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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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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11-24 (일) 14:41 4년전 1725  

본문) 단 3:13-28, 마 10:16-33, 계 18:21-24 

 

오늘부터 세계 교회는 대림절기(待臨節期)(Advent Season)에 들어간다. 구세주 예수의 이 세상 오심을 고대하고 사모하면서, 그를 맞이할 준비에 들어간다. 한마디로 기다림의 기간이다. 그 기간은 4주간이다. 4주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과 자세로 메시아의 오심을 맞이하려고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아니겠는가! 

 

분명히 해둘 일이 있다. 성서의 백성들은 모두 기다림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 모두는 간절함과 절심함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다. 자신과 시대에 주어진 비참한 현실과 억울한 상황을 가슴 아파하고 저항(抵抗)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게 하실 분으로서의 구세주를 그렇게 고대한 것이다. 마치 지금 우리 민족이 분단 70년의 아픔을 극복하고 어서 평화로 하나 된 조국 한반도(韓半島)를 고대하듯, 성서의 백성들은 아주 오랫동안 제국의 압박에서 벗어난 평화의 세상을 그리면서 그 해방자로서의 메시아를 고대하며 기다렸다. 

 

이스라엘의 수모는 B.C 722년, 그들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제국의 노리게 감으로 나라의 운명이 전락(顚落)했던 것이다. 아수르 제국으로, 메데와 바벨론 제국으로, 바사(페르시아)제국으로, 헬라제국으로, 그리고 로마제국으로 이어지는 무자비한 통치의 쇠사슬에서 그들은 신음했고 고통하였다. 그러니 그곳의 백성들의 탄식(歎息)이 얼마나 깊었겠는가! 메시아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懇切)했겠는가! 그 모습이 성경에는 절절이 담겨져 있다. 

 

예수의 오심, 곧 하나님의 응답은 그 기다림과 간절함의 기도가 정점(頂点)에 다다랐을 때였다. 마치 퍼팩트스톰(Perfact Storm) 처럼 말이다. 오신 예수를 성서의 기자들은 ‘모퉁이 머릿돌’이라고 칭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오심으로 세상의 판(板)이 완전히 새롭게 바뀌게 된 것을 말한 것이다. 지배자 중심에서 백성 중심으로, 강자 중심에서 약자 중심으로,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세상의 판이 대대적인 개편(改編)을 하게 된 때가 임한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인류사가 경험한 최대의 지각변동(地殼變動)이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였다! 

 

성탄이 그토록 인류사적으로 큰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일들이 많았다. 페르시아의 조르아스터교의 제사장들이었던 동방박사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 팔레스틴의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에까지 순례하면서 구유에 오신 예수를 찾아 경배한 것이다(마2장). 하늘의 천사들도 찬양을 드렸고, 밑바닥 사람들도 평화를 노래하는 일에 입을 열었다. 세례자 요한이 주의 전위대로서 보냄을 받았고(1장), 예루살렘 성전을 평생 지키던 노인들인 시므온과 안나도 아기 예수를 보고 큰 기쁨의 고백을 표하기도 했다(눅2장), 

 

성탄은 잘 기다린 이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안겨 주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오순절 성령강림의 일차적 수혜자들인 유대인 디아스포라들 역시 오실 메시아를 향한 깊은 기다림을 가슴에 간직했던 인물들이었다(행2장 참조). 따라서 우리의 이번 대림절기를 제대로 맞이하기 위하여서는, ‘나는 무엇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는가’에 대한 자문자답이 선행되어야할 것이다. 우리의 주님은 당신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구세주가 되시고 도움이 되시지, 당신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자들에게 당신을 들이미는 식의 강제하는 주님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기다림이 깊은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단순하고 진지하다. 그리고 목표에 집중한다. 결코 이중적이지 않다. 목표가 확실하며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그 성취를 위하여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던진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당신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택하여 일하신다. 그런 자들을 오늘 세 본문들이 잘 보여준다. 

 

구약을 보자

다니엘서에 나타난 본문의 주인공들은 이스라엘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다. 이들은 나라가 바벨론에 망하자 다니엘과 같이 포로로 끌려온 자들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은 옛 조상 요셉에 버금하는 탁월한 꿈 해몽가(解夢家)였다. 대왕 느브갓네살이 꾼 제국의 미래에 대한 불길한 꿈을 놓고, 오직 이방인인 다니엘만이 탁월하게 해석했다. 왕의 신뢰를 얻은 다니엘의 추천에 의하여, 그들 세 명은 바벨론 지방의 고위직을 맡아 총애 속에서 일하였다(단2장 참조)

 

1) 큰 위기가 발생했다. 왕과 세 친구들 사이에 피차 돌이킬 수 없는 마찰이 일어난 것이다. 나라가 세운 왕의 신상(神像)앞에서는 악기 소리와 함께 모든 백성이 절해야만 되는 나라의 법률 앞에서, 이 세 사람은 자신의 신앙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한 것이다(3:1-12). 이에 분노한 왕은 그들 세 사람을 불러 특별히 최후로 돌이킬 기회를 주면서, ‘끝내 거부하면 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질 터인데, 거기서 건져낼 신이 없으리라’는 말로 협박하였다(13-16절). 

 

2)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예상을 깨고, 아주 냉정히 대응하였다.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그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거나 왕의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라며 통고하고 말았다(16-18절).

☞ 이들은 자기들이 ‘식민(植民) 백성’이라고 해서, 왕이 자신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까지 얕잡아 보고 그 능력을 모독하는 일에 결코 묵과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여호와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여호와는 이곳의 우상들과는 달리, 참 살아계시고, 온 세상의 지배자이시며,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함께 하시고 책임지어 주신다’는 분명한 믿음 때문이었다. 왕에 향한 그 당당함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왕과의 힘 겨누기 차원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으로 보았고, 그러기에 더욱 물러날 수 없는 자신들임을 그들 모두에게 입증해주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성령이 믿음으로 대응하는 그들에게 함께 하셨음이 분명하다(마10:20). 

 

3) 왕의 분노가 극에 달았다. 그래서 ‘풀무불을 7배로 뜨겁게 해서 저들을 그 속에 던져라’고 특명을 내렸다. 그 바람에 그들은 결박된 체 맹렬한 풀무불에 던져졌다. 그 불길이 어느 정도였나? 너무 뜨거워서, 그들을 그곳에 데리고 간 사람이 태워 사를 정도였다(19-23절). 

 

4) 대 반전(反轉)이 발생했다. 왕이 깜짝 놀라 외쳤다. 왕의 눈에 풀무불 속에 인물들이 셋이 아니라, 자유롭게 움직이는 네 사람이었고, 그것도 불 가운데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넷째의 모양은 셋과는 달리 신(神)의 아들과 같은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24-25절).  

 

5) 놀란 왕이 급히 풀무불 쪽 아귀까지 나아가 그들 셋의 이름을 부르면 ‘나아와 이리로 오라’고 외쳤다. 그들이 왕의 호출로 밖으로 나오자, 그곳에 모였던 최고위 관리들 모두가 다 모여서 그들 셋의 모습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는 그 격렬히 뜨거웠던 불이 그들의 몸과 머리털과 겉옷까지도 전혀 해하지 못하였고, 당연히 그들에게는 일체 불 탄 냄새도 없었다. 실로 이 세상 현장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그러기에 오직 천상(天上)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신비와 기적의 실상을 멀쩡하게 살아나온(마치 부활체처럼) 그들에게서 확인하게 된 것이다(26-27절).  

 

6) 이 사건의 최종 정리는 바로 가해자였던 제국의 대왕인 느부갓네살이 해 주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다’(28절). 상상할 수 없는 신앙고백에 제국의 왕에게서 터져 나왔다-!

 

☞ 이 세 사람들의 생존(生存)기사는 적어도 세 가지 뚜렷한 메시지를 제공한다. 

① 그들을 그 풀무불 속에서 살려내고 머리털 하나 상함이 없이 완전한 모습으로 구원해낸 그 신적 존재는, 바로 오실 메시아(그리스도/고엘)를 예표(豫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죽음의 불길 속에서도 전혀 자유로운 존재(!)임을 엿보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분이 바로 이 세상에 오실 분 아닐까 싶다!

 

② 그런 시련을 믿음으로 맞서게 될 때, 바로 그곳 그 시점에 하나님의 개입이 이루어지면서, 주변의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참 신이심과 전능하심을 입증(立證)하게 하신다는 점이다. 즉 믿음의 대응이 전혀 없는 곳이 아니라 믿음의 신실한 대응이 나타나는 곳에서만,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와 개입이 나타나고 있음을 말하여 준다.  

 

③ 죽음 너머의 세계에서까지도 하나님의 영접과 돌봄을 받을 대상이 분명히 들어났다. 바로 여호와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자신들의 행동으로 보여 준 이들이다. 값비싼 영생의 은혜는 값싼 믿음의 소유자들에게는 부여될 수 없다는 것이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런 신비하고 놀라운 하늘의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그런 이를 우리도 해방자로서 기다리고 있잖은가!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제자 파송에서, 당신의 종들이 당할 박해와 그 대응할 입장에 대하여 내려주신 지침이다. 이 내용을 보면,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모두가 앞서 다니엘서에서 소개된 사드락-메삭-아벳느고와 같은 처지를 면치 못함을 예고한다. 그럼에도 구원은 그런 시련을 끝까지 견디는 자의 몫임을 말씀한다(22절). 

 

1) 그들 처지는 이리 가운데에 보냄 받은 양들과 같다. 그러기에 세상을 이겨내려면, 지혜와 순결이 필수적이다. 세상 방식으로는 백전백패일 뿐이다. 양 주변에는 이리가 항상 득실거린다. 하늘의 복음과 진리를 들으면 항상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 자들이 반격(反擊)을 가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이유나 정치적 이유들로 박해를 한다. 특히 동종 종교인들에 의해 체포되고 끌려가 관가나 회당에서 채찍질을 당한다(1-2절). 세상 관리들에게도 끌려 나아간다(18절). 그 뿐 아니다. 심지어 친(親)가족들로부터의 배척과 미움과 공격등도 피할 수 없게 된다(21절). 

 

2) 그 때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의연한 태도와 입장이 참고할 좋은 모범이다. 그들은 대왕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할 말에 대한 염려와 갈등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들 속에서 항상 동행하시고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聖靈)께서 할 말을 하게 해 주시기 때문이었다(단3:16-18). 사도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고, 그 역사가 위대하였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행4:5-21 참조). 

 

3) 복음을 위한 전사(戰士)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영적 시각과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 자신이 아무리 큰 고난을 당해도, 주님이 당하신 비난이나 십자가 고난만큼 심할 수는 없음  을 알고, 끝까지 참고 견디어야만 한다(24-26절 참조). 거기에 구원에 있기 때문이다(22절). 

- 결코 가해자나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두려워할 가치가 없는 자에게 두려워하면 패배하는 것이다. 그들은 몸을 죽일 수는 있어도, 영혼(靈魂)까지는 손댈 수 없는 자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은 오직 몸과 영혼 모두를 심판하실 주님뿐이다(26-28절). 

- 우리의 가치(價値)를 절대 긍정하여야 한다! 우리는 참새와 같은 미생물들과 같지 않다. 조물주에 의하여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된 소중한 존재들이다. 감사하며 두려워 말자(29-31절). 

 

4) 제자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제국의 왕 앞에서 여호와를 시인하였던 것처럼(단3:16-18절), 모든 사람들 앞에서 메시아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是認)하느냐 부인(否認)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32-33절, 막8:38, 눅12:8-9참조). 바로 그 부분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늘 아버지의 최대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아들이 인정되는 곳에 아버지도 계시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하자. 나의 믿음은 주님을 어디까지 인정하나?

 

5) ‘또 하나의 약속(約束)’이 있었다. 초대교회가 66-70년에 빚어진 이스라엘 대재난으로 보이는 종말적 사건 이전에,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23절). 이 예고는 예수의 오심으로 적중되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말씀을 우리를 향한 것으로 받고 있다! 

 

서신서를 보자

본문의 내용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고 박해했던 바벨론(로마)제국의 패망을 예고하면서, 그럼에도 하나님이 기억하신바 된 존재들이 누구인지를 밝혀 준 계시의 말씀이다. 

 

1) 한 힘 센 천사의 등장으로 큰 성 바벨론은 비참하게 심판을 받게 되면서, 결코 제 모습을 다시 보이지 못할 것임이 예고된다(21절). 그 안에 번성하던 문화. 예술 활동이나 제반 생산을 위한 경제활동이 정지되고, 번영에 따른 호화로움과 혼인행사들도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 삶의 기반이 파괴 되리라고 하였다. 귀족들은 상인들과 정경유착 되어 사회 불의와 물질숭배와 환각 등으로 세상을 타락하여서, 결국 제국을 총체적으로 파멸하게 한 것이다(22-23절). 

 

2) 그런데도 다 멸망당한 그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눈에 띄는 대상이 있었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그 안에서 죽임을 당했던 모든 자의 피(血)였다(24절). 마지막 최후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순교적 생명에 영생이 있음을 보였다. 

 

결론이다

예수 안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이 큰 과제다. 그 점을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그의 말씀에 굳게 서야하고, 그의 뜻을 받드는 일에 헌신해야만 한다. 그는 항상 우리를 보신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드락 매삭 아벳느고를 지켜보고 계셨듯이 말이다. 그는 반드시 다시 오신다. 그를 간절히 믿고 원하고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이에게 말이다. 우리 다 기다림에서 승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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