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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종려주일

관리자 2020-04-01 (수) 23:25 4년전 1544  

본문) 요 19:17-22, 삼하 7: 1-17, 계 19:11-16,  / 수정판

    

오늘은 금번 사순절 세 번째 해의 마지막 주일이자, 부활주일 직전 주일이다. 완연히 봄에 접어든 4월 첫 주일이기도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위협이 엄존하지만, 마음을 열고 주변 환경을 살핀다면, 하나님이 주신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교우들께서도 이러한 변화의 기운을 흠뻑 받으며 새 힘을 얻어서, 이 때에 시련을 반드시 잘 극복하시길 기원한다. 

 

세계교회는 오늘을 예수님의 예루살렘에로의 왕(王)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Palm Sunday)로 맞이한다. 이 때 그의 백성 된 우리는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로 보여 주신 제반 행적들을 묵상하며 그의 행렬에 함께 한다. 주님이 그 때 보여주신 굵직한 행보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메시지와 교훈으로 아로새겨져 있지 아니한가!

 

거짓되고 위선적인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거부, 열매 없는 나무와 인생을 향한 저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왕의 섬김과 겸손, 거룩한 주의 식탁에의 제정(制定)을 통한 일체의 몸을 이루기, 스승이면서도 제자들에게서 당한 뼈아픈 배신, 그리고 세상 죄(罪)과 어둠의 귄세와의 마지막의 승리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에 참여하신 왕의 행적 등등을 묵상하면서, 백성 된 우리들도 왕의 그 행보들에 동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꼭 주목할 대목이 있다. 예수께서는 왜 그런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일련의 과정들을 피하지 아니하시고, 그토록 큰 고통과 죽음까지도 겪어야 될 힘겨운 과정을 몸으로 부딪치고 감당하며 도전해 나아가셨느냐는 점이다. 왜 세상 영웅호걸처럼, 불의와 악의 세력을 향해 가차 없이 진압하는 방법은 끝내 외면하셨느냐는 점이다. 왜 그렇게 세상과 다른 길을 선택하시고 우리에게 보여 주셨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분명한 선택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대응할 마음가짐도 애매하지 아니하고 확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승리도 승리 나름이다. 상대를 이기고도 지는 일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지고도 이기는 길도 많다. 물리적인 폭력과 압력의 힘은 크게 보인다. 쉽게 갈 수 있고 빨리 끝낼 수 있게 보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런 승리는 확실한 승리를 담보하지 못한다. 그러나 섬김과 희생과 사랑의 힘은 약하게 보인다. 그러기에 인내가 있어야 하고 피와 땀과 눈물이란 밑거름이 투입되어야만 한다. 열매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십자가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마치 우리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바로 그 모습과 같다. 길고 긴 씨름이 부모의 자식교육 아닌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택하신 목표도 분명했다. 절대 패배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승리(勝利)였다(요16:33).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부여된 자유권으로 승리를 위하여 선택하신 것이 바로 갈보리 십자가였다. 그것도 순간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창조하시려고 십자가를 주도적으로 취하신 것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에게서의 십자가는 피하지 못해 지신 피동적 멍에가 아니라, 역사의 주도자로서 주체적으로 스스로 걸머진 선택이었다(17절)! 십자가 선택으로 예수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가보지 아니한 승리의 길을 열어주려고 하셨다-!  

 

재판장 빌라도가 바로 그런 유대인의 왕인 나사렛 예수를 만나서 긴장하고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자기는 세상 정치인으로서 언제나 쉽고 단호한 짧은 길을 선택하며 살아왔으나, 예수에게서는 어렵고 긴 호흡으로 올바르고 정의와 진실의 어려운 길을 고집하는(?) 모습을 강렬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모습에 더욱 전율(戰慄)했다. 항간에 떠돌던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소문들이, 결국 소문이 아닌 실재임을 마음으로 확인한 것이다(요19:7-8 참조). 그도 이제는 ‘예수는 메시아요 신의 아들이다’는 소문에 묵시적(黙示的)인 동의자가 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언제나 순간의 승리의 잔을 마시며 살아온 천박한 세상 정치인과는 전혀 다른, 영원한 승리와 분명한 진실을 취하려고 그 위험천만한 십자가란 위협도 개의치 아니하고, 아예 당당히 자기의 소중한 목숨을 거는 영원한 정치인이자 인류의 전혀 새로운 첫 인간(!)인 메시아를 그가 대면한 것이다. 그런 깊은 깨달음을 받았던 빌라도에게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예수가 승리의 길이라고 본 그 십자가를 지는 길로 가도록 허락하는 일이었다(19:16)! 그리고 하나 더 있다. 그 예수가 죽기 전, 그가 온 세상의 진정한 메시아요 구원자임을 선포(宣布)받고 공인(公認) 되도록 돕는 일이었다. 그 일까지는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판단한 빌라도였다. 그 최후의 작업이 바로 예수가 매신 십자가 명패에다 그의 신분을 명백히 밝혀주는 일이었다. 그것만은 꼭 하고 싶었다. 마지막 가는 이 낯선 왕(?)에 대한 마지막 예의도 된다고 보기도 했다.

 

그 일, 즉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명패에 써 매다는 일도 절대 쉽지 않았다. 예수를 고발한 무리들이 반드시 공격하고 비난하고 나올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예수 제거라는 정치적 욕망을 이미 들어 준 상태에서, 남은 최후의 조치인 명패 고지는 가시는 예수를 향한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밝힐 결정적인 게시판이 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반발자들에게 ‘내가 쓸 것을 썼다’(22절)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의 십자가에서의 행사의 뒤처리를 그렇게 빌라도에게 맡기셨던 왕 예수께서는 그 이후부터는 그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문을 열려는 행보를 통하여 연약한 이 땅의 인간들에게 아직 보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려고 더욱 앞장 서셨다. 그것은 세상 권세자나 지혜자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고, 오직 하늘과 땅 전체의 왕으로서 이쪽과 저쪽 모두를 다 보고 계신 당신만이 가능한 행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떤 것들이었나? 

 

곧 거짓 뒤에 있는 진리, 가짜 뒤에 있는 진짜, 죽음 뒤에 있는 생명, 폭력의 베일에 쌓인 평화, 슬픔에 가려져 있는 기쁨, 억울함에 짓눌려 있던 보상과 기쁨, 수고 뒤의 위로, 어둠 뒤에 있는 밝은 빛, 죄악 다음의 심판, 보이는 것 뒤에 열릴 보이지 않는 세상, 육체에 쌓여 있는 영적 세계, 순간 뒤에 올 영생-등, 이런 세상이 확실히 있음을 온 세상에 생생히 알리고 믿게 하고 누리게 하며 살게 하시려고 전력을 다하셨다. 

 

이런 시각으로 오늘의 세 본문들을 다시 보자. 복음서 내용은 왕의 입성 차원을 넘어섰다. 그보다는 영원한 왕이신 메시아 예수가 인류의 왕으로서 취임하고 계심을 전하고 있다. 그것도 세상의 왕의 것들과는 너무도 다른 방식의 취임식을 통해서이다. 대체 어떤 취임식장이었나? 뜻밖에도 취임식의 집전(執典)은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맡았고, 취임 식장은 처형장인 십자가 위였으며, 축하와 더불어 나사렛 예수가 온 세상의 왕이심을 확증해 줄 특별 게스트로는 그의 오른편에 함께 매달린 행악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눅23:41-43,18절 참조)

 

왕의 취임식은 이번 사순절 여정의 최고 하이라이트이다. 우리는 왕의 취임을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한 위로(慰勞)차원으로 보면 안 된다. 오히려 죽어서 영원한 왕이 되시고 왕권도 영원히 행사하게 되는,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취임의 특별 무대로 봐야한다. 생각해 보라.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없이도, 그를 메시아로 시인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오직 그가 십자가 그 고난의 장에서 왕이심을 확증하셨기에, 예수는 인류의 영원한 왕이 되실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중요하다! 이제 그 왕의 특별한 취임에 얽힌 내용을 다시 살펴보자. 

 

복음서를 보자

요한복음은, 구레네 시몬의 도움을 전했던 누가와는 달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왕의 새 차원의 품격(品格)을 치밀하게 전한다(막15:21참조). 그 대표적인 사례는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신 일과(13장), 자기가 지실 십자가를 남에게 전가하지 아니하고 친히 걸머지고 가신 모습이다(17절). 왕으로서의 주님의 품격은 그의 자주적(自主的)인 태도에서 더욱 빛났다. 진정한 버림과 취함의 권세가 자기에게 있음과, 때를 아시고 앞날을 내다보시는 능력을 지니신 당신으로서,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행사하신 것이다(10:17-18, 14:30-31,18:4 참조). 

 

놀랍게도, 로마 총독 빌라도가 마지막 가시는 예수님에게 매우 우호적인 관심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자기가 살펴본 예수는 분명히 무죄였는데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이토록 십자가형(刑)을 받게 된 일에 대한 마음의 큰 부담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십자가의 명패에다, <예수 유대인의 왕>(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이란 이름을 고지했다. 그 일로 그가 그 십자가의 무대를 예수의 왕(메시아)의 취임식장으로 만들었다!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그 명패의 내용을 당시 사용 중이던 삼 개국 언어들을 다 동원해서 써 붙였다(20절). 유대지방의 언어인 히브리어, 공용어인 로마어, 통신과 교역의 언어인 그리스어가 총동원이 되었다. 결국 예수님의 명패 내용은 남달리 길었지만, 그 영적 의미는 컸다. 예수는 로마 권력이 인정하는 유대인의 왕(구원자)임이 온 세계인들을 향하여 선포된 것이다. 결국 이 명패는 죄인 빌라도가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에게 바친 최후의 헌정사(獻呈辭)이자, 인류사에서 예수의 왕의 시대를 개막하는 역사적인 대 선포(宣布)였다! 그 선포로, ‘죽어야 사는 시대’가 열렸다!

 

구약을 보자

본문은 이렇게 진리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가 하나님의 신실성과 영속성을 좇아 다윗의 뿌리(후손)으로서 오신 분임을 전제하면서(12절, 마1:6-16참조), 그 후손인 메시아 예수의 등장에 얽힌 배경들을 전한다. 그 주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1) 처음의 모든 시련을 극복한 왕 다윗은 화려한 백향목 궁에 입주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깊은 자책감에서 성전 건축을 기획한다. ‘종인 자기는 백향목 궁에 있는데,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대변하는 언약궤(법궤)는 인간이 쳐 논 장막의 휘장 안에 계신다’라는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1-3절).

2) 여호와께서는 그런 다윗을 기뻐하시면서 뜻을 전하셨다. 당신은 처음부터 특정한 처소가 아닌 백성과 함께 계셨었고, 그들의 장막과 성막에서 자유롭게 동행해 오셨음을 밝히면서, 그러기에 당신은 그 누구에게도 당신의 집(처소) 건축을 요구하지 않으셨음을 상기시셨다(4-7절). 그러면서도 성소(처소)를 매체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의 관계는 소중하게 유지하셨다. 

 

3) 여호와는 다윗의 당신을 향한 사랑과 충성을 소중히 받으시면서, 그가 앞으로 남달리 받게 될 영원한 축복들에 대하여 이렇게 약속(約束)하셨다 : 

①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하겠다(9절) 

② 떠돌이가 아닌 정착민이 되게 하고, 원수의 굴레로부터 편히 쉬게 하리라(1-11절)

③ 네 몸에서 날 후손으로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가 내 이름의 집(교회)을 건축할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집)와 왕위(王位)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12-13,16절, 오늘 복음서)

④ 나는 그에게 아비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절대관계를 맺겠다고 하셨다(14-15절) 

 

☞ 하나님의 이런 자유로운 양자(養子)선택(시2:7참조)은 나사렛 예수로 더욱 활짝 열리었다(막1:11,9:7,마16:16,눅1:30-33참조). 당신을 매체로 하여, 종의 관계에서 자녀의 관계로 대거 하나님의 자녀들의 탄생이 이루어졌다(주기도 참조). 새로운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신 것이다!

 

서신서(계시록)를 보자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골고다 십자가에서 왕 취임을 하시고,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진정한 하늘과 땅 뿐만 아니라 어제와 이제와 내일의 왕으로서, 당신의 본향(本鄕)인 천국(天國)에서 이 세상을 향하여 어떤 통치(統治)를 펼치고 계신 지를 복합적으로 전하고 있다.

 

입신하여 하늘 보좌에 계신 주님의 뵌 요한의 증언이 퍽 경이(驚異)롭고 신비스럽다(11-14절). ‘백마(白馬)를 타셨다’는 증언이 두 번이나 있다(11,14절). 최근 신천지의 이만희나 심지어 북한의 김정은이 백마를 탄 모습들을 공개하면서 자신들이 예수 같은 메시아임을 과시하려 하지만, 본 내용 자체는 오직 충신과 진실이란 이름을 가지신(11절,요18:37),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하늘의 그리스도에게만 국한해서 사용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16절). 

 

무엇보다도 하늘에서 뵌 메시아는 그곳에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매우 특별한 옷을 입고 계셨다. ‘피 뿌린 옷’을 입고 계셨기 때문이다(13절,상). 무슨 옷일까? 나사렛 예수로 이 땅에 오셔서, 죄악의 권세와 싸우시느라 십자가에서 매달려 쏟았던 흔적이 담긴 전사(戰士)의 옷이었다. 그 피 옷은 하늘 영적 생명들에게는 영광의 흔적이지만, 땅의 존재들에게는 그의 입의 말씀이란 검(劍)과 함께, 심판의 권세를 드러내는 것이었다(13절,하,15절, 14:10, 사63:1-3참조)

 

결론이다

진리의 왕이신 예수를 영접하는 종려주일이다. 그 분은 심판의 주로 오실 터인데, 우리는 그 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메시아의 본래 이름을 주목하자. 그는 충신과 진실이시다. 그러기에 그의 백성이자 그의 자녀가 된 우리는 믿음과 진리의 자리가 우리의 삶의 자리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 왕은 공의와 정의의 주이시다. 이기심이 아닌 배려의 마음으로 이웃 사랑에 힘쓰자. 부활절도 임박했다. 부활의 영광은 아무에게나 허용되지 않는다. 왕의 참 백성들만 맛볼 수 있는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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