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2:13~23, 호 11:1-4, 8-9, 고전 1:26-31
오늘은 성탄 후 첫째 주일이면서, 2019년 한 해를 마감하는 송년(送年)주일이다. 그래서 우선 축하와 위로(慰勞)의 말씀을 드린다. 한 해 동안 살아오시느라고 얼마나 수고 많으셨는가? 남에게 말 못할 곤고한 순간순간들이 많았을 터인데-, 그래도 이렇게라도 건강한 모습으로 한 해를 마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따라서 이번에는 위로하고 축복해보자. 그 대상은 ‘너’가 아니라, 살아남은 ‘나’ 자신이다!
그런데, 잠시 묵상(默想)해보자. 삶이란 것이 본래부터 내가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인생을 말할 때, B에서 시작하여 D로 끝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B는 탄생과 시작을 말하는 Birth이고, D는 죽음과 마지막을 말하는 Death이다. 그런데, B에서 D로 끝나는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판가름은 그 사이에 들어있는 C에 의하여, 판가름 난다는 것이다. 그 문제의 C는 무엇일까? 바로 ‘선택(選擇)’을 말하는 Choice이다. 그렇다. 우리의 주어진 인생(人生)은 삶이 마감될 때까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B와 D는 확실히 내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이며 내 선택권 밖의 일들이다. 한마디로 신(神)의 영역이다. 생각해 보라. 내가 이 세상(이 나라, 이 집안, 이곳, 이 시대)에 와서 살게 된 모든 것도 내 선택이나 뜻에 의하지 않았다. 또한 머잖아 내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도 그럴 것이다. 내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날 이곳으로 보내신 이가 결정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전능자가 시키는 대로 쫓아만 사는 기계적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주어진 삶의 내용과 방향을 선택(選擇)하고 결단(決斷)하며 사는 일은, 전적으로 인간인 내 몫이다. 결코 신(神)이 내 삶을 살아주지 않는다! 다만 유의할 것이 있다. 그 선택에 따라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책임(責任)은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 문제는, 신이 묶어 주신 옵션(페키지)이다! 신이 우리에게 삶의 책임을 묻겠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삶이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는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일찍이 모세의 설교를 통하여 이런 생명의 지침이 될 말씀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 “보라 내가 오늘 생명(生命)과 사망(死亡)과 복(福)과 저주(咀呪)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을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이시니”(신30:19-20 참조)
이 말씀에서 우리는 내 주어진 삶에도 엄연한 길(Way)이 있음을 본다. 행복한 삶에도 길이 있고, 저주받을 삶에도 길이 있다. 어느 길을 선택하여 가느냐는 것은 오직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으나, 그 책임(責任)만은 반드시 져야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시선(視線)을 어디에다 두고 살건가?
이제 분명히 말씀을 드려야 하겠다. 내 행(幸), 불행(不幸)의 근거는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 없느냐’에서 찾아야만 한다. ‘내가 주님의 말씀과 뜻을 좇아 살아왔느냐’에서 찾아야만 한다.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환경만 놓고, 내 인생의 행. 불행을 논하는 일은 매우 좁은 판단일 뿐이다. 주님 없는 부요(富饒)는 나에게 죄를 짓게 할 독이요 흉기일 뿐이다. 하지만, 주님 있는 가난이나 고난이나 시련은 나의 다음(NEXT)을 위한 큰 연단이요 훈련이기에 축복이기도 하다.
그렇다. 내 인생은 창조주 아버지의 손 안에 있다. 그 분의 계획과 기대와 사랑과 섭리 속에 있다.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날 보내신 그 분의 뜻이나 사랑과 더불어 살아야만, 나는 부여된 생을 복되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 천부의 질서를 순복(順服)하는 이들은 복을 받는다. 하지만 거역(拒逆)하는 자들은 마귀 외에는 도울 자가 없기에 결국 저주를 받는다.
오늘 세 본문 말씀들은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연유로 세상의 생명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돌보시고 살려내시고 계신 지를 다양하게 소개한다. 세 가지 종류의 타입(type)들이 올라와 있다. 절대 포기할 수 없어서 살리시는 경우,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살아서 다시 한 번 최후의 기회를 주시고자 살리시는 경우, 그리고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입증하게 하시려고 살리신 경우들이다. 이 내용을 통하여 지금까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깊숙한 구원의 손길이 어디에 있는 지를 확인하여 보자.
복음서를 보자
먼저 하나님께서는 절대 살려내야 할 인물은 끝까지 책임 있게 돌보셔서 살려내시는 분이심을 전한다. 그 대상이 누군가? 바로 아기 예수이시다!
하지만 이 아기는 비록 절대자의 아들이셨으나, 현실은 아무런 힘이 없는 아기일 뿐이었다. 젊은 부모 역시 가난하고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어둠의 절대 권세인 헤롯왕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부모였다. 결국 아기도 부모도 모두가 절대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이들이었다. 바로 그 해결의 몫을 하늘 아버지가 떠맡으셨다.
당시의 유대 왕인 헤롯은 동방에서 그를 방문한 박사들을 맞이하면서, 큰 충격에 빠져있었다. 박사들은 현재의 왕인 헤롯 앞에서 다른 왕의 탄생 소식을 전하였기 때문이다(2:1참조). 결국 헤롯은 베들레헴이란 장소 정보를 제공하면서(2:5-6절) 그들이 아기 메시아를 찾아가 먼저 경배한 후에, 돌아갈 때에는 자기에게 꼭 보고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 후에 아기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 헤롯의 그러한 살해(殺害)시도는 무산되고 만다. 하나님이 파송한 주의 사자(使者)가 현몽(dream/꿈)으로 찾아와서 아기의 피난(避難)을 급하게 명령(命令)하였기 때문이었다. 첫째는 동방박사들 당사자에게 하였고(12절), 다음은 아기 부친인 요셉에게까지 하였다(13절).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 구원을 위하여 당신이 일찍이 예언하셨던 대로 보내셨던 메시아를, 반드시 살려내기 위하셨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두 가지 사건이 잇따랐다.
하나는 아기 예수 가족들이 애굽으로 긴급 피난길에 오른 일이다. 그래서 그 헤롯이 죽고 그 아들인아켈라오가 유대 임금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유대로 돌아와서, 북부 나사렛 동네의 사람으로 지상생활에 들어가게 된다(19-23절). 그 때에도 주의 사자(使者)가 인도하셨다. 이 일은 오신 메시아가 자기 땅과 백성들에게서는 시종, ‘낯선 인물로 사셨던 분’임을 보여 주신 모습이었다.
또 하나는, 헤롯이 빼든 살해의 칼날로,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이 대량 학살당하는 사건으로 번졌다(16-18절). 그 바람에 자식을 빼앗긴 엄마들인 라헬의 통곡이 그 땅을 뒤덮는 가슴 아픈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렘31:15참조). 예수 탄생이 가져 온 희생양들인 첫 순교자(殉敎者)들이 그곳 베들레헴에서 등장했던 것이다.
☞ 이런 메시아 아기 예수를 살리기 위한 피난에 따른 참극(慘劇)의 상황은, 구약 출애굽 때의 모세의 탄생 시에 있었던 사태와도 절묘(絶妙)하게 맞물려 있음을 본다. 그 때는 애굽의 바로가 히브리백성의 번성에 위협을 느끼고, 히브리인의 사내 아기들을 태어난 순간에 즉시 죽이도록, 산파들에게 특별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났으나, 하나님은 당신을 두려워하는 히브리 산파들을 통하여 아기 모세를 살려내셨던 것이다(출1:15-22절 참조).
그렇다. 율법(律法)을 이스라엘에게 가져다 준 모세, 복음(福音)을 온 세계에다 안겨다 줄 예수, 이 두분들은 생명과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으로서도 어떤 경우에도 살리고 보전해야만 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어깨에는 인류의 운명과 구원의 멍에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런 분들은 반드시 위기로부터 하나님께서 살리신다. 이런 경우는 매우 특별한 인물들에게 집중된 사례이다.
구약을 보자
이 본문은, 나라 전체가 앗수르 제국에 망하게 된 북 왕국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호와가 마지막 애정을 담아 전하셨던 예언의 말씀이다. 말씀을 받는 그들 이스라엘의 당시의 처지는 어떤가?
그들의 출생과 성장의 역사와 관계를 생각하면, 버리기에는 여러 모로 안타까운 신분과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변절과 배신의 생활에 빠져들어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즉 이전에는 무척 좋았으나, 지금은 매우 악화된 존재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기에 고민하신 하나님의 선택(選擇)은 이러하였다. ‘최종 버리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돌이킬 기회를 주자’.
☞ 1-4절까지는, 하나님이 그들을 지금까지 얼마나 사랑하며 돌보아 주셨는지를 알리고, 동시에 그럼에도 그들이 얼마나 그런 여호와를 배신하며 살고 있는 지를 입체적으로 상기시키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그들을 향한 해방의 손길은 마치, 아기 예수를 헤롯의 마수에서 빼어내듯이, 하셨음을 상기시킨다(마2:15,출4:22-23,신32:6참조). 진정 그들을 자식처럼 기르시고 양육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호와의 사랑을 저버리고, 바알 신등 우상숭배의 늪에 빠져, 배신하고 말았다.
☞ 8-9절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전한다. 그들 이스라엘의 현재 처지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에 버금할 아드마와 스보임 같았다(신29:21-22 참조). 그들은 즉시 징벌을 받아 사라져야 마땅할 처지였다. 그런데도 여호와의 징벌하려는 손길을 막는 것은, 놀랍게도 여호와 자신이 품고 계신 그들을 향하신 긍휼(矜恤/compassion)이다. 뜨겁게 솟아나는 그 분의 애정과 긍휼이 배신자 이스라엘의 징벌을 가로막으며, 다시 한 번 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고 막고 있었다.
☞ 나의 처지도 성찰해보자. 과거는 좋았으나 지금은 엉망이지는 아니한가? 엉망인데도, 이렇게 저주의 자리가 아니라 무탈하게 송년하게 된 것은 왠 까닭이라고 보이나? 내가 정당해서 그런가, 아니면 하나님의 무한하게 참고 기다리시며, 다시 한 번 잘해 보도록 기회를 부여하셨기 때문인가? 자만이나 오만해서는 안 된다. 분별을 잘해야만 한다. ‘왜 이 쓸데없는 자에게 은혜를 주셨겠는가?’
서신서를 보자
고린도교회 신도들은 자기 자랑이 많은 자들이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편싸움이 심했다. 그래서 받은 것과 역량들이 많았으나, 하나가 되지 못하여 서로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무익(無益)한 공동체였다. 하나님과 그의 교역자들에게는, 이렇게 자기 자랑이 강한 이들이 매우 골치 덩어리들이었다. 그러면 그런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메시지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인물들은 과연 어떤 인물인지를 일깨워 주는 메시지였다. 그것은 약한 자, 미련한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 없어서 가난한 자를 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잘되게 하므로서-, 상대적 위치에 있는 강한 자, 잘난 자, 높은 자, 존귀한 자, 부요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메시지였다. 그래서 그 낮은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무한하신 공의와 사랑을 증거 하게 하심을 전했다(26-28, 30절).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인간들도 자기와 자기의 것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게 하신다(29절). 다만 내게 자랑할 것은 있다면, 무엇인가? 나와 함께 하신 주님과 그가 베푼 은혜만을 자랑하면 된다(31절). 나의 모든 가진 것들이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서 받게 된 것들 뿐인데, 어찌 나와 내 것을 자랑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자기 자랑에 빠진 자가 아니라, 받은 것을 주의 영광을 위하여 내어 놓고 사용할 줄 아는 겸손한 자들을 사랑하신다.
올해도 여러분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필요를 위하여, 여러분이 주께로부터 받은 재능과 은사와 재물들을 주의 공동체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내어 놓았고 사용해왔다. 그것을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하라. 마치 빼앗기거나 손해 본 것처럼 생각하면 절대 복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더 드리고 싶은 새해가 되게 기도하시라!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생존하게 하신 이유가 여러분의 그런 아름다운 응답의 삶을 앞으로도 더 기대하기 때문임을 기억하시라
결론이다
☞ 송년주일에 다시 묻는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까지 이토록 생존하게 하셨다고 보시는가?
그 이유를 찾아보자. 오늘 주신 세 본문 말씀에서, 여러분을 생존하게 하신 하나님의 이유를 찾으셨는가? 어떤 경우가 자신의 것처럼 들렸는가?
내 생존은 아기 예수나 모세처럼 꼭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여야할 이유 때문이었나, 아니면 저 배신자 이스라엘처럼 죽어 마땅하지만, 그러나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님으로부터 부여 받았다고 보기 때문인가, 아니면 나의 가진 것들인 소유와 은사와 존재로 하나님의 영광을 겸손하게 드러낼 도구로 살아왔기에, 그런 삶을 앞으로도 중단 없이 계속해서 살라고 다시금 허락된 삶이기 때문인가? 이 셋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깊이 묵상하며 내 생존의 이유를 찾는 귀한 연말이 되게 하자. 주님의 기쁨과 평화를 축원한다.
<보조자료.1>
- You raise me up
- 브렌던 그레엄(Brendan Graham).사 /
롤프 뢰불란(Rolf Lovland). 편곡(씨크릿 가든의) 2002년부터 부르기 시작.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내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
괴로움이 밀려와 내 마음을 무겁게 할 때
당신이 내 옆에 와 앉으실 때까지
나는 여기에서 고요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이 나를 일으켜주시기에, 나는 산 위에 우뚝 설 수 있고
당신이 나를 일으켜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으며
당신이 나를 떠받쳐 주시므로, 나는 강해집니다.
당신은 나를 일으켜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하십니다
( 4번 반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