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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총회 순교자기념주일

관리자 2020-03-18 (수) 18:22 4년전 1613  

본문) 요 19: 1-16, 사59:1-3,9-20, 딤전 1:12-17 

 

코로나19의 공포가 이제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이제 온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특히 세계 일류를 자랑해 온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들도 더욱 당황해 한다. 다행히 우리는 처음부터 이 코로나와 가장 치열하게 싸워 온 바람에 지금은 다소 숨통이 터진 듯하지만, 그래도 학교 개학을 4월로 미룰 정도로 우리의 처지도 살얼음이다. 무엇보다도 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병)으로 세계 경제도 수렁에 빠져들어 염려가 크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온 지구촌이 두려움에 떨며 맞이한 사순절 넷째 주일인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순교자기념주일이기도 하다. 순교자는 누구인가?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 교회와 역사의 씨앗이요 밀알이 되신 분들이다. 그들로 인하여 이 역사와 교회의 생명이 이어왔기에,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며 그의 발자취를 이어받고자 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순교자는 누구인가? 역시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우리 구주 나사렛 예수님이시다. 오늘 주일은 순교자적 차원에서 예수를 다시 보게도 된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당하시는 일련의 고난들-, 즉 채찍질을 당하시고,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관(冠)이 씌워지며, 자색 옷을 입힌 채, 군인들로부터 숱한 조롱과 손찌검도 당하는 그 수치와 비통함으로 인한 탄식(歎息)에서, 우리는 지금의 우리 지구촌에게 내려진 팬데믹으로 인한 시련과 고통과도 생각을 함께하게 된다. 

 

예수의 십자가와 수난이 당시 세계의 정치-경제-종교-사회-문화 등의 온갖 세상의 모순을 해소할 기본적이고도 결정적인 답과 출구로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면, 이번 코로나 사태 역시 절대 우연의 해프닝이 아니라, 그 동안 인류가 이기주의와 탐욕으로 축적해온 모든 모순들의 바벨탑에 대한 저항(抵抗)이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무엇인가? 한겨레의 선임 기자인 곽노필은 이런 감염병 확산을 부르는 문명의 징표들로 다음의 네 가지로 분석했다. 바로 세계화-도시화-자연 파괴-기후변화 등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이 질주하는 현상들을 향한 급제동(制動)이었다! 재성찰하라는 경고이다. 즉 얽히려고만 하지 말고, 사회적 격리-자가 격리-비(非) 대면방식의 소통과 접촉들을 확대하며 살라는 요구이다. 그 바람에 지금의 세계는 여태껏 해보지 아니한 새로운 차원의 생존방식을 찾는다. 국가들은 국경까지 폐쇄하고, 사람들의 왕래도 제한하며, 학교 문도 닫고, 공공의 집회들도 최대한 자제하며, 개인 간에도 거리 두기에 들어갔다. 모임이 생명인 교회들도 예외가 아니다. 정규 집회를 접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일까지도 발생했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잇따르고 있다. ‘이래도 되는가’라고 할 정도로 낯선 삶의 변화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번 이 코로나 사태는 우리 세상과 인간들의 삶 전체, 그리고 사회와 교회에도 커다란 변화를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불안해하지는 말라. 우리가 이번 기회를 우리 삶의 질적 수준과 가치와 품격을 한층 새롭게 해 줄 기회가 되리라고 믿고 준비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확실한 모델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2000년 전, 격동과 모순이 소용돌이치는 세계의 한복판에 오셔서, 우리 인류에게 일찍이 진리와 구원의 참 세상과 길을 열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그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돕고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 주신 말씀들을 다시 보자. 특히 예수님의 고난에 대처하시는 모습과 마음에 집중하자. 주님은 당신에게 밀려오는 사나운 고난의 물결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 물결 넘어 전혀 새롭게 다가올 세상을 미리보고 계셨다. 무엇보다도 이 역사 변혁에 따라서 새롭게 열리게 될 모든 상황과 역사들, 새롭게 만나게 될 당신의 제자들과 백성들을 향하여 관심을 집중하셨다. 

 

그것은 당신이 전 역사의 중심이며 핵심이어서, 당신이 어떤 마음과 입장으로 세상과 인간들을 상대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의 운명과 결과가 결정되는 것을 잘 아셨기 때문이었다. 온 만물의 왕(王)되신 주님의 진정한 품격(品格)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다. 더욱 주목할 것은 이 점이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품격은 특히 당신의 원수들과 배신자들을 향한 연민(憐憫)과 베푸신 긍휼(矜恤)의 은혜(恩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였다. 

 

사실 세 본문들의 내용의 흐름은 매우 상반(相反)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최악의 비참한 죄상(罪狀)이 적나라하게 소개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께서 스스로 어떤 마음을 갖고 당신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길을 열어주셨는지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시 이 둘 중에 어떤 편을 보며 어떤 응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과 삶의 결과도 결정될 것이다. 

 

복음서를 보자

예수를 향한 빌라도의 마지막 심문(審問)의 하이라이트는,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증언을 청취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7-8절). 비록 이 증언은 빌라도가 예수 자신의 입을 통한 것이 아니라 그를 소송(訴訟)한 유대인들의 증언을 통하여 나온 것이었을지라도, 재판관인 빌라도에게는 그 부분이 매우 깊은 영적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그는 이 재판을 통하여, 자기의 심문을 받는 자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요(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8:37,19:7참조). 뜻하지 않게 자신이 너무도 무거운 재판을 한 것을 알았다. 

 

☞예수는 ‘왕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이 압축된 고백은 예수님 자신도 절대 고수하신 입장이었다(5:18,8:58-59,10:30-31,33,18:37참조). 따라서 이 고백과 선언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결국 두 부류의 인간들로 확연히 분리되게 되었다. 아니, 어찌 인간들 만이겠는가? 가정도, 사회도, 집단도, 나라도, 역사도 구별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그곳의 유대인들처럼 예수를 자기들의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알고, 그를 ‘십자가(十字架)에 못박으라’고 입에 거품을 품으며 증오에 가득 찬 함성을 토하는 무리들이 있는가하면(6절), 다른 하나는 저 시몬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고백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는 무리들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운명은 결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구분을 한 주장의 근거는 분명하다. 그 고백에 동참하는 이들은 로마 황제인 땅과 세속의 권력에가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에다가 일체의 소망을 두고 사는 존재임을 명백히 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우선권은 땅이 아니라 하늘이며, 순간이 아니라 영원이며, 육신이 아니라 영이며,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한 것에다 두고 사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였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살 길을 예수에다 두었기 때문이다(요3:16, 요일5:1-2참조). 

 

지금 빌라도는 인류의 메시아로서 진리의 왕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을 직접 대면하는 역사의 정점에 서있었다. 그 바람에 그도 역시 예수를 누구로 맞이하느냐에 따라서, 죄인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빌라도는 그런 절호의 기회를 끝내 외면하였다. 비록 심문에서 예수의 무죄성을 확인은 했으나, 미움과 증오의 권모술수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다(16절). 

 

성서는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 준 시간을 이렇게 전한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14절). 육시(時)란 언제인가? 우리 시간 낮12시 정오를 말한다. 그곳에는 유월절 어린 양을 잡기 위하여 성전에서의 준비를 끝낸 시간이다.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시려고(요1:29), 십자가에 넘겨지신 바로 그 때였다-!

 

대적자들이 보여준 마지막 비참한 모습이 유대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의 다음과 같은 외침에서 터져 나왔다.- ‘가이사(로마 황제)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5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기들의 오랫동안 고백해 온, ‘오직 우리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라는 신앙을 완전히 포기하고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즉 자기들은 이제 로마 백성이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을 밝히는 허무맹랑한 발언을 예수를 제거하는 시점에서 무책임하게 외친 것이었다. 일종의 막장 드라마를 연출한 셈이다. 그 책임과 죄 값은 이제 그들이 스스로 져야만 했다-! 바로, 나라 없는 2,000년 생활이 개막되기 직전이었다!

 

그 심판의 말씀이 빌라도 앞에 서 계셨던 예수님의 입에서 그 때 이렇게 선고(宣告)되었다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罪)는 더 크다’(11절)

 

구약을 보자

본문은 그 때, 역사의 가장 깊은 어둠이 소용돌이칠 그 순간의 세상이 어떠할 것인지 와, 그 때에 인류와 그의 백성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실 수 없었던 메시아의 대안을 찾으시는 마음을 전한다. 비록 상층(上層)에서는 죄악과 불의의 어둠의 먹구름이 너무 짙어서-, 한 치 앞을 헤아릴 수 없이 절망적이었으나, 그러나 그 어둠에 짓눌려 있던 하층(下層)에서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세상을 향한 도래를 애타게 기다리는 신음과 탄식의 호소도 있어서, 성부 하나님께서 그를 보고 듣고 계실 것을 예고했다(9-15절 참조).

 

그 때-,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에 죽임 당하던 때의 실상, 즉 악(惡)이 득세하고 그 불의한 힘에 의하여 의(義)가 무참히 짓밟힘을 당하게 될 현장에 대한 가슴 아픈 실상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압축(壓縮)하여 전한 것이다(12-15절 참조)- :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려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그러면, 메시아 자신이 찾아내신 대안이나 출구는 무엇이었나? 그 어떤 인간에게서의 자구책을 바랄 수 없음이 현실이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전능자 메시아 자신이 길을 만들어내시고 그 길 위에다 길 잃고 방황하는 그의 양무리를 이끌어 들이시는 은혜를 베푸는 일이었다. 바로 그 점에서, 메시아는 두 가지 측면의 새로운 구원의 길을 빛으로 마련해 주셨다. 

 

☞ 하나는 죄의 무게에 짓눌리고 그 유혹에 빠져 범죄하며 방황하는 인간들을, 그들 안의 죄의 바이러스 병원균으로부터 분리시켜서, 연약한 인간들을 건져내어 회복시키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그런 죄의 유혹과 장난에 놀아났던 죄인들과 배신자들을 다시 불러들여서 다시 재생(再生)된 인물로 거듭나서 살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구원의 방법들은 그 누구도 못할 오직 하나님이신 메시아 자신만 취하실 수 있는 은혜로운 방법들이었다. 우리는 이 방법들을 구약 후반부(16-20절)와 서신서 전체에서 각각 확인하게 된다.  

 

1) 하나님은 문제의 근본을 인간 자체에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죄에 있음을 보셨다. 즉 인간 내면에 있는 죄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를 완전히 가르는 주범으로 보신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 점을 일찍이 통찰하면서, 자신이 원하지 아니한 그것을 행하게 하는 자가 바로 자기 안의 있는 죄라고 고백한 이유이기도 하다(롬7:20참조). 인간으로서는 최대의 딜레마이기도 한 부분이다. 인간은 그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에 말이다. 

 

성부 하나님은 그 해결책으로 중재자요 구속자(救贖者)를 파송하셔서, 그의 백성들을 그 무거운 멍에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는 매우 특별한 은혜를 베 푸시게 하였다(16-20절). 이 구속자의 일은 당신의 백성들 안에 있는 내부의 적인 죄의 바이러스를 퇴치(退治)하여, 건강한 생명을 되찾아 세상을 구원하고 살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 구속자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금 빌라도 앞에서 끌려와 재판을 받는 나사렛 예수이시다! 그가 곧 죄의 킬러로 오신 이였다! 

 

서신서를 보자

2) 본 서신서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용서하는 주님, 결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과정과 동기도 함께 살펴서 균형 있게 판단하시는 주님, 알지 못하고 행한 일은 관용과 긍휼로 덮어주시고 용납해 주시는 주님을 만남으로서, 죄인의 괴수(魁首)에서 가장 충성된 복음의 전사요 교회의 일꾼으로 거듭난 경험을 한 사도 바울 자신의 뜨거운 증언을 담고 있다(12-15절). 

 

그는 흉악한 박해자였던 자기를 당신의 종으로 받아주신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자기를 앞세워 죄인들과 배신자들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의 행위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생생히 전하게 하여,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죄책감과 의심 속에 붙잡혀 사는 수많은 또 다른 죄인들까지도 돌아오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 때문임을 고백한다(15-16절). 만일 주님이 우리의 범죄에 대한 추궁과 책임만을 따지셨다면, 이 세상 그 누가 주님의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 베드로도, 바울도, 그리고 여러분과 나도, 그 아무도 없다. 오직 그의 긍휼이 우리를 살리셨다! 

 

결론이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도 이 죄악 된 세상과 백성들을 구원하실 당신이 되고자, 끊임없이 당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모든 고난의 멍에들을 홀로 지신 주님의 마음과 행위를 깊이 헤아려야하겠다. 우선 자기중심의 삶의 이기적 행태를 단호히 거부해야한다. 내 안의 죄악은 언제나 내 이기주의와 함께 있다. 

혼란스럽고 길이 안보일 때에는 순교자로 오셔서,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를 바라보며 그의 인도를 따르는 삶을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다시 나를 살피자. 내 안에는 그 누구를 향한 배타성이나 적개심이 있는가?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어서인가? 도대체 주님이 나의 무엇 때문에 날 이렇게까지 사랑하시는지를 되묻자. 그의 사랑과 공의와 긍휼에 눈을 뜨자. 내가 그의 긍휼의 은혜에 눈을 뜨는 순간, 빌라도 법정에 서계신 주님이 곧 내 주님이 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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