앙이 없는 신앙은 생명이 없는 껍데기 신앙일 뿐이다. 진실하자. 부활의 주님을 향한 예배의 주파수(周波數)가 작동되게 하자. 부활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가 내 안에 체현(體現)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배우자. 우리 신앙의 뼈대를 이룰 진리가 바로 주어진 말씀들(율법-예언-복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과 진리가 내 안에서 계속 작동해야 한다. 내 신앙을 점검하자. 퇴행은 안 된다. 부활의 영의 역사로 영광을 계속 발산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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