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4:12~25, 행 4:1-4, 13-21, 겔 3:16-21
주현절(主顯節)절기가 시작되었다. ‘주현’(主顯/Epiphany)이란 말은 신(神)이 인간(人間)되어 당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현현했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주현절기에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성육(成肉/化肉)하신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 우리는 4 복음서(福音書)를 통하여 성자(聖子)이신 그 예수를 본격적으로 만난다. 동시에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죄인인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확인하면서, 그의 사람을 닮도록 훈련한다.
이번 주현절 셋째 해의 총 주제는 ‘당신의 일꾼들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로 보인다(마4:18-22). 그토록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상일을 당신의 충분한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홀로 처리하지 않고, 지극히 나약한 인간들을 택하셔서 함께 일하시는 기이한 모습을 선보이신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절대 점령자나 지배자가 아니라, 목자요 의사이시기 때문이다. 땅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치유하는 데에는 같은 인간들을 통하고 이루고 싶으셨던 것이다
본래 예수의 메시아 사역의 성격은 길 잃은 인간들에게 참된 삶의 길을 되찾게 해주고, 또 망가지고 무질서해진 세상을 건강한 세상으로 회복시켜 주고자 했던 사역이기에, 메시아 혼자만의 원맨쇼(One-man-show)의 과시적(誇示的) 행위로 선보이고 끝낼 일이 아니었다. 그 보다는 당신을 닮은 인간들을 통하여 세상 끝까지 지속해야만 할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기에 오늘의 절기 첫 주일에 주신 세 본문들도, ‘인간들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집중적으로 전한다.
복음서는 핵심 제자들 4명이 메시아 예수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 기원(起源)을 알린다. 서신서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바로 그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 승천 후 시작된 교회 시대에, 성령의 지원 속에서 사도(使徒)의 사역을 얼마나 책임 있게 감당하였는지를 전한다. 구약 예언서는 그런 성자와 성령의 제자들을 앞세워 일하시는 모습들이 기본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사역 방식인 파수꾼을 세워서 당신의 뜻을 펼치셨던 행위에 뿌리를 두었던 일이었음을 전한다.
오늘은 시작된 절기는 2월 말까지 일곱 주간 계속된다. 그러기에 오늘은 절기 시작 주일로서, 주현절 셋째 해의 전반적 개요를 미리 정리해 주려고 한다. 그것은 앞으로 매 주일 이어갈 세 본문 메시지들이 오늘의 이 첫 주일의 총론(總論)적 개요를 기반으로 하여, 상호 관련성과 상관성을 갖고 증언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오늘 복음서 본문에 올라와 있는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이 펼쳐졌던 당시의 몇 가지 선교적(宣敎的) 상황은 먼저 알아두는 게 좋겠다.
1) 예수의 등장은 그의 예비자였던 세례 요한의 체포(逮捕)당함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12절). 본래 예수를 위한 길잡이였던 세례 요한이 헤롯 왕의 비리를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이 시비가 되어 체포되자, 나사렛의 예수가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오르신 것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이 비로소 본격화(本格化)되었음과, 조연(助演)중심시대가 마감되고 주연(主演)중심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한다. 옛 예언의 시대가 성취되면서, 새로운 종말론적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2) 예수의 주요 활동무대는 팔레스틴의 북부지역인 갈릴리에 있는, 예수 고향인 나사렛이 아니라 해변 마을인 가버나움이었다(13절). 예수께서 좁은 나사렛보다 보다 넓은 무대인 해변 마을인 가버나움을 당신의 선교의 본거지로 삼으셨는데, 그것은 가버나움의 제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필요한 숙소 제공의 협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9:1,9:28,13:1,26 참조).
3) 그의 선교의 영향력의 범위는 스블론-납달리 지경의 해변 영역과 요단 강 건너편의 해변 마을들을 포함한 광범위한 영역이었다(13-15, 24-25절). 그곳은 본래 B.C 732에 북왕국 이스라엘 시절에 앗시리아에 끌려갔던 참혹한 시절을 경험한 곳이기도 했다(왕하15:25참조). 따라서 그곳에는 갈릴리의 히브리 본토인들뿐만 아니라, 수리아(시리아)를 비롯한 데가볼리 등의 이방인들도 광범위하게 혼재(混在)된 곳이었고, 심지어는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예수의 지역적 선택 의지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예고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였다(사9:1-2참조).
이런 선교지 선택에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예수의 메시아 사역, 즉 갈릴리 중심의 하나님 나라운동은 처음부터 기존의 유대 율법종교가 집요하게 고집해 온 예루살렘 성전 중심과 유대인-유대교 중심의 신앙운동을 벗어나, 민중들의 삶의 현장과 거리를 중심한 신앙운동을 추구하고, 그것도 탈(脫)유대인-범(凡)세계인 중심의 신앙운동을 기조로 삼았음을 말해준다. 즉 예수의 신앙운동, 생명운동은 처음부터 제한된 어느 특정 공간이나 대상이 아니라, 지구촌을 한 집이요 세계인을 한 가족으로 삼은 오이쿠메네(Ecumenical)적이었음을 말한다.
4) 예수의 그러한 메시아적 선교는 당시 절망적 인생에 빠져 살고 있었던 모든 백성들에게 마치 ‘흑암을 몰아내는 큰 빛 같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지내는 자들의 희망의 빛’이 되었다(16절). 예수의 선교의 주 메뉴들은 대략 다음의 세 가지였다. ① 회당을 무대로 가르치셨다 ② 천국 복음(福音)을 전파하셨다 ③ 백성들 속에 자리한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23절) 즉,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교육과 선포와 치유란 세 가지 형태로 시행된 것이다.
5) 하지만, 그 모든 구원사역 운동을 관통하게 하는 예수의 핵심 메시지는, 세례 요한의 선포를 이어 받았던, ‘회개(悔改)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마3:2,17절). 그것은 예수께서도 인간의 삶을 행복과 축복에서 저주와 지옥으로 떨어뜨리게 하는 핵심고리인 죄(罪)의 문제 해결 없이는 불가능함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며,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 나라란 최상의 가치 비전과 함께 선포됨으로서, 죄의 청산이 보다 가능해진다는 점을 확신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이 복음과 생명 운동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기존의 세상의 판을 둘로 구별 짓게 하였다. 빛(생명과 구원)의 사람들과 어둠(사망과 저주)의 사람들로, 하늘의 사람들과 땅의 사람들로, 구원 받게 된 사람들과 멸망당하게 된 사람들로 구별하기 시작했다.
6) 이와 같은 상황을 바탕으로 당신의 선교를 견인하시려는 예수께서는 그 일의 추진을 위하여 가장 결정적인 질서(시스템)를 하나 더 마련하셨다. 바로 당신과 함께 그 거룩한 운동을 더불어 견인해 갈 제자들을 선택하고 부르셔서 그의 동역자들로 세우시는 일이었다(18-22절). 이 제자 선택과 훈련시킨 일은 예수께서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우리신 일이었다.
12제자들이 예수의 구원 사역의 동역자들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이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숫자였다. 이스라엘에게서 12은 숫자상으로 완전 숫자이다. 신.구약 성서도 12숫자로 판을 깔고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야곱의 후손들 12명으로 전체 지파를 이룬 것처럼, 예수에게서 시작된 새 이스라엘도 12제자(사도)들로 밑받침되었음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12제자들을 택하신 후, 마치 부모들이 자기들이 낳은 아들들(후손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기대하며, 온갖 정성을 쏟았듯이 최선을 다하여 양육하셨다. 그 영향으로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셨지만, 그의 몸 된 ‘교회(敎會)의 시대(時代)’가 제자들을 통하여 활짝 열리면서, 전 인류 구원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복음서를 보자
본문에는 성자(聖子) 예수님이 당신의 거룩한 구원의 사역을 위하여, 첫 부름의 대상으로 택하신 4명의 제자들이 등장한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인 안드레, 다른 두 형제들인 세대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그의 형제인 요한이었다. 이들 4인은 모두가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잡이가 생업인 어부(漁夫)들이었다. 유대교나 세상의 기득권자들과는 아예 상관없이 이들로만 선택되었다.
1) 그들을 갈릴리 해변으로 찾아가신 이는 예수님이었다. 그들은 당시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는데-, 주님이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9절).
☞ 예수의 이런 유형의 제자 선택하심은, 당시 유대교의 전통과는 아주 달랐다. 유대교에서는 배울 사람이 스승을 직접 찾아가서 배우게 해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치 그의 하늘 아버지가 소년 다윗을 보시고 첫 눈에 선택하신 것과 같았다(삼상16:1 참조).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즉시 자기 사람들을 알아차리셨던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
2)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20절). 그들이 그 직전까지도 매달려 있던 일들을 버리고 그 부르심에 따른 것이다. 베드로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10:28참조). 그들은 그런 결단을 내리는 데, 숙고(熟考)를 했거나 어려움을 느꼈거나 한 흔적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즉시 주님의 부름에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3)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단호하게 결단을 하였을까? 바로 이 말씀이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어부는 어부인데, ‘인간을 낚는(구원해내는) 어부가 되리라’는 점이다. 눅5:10에서는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다. 이로써 예수님은 렘16:16의 심판 선고를 구원의 말씀으로 바꾸신 것이다. 사도들이 미래에 어떠한 일들이 수행할 것인지를 예고하신 내용이었다. 인간을 구원해내는 새 차원의 어부로서의 무대에 그들이 첫 응답자로 오른 것이다.
4) 주님은 좀 더 가시다가, 또 다른 어부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고 그들도 부르셨다. 그들은 그 때 아비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다가,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21절). 결과는 어땠나? 그들 역시 즉시 응답하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 그들이 버린 것들은 놀랍다. 배와 아버지 모두를 버려두고 떠난 것이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하셨던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난 아브라함의 모습을 그들 4명의 형제 그룹들이 보여 준 것이다. 그들 자신의 미래를 온통 그들을 부르신 예수와 그를 향한 믿음에다 전적으로 내 맡긴 것이다. 신앙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행동으로 보여줬다!
서신서를 보자
메시아 예수가 지상 사역을 마치고 본향인 하늘로 떠나시면서 열리게 된, ‘예수 이후의 시대’(Post-Jesus Era)가 누구에 의하여 계승되었는지를 전하는 내용이다. 누구였나? 바로 성자 예수님과 그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택하여 세우신 제자들이 그들이었다! 앞에서 선택 받았던 두 형제 그룹들 중에서 각각 한 명씩인, 베드로와 요한이 그 역사의 무대를 이끌었다.
1) 그들의 상대는 스승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던 바로 그 주역들이었다(1절). 예수는 오로지 그들이 가한 온갖 저주와 수모를 홀로 다 받고 죽임을 당하셨으나, 지금의 제자들인 사도들에게는 남자만으로도 약 5,000명이 넘는 믿는 자들이 그들을 응원하고 있었다(4절).
2) 나사렛 예수는 결국 당하고만 끝나지 않았다. 몇 일전,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그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면서, 삽시간에 죽임 당했던 예수가 이제는 온 예루살렘의 구세주가 되셨음을 믿는 이들로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당국자들은 긴급으로 사도들을 체포하고, 억압하며 위협하였으나, 그럴수록 초라해지는 것은 박해자들 자신이었다(13-16절 참조). 그들은 사도들에게 진실에서 밀렸고, 위세에서도 밀렸으며, 명분에서도 밀렸다. 이미 끝난 싸움을 마무리하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다(17-18, 21절 참조).
3) 사도들의 이러한 저항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나? 바로 스승 예수가 부여하신 소명(召命)의식 때문이었다. 그들은 당국자들의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절)고 강요를 하자, 이렇게 맞섰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19-20절). 그들에게는 이미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힘, 세상의 판을 뒤바꿀 힘이 와 있었던 것이다.
구약을 보자
본문은 부르신 자를 당신의 파수꾼으로 세워, 그로 하여금 위의 사도들처럼 목숨을 걸고 보내신 이의 뜻과 명령을 수행하도록 맨 처음 질서를 잡으신 이는 성자 예수와 성령이 아니라, 그의 하늘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이셨다는 점을 전하는 내용이다(16-17절). 여호와는 일찍이 에스겔을 당신의 파수꾼으로 세우시면서, 매우 무거운 책임의식을 가지고 일하게 하셨다.
파수꾼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를 대신하여 백성들을 깨우친다. 파수꾼에게는 피할 길이 없었다. 오직 악인이든 의인이든 다 깨우쳐서(19,21절), 그들의 살 길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들이 게으르거나 무책임하여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오로지 파수꾼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파수꾼의 책임의식과 소명의식에는 자기 핏 값이 담보(擔保)되어 있기도 하다.
결론이다
그렇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 즉 제자나 파수꾼이나 일꾼이나 청지기로 선택 받은 일은 정말 무한 영광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듣는 청중들에게 천국과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가게도 할 권세가 부여되어 있다. 그러기에 제자 된 이들은 목숨을 걸고 사명을 수행해야할 위치에 있음을 잊지 말고, 오직 부르신 이에게 충성해야만 할 존재임을 명심해야 한다. 사도들처럼 사명수행을 위해 목숨을 걸면 모두를 살린다. 부실하면 자신과 모두를 죽게 한다. 이제 대답하자. 주현절 인간과 함께 일하시려고 나를 택하신 주님께 나는 어떻게 응답할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