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7:20~26, 고전 12:12-31, 슥 14:5-11
주현절 둘째 주일이다. 우리 총회에서는 오늘을 여신도(女信徒)회 주일로 지킨다. 우리 교단 총회와 지(支)교회들은 신도들 자치 모임들인 3대 신도회들이 있다. 여신도회, 남신도회, 그리고 청년회가 그들이다. 이들 신도회들은 모든 지 교회들의 핵심 세력들이다. 이들이 바로 교회의 주축(主軸)들이고, 교회의 동력(動力)들이다. 이들이 살아야 교회가 사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오늘은 그 중에서 새해 첫 신도주일로서, 여신도회 주일을 맞이한다.
여신도들은 다른 신도들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동역자들로 세우시고 일하시는 대상들이다. 제자들이나 파수꾼들만 부르신 것은 아니다. 당신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세우도록 부르신 대상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 여신도회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계신지를 기억해야만 한다. 주님의 사랑과 기대를 받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여러분이 바로 주님의 미래(未來)요 기대(期待)이기 때문이다. 매우 중대한 소명(召命)이 부여된 것이다.
그러면 교회의 신도회가 주님의 그런 막중한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주님의 큰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만 받아내면 다 될까? 신도들 자신들은 놀고먹기만 하면 되는 건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잘 되는 곳과 실패하는 곳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잘 되는 곳은 하나님께 받아내서 잘 된 곳이고 잘못된 곳은 못 받아내서 잘못된 것도 아니다. 이런 태도는 끝내 하나님 원망만하고 끝나는 경우가 되고 만다.
뜻밖의 승패의 요인은 신도회의 자세에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손실(損失)이 없이 제대로 받아내려는 자세와 태도가 잘 되어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고 대처를 잘한 곳(신도회)은 반드시 승리하고 번창한다. 그들은 승패의 원인을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에게서 찾으려고 하면서, 철저히 깨어 대비하고 지내기에 잘 되는 것이다. 아무리 큰 그릇이라도 밑 빠진 독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늘의 소중한 것을 받으려면 태도부터 좋아야한다.
더욱이 신도회들은 그 자체 단위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전체가 갈라지거나 흩어지지 아니하고 하나가 되어야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곳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12명으로 이루어진 단체였다. 그들도 역시 무엇을 놓고 보아도 하나가 될 수 없었던 자들이었다. 개인적 특성이나 출신이나 역량이나 배경을 놓고 보아도, 하나가 된다는 것은 기적(奇蹟)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하나가 되기만 하면, 정말 크고 놀라운 일들을 해나갈 수 있잖을까-!
하나님 나라운동은 성격상 집단적이다! 개인만 잘되는 것으로는 절대 부족하다. 함께 잘 되는 것이 기본이다. 일치와 조화와 균형과 배려와 섬김 등이 필수(必須)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한 세계 구원의 성취 계획은 바로 제자들의 하나 됨에서만 첫 걸음을 내디 딛을 수 있었다. 당신이 아무리 잘하셨어도, 남은 제자들이 모래알 같이 흩어지면 결국 실패할 것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당신의 제자들은 절대로 하나가 되어야만 했다. 그런 주님의 마음은 세상을 떠나실 때가 가까이 오자 더욱 간절하고 절실했다.
주님의 최후의 기도는 그러기에 더욱 간절했다. 당신은 평소부터 제자들 훈련에서 낮아짐과 섬김의 도리와 가치를 숱하게 강조하셨으나, 정작 떠나실 때에는 이제 하늘 아버지에게 제자들이 서로 하나 되게 해달라는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릴 것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과 같이, 저들도 서로 하나가 되게 하소서’(22절). 어찌 보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마지막 승부(勝負)라고 볼 수 있는 일이 바로 제자들의 하나 됨에 있었다고 보인다.
그렇다. 오늘 신도주일을 맞이한 여신도회원들은 물론, 나머지 전체 신도들 모두도 예수님의 이 당신의 제자들을 향한 절박한 하나 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서로 하나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갈라지고 흩어지면, 마귀에게 기쁨을 주게 되면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 무기력한 집단이 될 뿐더러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된다. 실로 하나 됨의 간절함이 우리에겐 절대 필요하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우리가 어떻게 서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게 되느냐에 있다. 이를 위한 말씀의 지침이 매우 필요하다. 그 점에서 오늘 세 본문들은 모두가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한 기도와 그 내용들(복음서), 하나 됨의 당위성과 그 방법들(서신서), 그리고 하나 됨이 안겨주는 여러 가지 축복들(예언서)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다.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성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하나 됨이 성부 하나님께서도 개입하셔서 도와주셔야하고, 성령 하나님의 협력도 함께 하셔야할 정도(14:25-26,16:13-14참조)로 큰 과제임을 기도를 통하여 전하신 내용이다. 제자들이 서로 하나 됨은 스승의 명령 한마디로 되는 간단한 성격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보다는 하나 되기 위하여서는 안팎으로 필요한 다양한 요인들이 있음을 생각하시며, 그 일을 위하여 하늘 아버지에게 간구를 올리셨다.
1) 주의 제자들(백성들)의 하나 됨은 성격상 매우 영적(靈的)인 것이며 신령(神靈)한 것이다. 결코 인간적인 일이 아니다. 그 까닭은 제자들이 하나 됨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되면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세상 안에서 실현되지만, 그런데도 서로 하나 되는 일은 여전히 높은 산이다. 그것은 사단과 마귀는 목숨을 걸고 그 일을 좌절시키려고 총력을 다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라! 서로 하나 되는 일이 교회 선교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잖은가! 하나 됨은 실로 악령과의 싸움임을 잘 알고 임해야한다
2)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 제자들 하나 되는 일에 그토록 치열하게 기도하셨다. 특히 예수께서는 자신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주신 영광(榮光)이 있음을 밝히신다(22,24절). 그 영광은 아들이신 당신이 아버지와 언제나 하나 되어 사신 일이었다(21절). 그런 예수님은 이제 당신이 보유하신 그 영광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 연유는 제자들도 당신과 아버지가 서로 하나 되셨던 영광을 제자들도 서로 하나가 되어 누리게 하시고자 함이었다(23절).
3) 주님의 기도에는 제자들의 하나 됨을 위한 몇 가지 필요한 요인들이 들어 있다. 그 내용들은 모두 주님의 요청(要請)으로 하늘 아버지께 올려진 것들이다. 그것들이 무엇이었나?
① 저들이 스승 예수님이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임을 믿게 되어야 가능했다(21절).
② 저들이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들도 사랑하고 계심을 세상이 알게 되어야 가능했다(23절).
③ 저들도 하늘 아버지의 영광이 스승 예수님에게도 있음을 보게 되어야 가능했다(24절).
④ 저들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에게와 자신들 안에도 있음을 알아야 가능했다(26절).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제자들의 하나 됨이 그렇듯 매우 민감하여, 자칫 깨어지기 쉬운 유리그릇과 같이 취급되어야 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기에, 제자 가룟 유다가 배신의 잔을 마시고 그 제자들 그룹에서 떨어져 나아갔을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고 긴장되는 순간이었겠는가! 그러기에 주님의 마음은 남은 제자들의 하나 됨에 더욱 모아졌다고 본다. 이런 주님의 긴장된 마음이 모아져 드린 기도가 오늘 복음서 요17장의 기도였다.
오늘 교회의 신도들 그룹들의 사정은 어떠한가? 하나 됨이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하나면 서로 갈등과 대립으로 흩어져서 친(親)마귀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가? 대부분 속 앓이를 깊게 하고 있을 것이다. 서로 하나 되는 일이 매우 힘든 일임을 절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책이 필요하다. 먼저 그 원인을 주님의 심정으로 우리들 안에서 찾아보자. 그 점에서 고린도교회, 즉 내부 분열로 교회에 큰 고통과 염려를 주었던 그 교회를 다시 보자.
서신서를 보자
교회의 내부 분열과 갈등으로 진통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그 교회의 전직(前職) 목회자였던 사도 바울은 ‘한 몸과 다양한 지체들’의 생존 방법을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교회도 바로 그런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그들이 그 영적 교훈을 받아서 교회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기를 간절히 당부하고 있다.
교회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이들의 공동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체이다. 하지만 몸에는 그 안에 사지백체(四肢百體)와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들어있어서 그 몸을 생존하게 한다. 교회도 그리스도를 몸이자 머리로 두고, 그 속에 지체의 각 부분들로 채워져 있다. 바울은 그 대표적인 지체들을, 사도-선지자-교사-능력을 행하는 자-병 고치는 은사-서로 돕는 것-다스리는 것-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 등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27-28절). 이들은 서로가 다르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돌보고 협력하면서 하나가 되어 있다.
교회의 이러한 모습을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로 표현한다. 다양한 존재들이 예수와 그의 복음을 중심으로 하나 이다는 뜻이다. 실로 도저히 하나 되기 어려운 이들인데, 그럼에도 마음과 뜻을 하나로 모아서, 무엇인가 큰일들을 하나씩 해내는 모습은 가히 기적(奇績)이 아닐 수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력과 축복으로서 된 일들이 분명하다. 교회의 매력은 바로 다양성 속의 일치를 계속 추구하는 데 있다. 거룩한 힘은 바로 이것 속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교회 식구들이 이런 은혜로운 질서를 지키기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하나를 지적한다면, ‘나와의 다름’을 보는 눈(시각) 때문이다. 성숙하지 못한 이들은 대체로 이 다름을 접할 때, 그것을 ‘틀림’으로 보거나 ‘악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거부하거나 배척하거나 등을 돌려버린다. 그의 마음속에는 모두가 자기와 같아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아집(我執)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선인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면 자기와 다른 것을 건강하게는 볼 수 없을까?
나와의 다름을 선하고 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본질상 나란 존재는 받은 것이 거의 없다. 있어도 아주 적다. 그리고 전체 중에 극히 일부밖에 안 된다. 조물주께서 아예 처음부터 한 사람에게 다 주시기보다는,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평화하며 협력하고 상부상조하며 살아가야만할 이유이다. 이런 일만 잘하면, 적은 내 하나만 가지고도 남에게 있는 수많은 것들을 끌어내어 내 삶을 매우 풍성하게 살 수 있다. 나도 적은 것을 가지고서도 전체를 만드는 기여자도 된다.
그리고 각 사람이 소유한 것의 무게나 필요성을 두고,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져드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차별하고 배척하는 것은 더더욱 좋지 않다. 몸의 지체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몸을 지체들을 보라! 더 약하게 보이는 것이 더 요긴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은 정말 절대 차별이 없다. 오직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며 돌본다. 상대에게 오만하거나 교만을 떠는 지체도 없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모니로 아름다움을 이루는 게 내 몸이요 지체’이다(Beatifulness with Hamony-20-26절 참조). 교회는 그래야만 한다!
결국 교회 공동체가 하나 되려면, 서로 사랑하는 일이 마스터키(Master-key)이다(31절). 서로 사랑하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에, 상대를 부러워할 것도 없고, 내 것에 대한 열등의식에 빠져들 필요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것에 대한 긍지와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자긍심에서 당당해질 수 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중한 것에 대한 시각을 다시 점검하자. 절대 비교 문제로 자기와 자기 것의 소중함이 결코 무시당하는 일이 없게 하자.
구약을 보자
선지자 스가랴는 일찍이 여호와 하나님이 천하의 왕(王)이 되시는 세상이 올 것을 예고하였다. 그 날에는 오직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고 선포하였다(9절).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범죄로 인한 갖은 수난과 시련을 겪고 하나님에게 범했던 죄의 값을 치른 후에 펼쳐질 사건으로서, 하나님께서 승리자로 자신의 성읍에 들어가실 때에 이루어질 상황을 예고한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비로소 세계 역사(歷史)와 만민(萬民)의 주(主)로서 등장하실 일이 임할 것을 예고한 것이었다,
예언 성취의 규모는 느혜미야 시대 이후를 반영한 듯하지만(10절 참조), 그 새 역사의 흐름의 시작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사해)로 절반은 서해(지중해)로 흐를 것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둥근 판 같아서 당시에는 지구의 양쪽인 온 누리를 품는 세계(世界)란 표현이기도 하였다(8절). 즉 오시는 주님은 온 누리의 주님으로 권세를 잡으실 분으로 예고하였다.
☞ 이 예언은 결국 오신 예수께서 새 예루살렘의 왕으로 오시고, 세계교회의 주가 되심으로서 성취되었다. 그 분을 한 분 주님으로 모시고 섬기며 사는 사람들은 이런 예고된 축복도 있었음을 주목하자.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 리로다’(11절).
결론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이요 왕 되신 이로 모신 그의 백성들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할 일들이 많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여 하나 되어 사는 일이 절대 필수적이다. 서로 분란하고 미워하여 마귀에게 주도권을 넘기는 일이 생기면 결코 안 된다.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존중하며 화합과 일치를 배우고 익히자. 조화의 미(美)를 실현해가자. 주님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