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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제주4.3기념주일

관리자 2020-03-25 (수) 13:44 4년전 1603  

본문) 눅 23:39-43, 겔 18:1-4, 21-32, 갈 2:15-21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이다. 우리는 이 때, 빌라도의 손을 떠나 십자가에 매달리신 고난(苦難)의 예수님을 만난다. 하지만 그는 아직 죽지는 않으셨다. 아침 9시에 매달리신 후,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이란 시간대가 그 분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은, 지금 우리의 처지로 말하면, 일종의 ‘사회적 거리 두기’에 들어서신 것이다. 그토록 가까웠던 이들과도 거리를 두시고-, 오직 당신만이 마지막 행하실 작업에 진입하셨다. 

 

그 짧은 순간, 그것도 찢어지는 아픔과 통증에 시달리고 계실 순간, 그는 대체 무엇을 하셨나? 그 분 자체가 말씀(Logos)이시기에, 아직도 남기고 떠나셔야할 유언(遺言)을 하실 시간이었다. 본래 유언의 무게는 남다른 법이잖은가? 그의 십자가상의 말씀의 무게는 더욱 그러했다. 인류가 경청해야할 최고의 엑기스 말씀들이 그의 십자가상에서 하달(下達)된 것이다. 

 

만왕의 왕의 <십자가(十字架) 상의 7언>이 그래서 나왔다. 그 내용들을 소개를 드린다 :

1언-<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24), 2언-<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언-<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언-<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5언-<내가 목마르다>(요19:28), 6언-<다 이루었다>(요19:30), 7언-<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오늘은 마침 교단 총회가 제정한 제주(濟州)4.3항쟁기념주일이기도 하다. 4.3사건은 해방 후, 한반도 제일 남쪽이자 평화의 섬이었던 제주에서 1948년에 발생하여 무려 7년 7개월 후인 1954년 9월에야 막을 내렸던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사건이었다. 내용만으로 보면, 1980년의 광주 5.18사태를 훨씬 뛰어넘는 가장 무자비하고 참혹한 민간인 대학살사건이었다. 

 

민간인이 무려 약 3만 여명이 살상되기도 한 4.3사건은, 그 배후에 해방 후 남북단일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촉발된 이념 투쟁이 있었다. 당시 남노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많은 제주인들의 입장은 남북의 단일정부를 원했는데, 그것은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려던 미(美)군정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 흐름 속에 양측의 충돌이 커졌다. 미군정과 이어서 들어선 이승만 정권이 그런 제주를 ‘빨갱이들 섬’으로 간주하면서 집단(集團)적 제압을 위한 방법들을 총동원했다. 

 

당시의 제주는 절대 고립된 곳이었다. 권력자들은 그런 제주를 외부와의 접촉을 통제한 체, 고립과 탄압정책을 확대해갔다. 왜정 시대의 주역이었던 친일(親日)세력을 앞세웠고, 육지의 군대와 경찰들을 동원하였으며, 그 과정 속에서 특히 서북청년단이라는 기독교인 중심의 진압대를 투입하여, 실로 무자비한 대학살 사건들을 벌린 것이다. 그 바람에 제주의 중산간 지역의 95%가 진멸되었고, ‘잃어버린 마을들’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살상 당한 약3만 여명들과 그 후유증으로 도망하거나 숨죽이며 살아오던 제주도민의 수는 실로 헤아릴 수 없었다. 지금도 그 때의 상잔(相殘)이 평화의 섬 제주에는 깊은 상처로서, 현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은 그들 잔인한 진압세력으로 투입된 서북청년단이란 기독교 극우단체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6.25사변 때, 북한에서 남하한 기독교인들로서, 남한에 정착하면서 반공을 신앙화하면서 극우(極右)세력에 앞잡이로 활동하였다. 폭력과 테러도 서슴치 않았으며, 빨갱이 세력은 진멸해야한다는 논리로 좌익 사상을 가진 이들에게는 매우 무자비한 폭도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런 그들이 제주 폭력진압에 주역으로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어찌 그들뿐이랴? 그들을 파송하고 부렸던 위정자들과 교회 협력자들도 마찬가지 폭도들이었다!

 

기독교 서북청년단의 이런 제주 폭력진압 개입 사건은 우리 한국의 130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으며, 회개(悔改)하고 반성해야할 대 사건이었다. 제자 베드로에게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亡)한다’(마26:52)면서 휘두르던 칼을 거두게 하시다가, 정작 당신 자신은 폭력 세력들에 의하여 오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분명 그때 우리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던 그들을 보시면서, 피눈물을 흘리시며 괴로워하셨을 것이다. 그 때부터 한국의 보수교단에서는 반공을 신앙화하여, 예수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며 살기 시작했다.  

 

요즈음 우리는 신천지 사태를 대하고, 전광훈 같은 거짓 선지자와 그를 쫓는 광신자들의 등장을 보면서, 잘못된 신앙의 패해가 얼마나 무서운 지를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이제는 신앙도 분별해야만 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무조건 반가워만 할 때는 아니다. 거짓되고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인 사이비(似而非)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영적 분별력이 정말 필요로 하는 때다. 

 

잘못된 신앙, 증오와 혐오가 비수처럼 가슴에 무장된 신앙, 집단적 이념(理念)을 신앙화 시킨 신앙에는 구원은 없다! 저 아랍의 IS집단과 다를 바 없다. 분열과 대립과 보복과 전쟁을 불러오는 부정적인 쏘시개일 뿐이다. 그런 파괴적 신앙을 품게 되면, 자신과 주변에 평화와 일치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불화와 대결과 갈등만을 일으키는 문제아만 된다. 그러기에 올바른 신앙, 건강한 신앙, 제대로 된 신앙이 필요하다. 구원은 올바른 신앙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잠시 생각하자.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너희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였다. 거기에 순복(順服)한 이가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그때 아브라함은 불신자였던가? 아니다. 그도 역시 아버지 데라의 우상(偶像)종교의 그늘과 가계(家系)란 집단의 그늘 아래서 살아왔던 이였다. 그런 그가 ‘떠나라’는 지시에 믿음으로 그곳을 벗어나자, 그는 ‘하나님이 끝까지 보장해 주시는 새 존재’가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떠남의 성격은 자신을 그 동안 맹목적 내지 맹신적으로 묶어 두었던 집단의 카르텔(연합), 즉 지역-이념-핏줄-종족-종파로 묶여 살아왔던 카르텔리즘(Cartelism)에 대한 거부이며 거리두기와 같은 성격이다. 거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제시하신 약속에 자신과 미래를 내어맡길 수 있음을 믿고 결단한 것이다. 그 부름에 응답하지 못했다면, 아브라함은 없었다. 

 

그러면, 어떤 신앙이 구원을 안겨줄 참 신앙이며, 어떤 신앙이 외면(外面)당하게 될 신앙일까? 이를 위하여, 오늘 세 본문 말씀을 다시 주목한다. 오늘 말씀들은 뜻밖에도 개인이든 집단이든, 신앙에는 구원을 안겨 줄 것이 있고 외면당할 것도 있음을 알린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두 번째로 내어 놓으신 말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으리라’(43절)를 새롭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복음서를 보자

분문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실 때-, 그의 좌우(左右)에서 함께 매달려 고통하며 함께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행악자들(강도들/막15:27참조)이, 가운데에 매달리신 예수를 상대로 자신들의 구원(救援)의 문제를 놓고 매우 의미심장한 토론(?)을 나누었음을 전한다. 

 

1) 강도들(행악자들)은 유대의 독립을 위해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 않던 열심당원들로 보인다. 민란 중에 살인하며 체포되었던 바라바의 동료였을 가능성이 크다(막15:7절). 그런 점에서 그 두 사람들의 저항의 뜻은 하나였다. 그 과정에 로마군에 의하여 체포당하면서, 체제 전복 사범으로 십자가 처형당하여 죽게 된 것도 함께였다. 그 처형장에서 예수를 함께 만난 것도 함께였다. 그토록 모든 것을 함께했던 그들이, 그 마지막 순간에 딱 한 가지 때문에 갈라섰다-!

 

☞그게 무엇이었나? 십자가에서 만난 예수를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모두 예수를 구원자로 보았던 점은 같았으나(39.42점), 왼편 강도는 예수를 실패하고 무능한 구원자로 보았다. 이유는 분명하다. 자기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자체가 메시아로서의 무능과 실패를 드러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더 이상을 기대할 것 없음을 드러내듯, 예수께 이렇게 비웃음을 보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하). 

 

☞ 하지만 오른 편 강도는 예수를 보는 눈이 전혀 달랐다. 비록 자기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으나, 예수는 자기들과는 근본적으로 자기들과는 다른 의인(義人)이고 분명한 메시아임을 고백한 것이다(40-43절 참조). 그가 예수를 향하여 고백한 내용을 보면,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①집단과 일행의 잘못에서 발을 뺄 수 있는 사람 ②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③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정직한 사람 ④자기 죄에 대한 형벌도 각오한 책임성이 강한 사람 ⑤예수가 자기를 그의 나라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진정한 메시아라고 믿고 인정했던 사람이었다. 

 

2) 결과는 어땠나? 모두가 믿음대로 되었다. 예수를 비웃는 자는 철저히 외면을 당했으나, 예수에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절)라며 긍휼과 자비를 호소해 온 죄인에게는 마치 그런 그(죄인의 회개)를 오래 기다리고 계셨듯이 반기면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며 낙원(樂園)에로의 동행을 허락하셨다(43절, 겔18:32참조). 

 

☞ 결국, 심판하시는 이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이지만, 그 예수를 어떤 이로 보고 판단하며 좇느냐 여부는 그의 영원과 운명을 결정 짓게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 다시 묻는다. 당신에게는 주님이 누구신가, 과연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사는가? 

 

구약을 보자

성자 예수님의 두 행악자를 향한 그런 심판의 입장과 기준이 성부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확인하게 해주는 본문이다. 배경은 바벨론 포로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고통이 조상들 죄악에 의한 것인데도 후손이 자기들이 받고 있다고 판단을 하면서, 그러기에 ‘주의 길은 공평하지 아니하다’(25,29절)라며 하나님의 불공정한 심판론을 제기한 일에 대하여, 여호와의 분명한 심판의 원칙을 다음의 세 가지들로 정리하여 전한 내용들이다.

 

1) 심판에 대한 연대(連帶)책임론이나 집단(集團)공동책임론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하셨다. 그 근거는 ‘모든 영혼(생명)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4절)에 있다. 아버지와 자식은 비록 부자간의 필연적 관계는 유효하지만, 그러나 그 영혼(생명)의 소유권이 조상에 있지 아니하고, 창조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곧 ‘범죄 하는 영혼은 죽으리라’(43절,하)는 근거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더 이상 ‘조상 탓’하거나 ‘나라 탓’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대신, 조상이든 나라든 잘못하거나 오류에 빠져 있거든, 그곳에서 머뭇거리거나 주저앉아 있지 말고, –저 아브라함처럼, 저 오른편 강도처럼- 단호히 거부하고나 새로운 미래를 찾아 출애굽하라는 것이다.

 

2) 심판의 근거(根據)는 과거의 공로나 업적에 있다. 지금의 현실이 가장 중요한 근거와 자료가 된다. 지금의 삶이 정의와 공의, 즉 진리를 좇으면 이전의 과오들은 모두 용서받는다. 하지만 지금 불의해 있으면 과거의 모든 업적들은 전혀 쓸모없게 된다(25-29절). 이 점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께 불공평함을 말하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인간은 지금의 부끄럼을 호도하기 위하여 그의 마지막 카드로서, 한 때의 업적으로 자기를 평가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Here & Now)를 묻는다. 지금이 죄로 죽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지금이 살아 있으면 그는 산다고 선포하신다(21-24절). 오른편 강도가 바로 그 점에서 낙원(樂園)행을 이룬 사람이다! 이 점이 우리가 항상 깨어 있어야할 절대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3)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마음을 알고 사는 것이다. 즉 우리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자라도 멸망당하는 것을 절대 원치 아니하시고, 오히려 모든 인간이 끝까지 구원을 받기를 기뻐하신다는 점이다(32절). 그러기에 모든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요구는 일관되다. ‘모든 사람은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터이니,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라. 그래서 몸과 영을 새롭게 하라’(30-31절). 남 탓하지 말고, 자신을 먼저 성찰하여, 자기부터 온전히 할 것을 요구하셨다. 

 

서신서를 보자

표면적으로는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와 바울의 충돌했던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대표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충돌이 그 당시 두 교회의 집단적 입장으로 부딪쳤음을 말한다. 어떤 내용 때문이었나? 소위,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던 베드로가 그곳에 들어 온 할례 받은 유대인 성도들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면서 밥상에서 물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이 베드로의 그런 행위를 ‘외식(外飾)한 일’로 비판하고 나온 것이다(갈2:11-13절 참조). 실로 작게 보이지만, 내용은 매우 큰 사건이었다! 

 

바울의 책망의 이유는 뭔가? 이방인 신도들까지도 죄인시하는 유대적 입장과 함께, 유대교도에게는 미치지 못한 이방인들이라는 차별의식을 갖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유대적 생활방식을 따르도록 강요한 셈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매우 큰 문제였다. 그런 인종적, 종교적, 지역적인 제반 차별을 없애고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모두를 하나 되게 하시려고 오신 예수와 그의 복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예수의 수제자요 예루살렘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게바의 행태에서 제기된 문제였기에, 바울은 더욱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베드로도 그것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그가 예수 진리의 편에 서기 보다는 예루살렘교회의 할례파 교우들의 이방인을 향한 집단화된 오랜 차별의식을 더 신경 썼기에 나온 기회주의적인 처신에서 나온 일이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절대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 행태를 묵과하면, 예수와 그의 십자가의 평화와 화해의 복음을 전파에는 치명적인 훼손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지도자의 그런 태도와 입장은 하늘 문을 닫는 위선적이고 위험한 걸림돌이었다. 복음과 교회는 이미 율법이나 할례를 넘어서 있었음을 베드로는 아직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 점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던 바울은 훨씬 더 자유롭고 진리의 본질에 서서, 이렇게 담대히 선포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 

 

결론이다

지금은 우리가 서야할 확실한 진리의 자리를 되찾아야할 기회이다. 바로 예수와 그의 삶을 선택하며, 그가 타신 배에 내가 확실히 승선(乘船)하는 일이다. 율법이나 그 어떤 계명이나 이념으로도 그를 넘어서거나 맞서려고 하면 안 된다. 상황이나 기회주의에 끌려다녀서도 안된다. 예수가 ‘우리의 왕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고백위에 다시 서야한다. 그런 시선과 마음이 흐려지면, 우리는 금방 탈선한다. 내 신앙은 내가 확실히 챙겨야한다. 저 오른편 강도의 자리가 우리의 자리가 되어야만 한다.! 구원과 부활은 그때부터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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