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전12:1~11, 슥4:1-14, 눅17:5-10
오늘은 강림 후 다섯째 주일이다. 나라가 이재명 새 대통령을 맞이하면서, 급속도로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어서 무척 감사하다. 그중에서 이번에는 국회와 정부가 하나 되어 국민들 전체에 민생 회복을 위한 개인당 15만 원에서 50만 원 상당의 지역 화폐(쿠폰)를 차등 지급(支給)하면서, 그것으로 해당 지역 안에서 활용함으로 가계와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되도록 결정하였다. 매우 혁신적인 일이지만, 분명히 국가 경제 운용에 큰 활력소를 안겨 주리라 믿는다.
짧은 기간이지만, 현 대통령은 나라와 국민에게 유익하다는 판단이 서면, 그 즉시 거기에 적합한 인재를 발탁하여 과감히 시행해 보려는 소위 ‘실용적’ 정치를 펼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적합한 인사라면, 과거 사람도, 보수계 사람도, 이전 정권 사람도 거침없이 기회를 부여하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나라와 백성의 공존, 공생, 공영에 대한 열정이 그에게 있음을 보게 되어 반갑다. 그래서 국가의 힘이 수도권 특정 지역에 편중되어 있음에 변화가 필요함을 절감한다.
그러면서 지방화시대를 과감히 열려는 정책을 펼침에 거침이 없다. 부산에 해양수산부를 아예 옮기려는 일, 전국에 서울대학교급의 대학교를 10개 정도라도 이루고 싶어 하는 일, 각 지역에 있는 특성을 극대화하여 지방 경제를 극대화하려는 일, 지방 의료시설을 정착화시키는 일, 그래서 전 국민의 보편복지 제도를 실현하려는 일 등등 --, 그의 행보는 가히 혁명적이며 신선하기 그지없다. 하긴 짧은 임기 5년 안에, 국가 기반의 제대로 된 새 틀을 정착시키려면, 하루가 정말 짧고 긴박할 수밖에 없음은 사실이다.
실로 우리는 매우 특별한 대통령을 맞이하였다. 이는 매우 특별한 하늘의 은사를 부여받은 새 대통령을 우리나라가 받은 것이다. 최근엔 그가 충청권에 가서, 민생탐방을 위한 타운홀 대화에서, 빚진 채무자들을 위한 해결책의 일환으로 성경의 나온 쥬빌리(Jubilee)인 희년(禧年) 제도를 거론하면서 탕감(蕩減) 제도를 언급하며, 이 땅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인 불우한 이웃에 관한 깊은 관심과 그 해법까지도 제시해 주었는데, 이는 그가 이미 ‘실천적인 하나님 백성의 일원’임을 보여 준 모습이어서, 매우 반갑기 그지없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 올 때, 그 누구에게든 예외 없이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들을 골고루 부여해 주셨음을 전한다. 그러면서 그것을 깨닫고 소중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여 충성스럽게 사용할 것을 명한다. 그럴 때, 그 열매가 얼마나 놀랍게 나타나는 지도 알려주신다. 그러면서도 명심해야 할 마음은 그 모든 은사와 행할 일들이 자기 자랑이어서는 안 되고, 다만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위임)에 따른 것으로서, ‘나는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임’을 고백하여야 한다고 일깨운다.
1. 서신서 / 고전12:1-11 / “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有益)하게 하려 하심이라 ”
본 장은 우리에게 성경의 은사장(恩賜場)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는 마치 믿음장(히11장)이나 사랑장(고전13장)이나 부활장 및 소망장(고전15장)과 같은 유형의 안내장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이 세우신 교회 공동체가 성령이 각 성도들에게 내려주신 은사를 중심으로 서로 하나 되어 상부상조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함께 믿음의 행진을 하는 곳임을 알려준다. 특히 여기에서의 은사는 그 특성에 있어서, 대체로 서로 다르고 차이가 있기에 서로 자기 것만 자랑할 수 없고 서로를 위한 협력과 보완하므로 그 빛을 발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일에 앞서서 바울은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의 특성에 대하여 매우 놀라운 증언을 한다. 이 분들은 하나님으로 한 분이시지만, 그 역할에서는 서로 다른 몫을 맡아서 모두의 합력으로 완성을 이루신 삼위(三位)이심을 밝혀 준 것이다(4-6절).
곧 성부 하나님은 사역(work)장을 깔아주신 하나님이시다(6절). 이는 모든 만물의 생명체가 생존할 수 있는 전체적 판(field)과 기반에 될 무대(舞臺)를 깔아주신 분이심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조물주요 창조주이시다. 반면에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 무대와 판을 경영하고 주관할 역할(service)을 담당할 인물이나 일꾼을 택하시고 세우시고 훈련하신 주이시다(5절).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은 누군가? 그렇게 선택받고 소명 받은 이들에게 오셔서, 제2의 보혜사로서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뜻에 따라서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게 할 기능인 은사(gifts)와 능력(power)으로 역사하신 분이시다(4절).
성경은 이 세 분이신 삼위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 되셔서, 그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켜주시며 구원하시는지를 아주 입체적으로 알려주신 곳이다. 구약이 성부의 주무대이고, 복음서는 성자의 주무대이며, 서신서는 성령의 주무대이다. 하지만 주 무대라고 해서, 그분들만의 독자적인 영역만은 아니다. 구약에서도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도 함께 만나게 되고, 복음서에서도 성부와 성령의 동역도 확인하게 된다. 서신서에서의 성령도 교회와 성도들을 세우고 이끌어가시되, 그 기반은 전적으로 성부와 성자의 말씀과 사랑에 기반하고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1) 바울은 이 삼위의 세계가 바로 우리 성도들이 꼭 알고 지내야 할 <신령(神靈-spiritual)한 세계>임을 밝힌다(1절). 이런 세계에 지식이 없을 때, 우리는 인간이 만든 우상(偶像)의 지배나, 어둠의 세력인 악령(惡靈)의 지배를 받고 그들이 끌어가는 삶을 살게 된다(2절). 하지만 사람이 이 삼위의 신령한 세계에 눈이 뜨면 달라진다. 성령의 지시를 받게 되면서, 그 말에서부터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주(主)시며, 구세주(救世主)라고도 고백하게 되기 때문이다(3절).
2)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는 신령한 백성이 되면, 무엇이 바뀌는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입술의 고백도 새로워지지만, 자기만이 아닌 모두와 서로의 유익(有益)을 구하는 인물이 된다(7절). 그 핵심은 성령은 교회 공동체(共同體)의 주이시기에, 그때부터는 혼자만의 삶이 아닌 모두와 전체의 삶의 유익과 행복과 번영과 구원을 도모하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성령이 각자에게 내려주신 은사들이 그런 삶을 살도록 크게 이끌어 주신다.
3) 그 은사들은 어떤 것들인가?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이 은사 운동이 상당했다. 여기에서는 그 대표적 주요 은사들로 아홉 가지가 올라와 있다. 먼저는 지혜(wisdom)의 말씀이다(8,상). 교인이라면 모두가 받아야 할 은사이다. 서로 다른 이들을 자기 가족처럼 상대하려면, 가장 우선적인 도구가 바로 지혜이다(행6장). 지식의 말씀이다(8,하). 지식은 가르치고 전하는 데에 필수이다. 믿음(faith)이다(9,상).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에 절대적이다. 병(病) 고치는 은사이다(9,하). 이는 병자에게는 물론, 교회와 목회에 아주 큰 힘을 준다.
능력 행함(miraculous power)이다. 문제 해결의 놀라운 힘을 행사한다(10,상). 예언함(prophecy)이다. 방황들을 멈추게 하는 능력이다(10,중). 영 분별(分別)함이다. 거짓과 진리 사이에 혼란을 잡아준다(10.중). 각종 방언 말함이다. 지역 언어로도 말하고 하늘 언어로도 말한다. 기도에 큰 힘이 된다(10,하). 방언들 통역함이다. 어려운 방언을 해석하는 능력이다(10,하). 이런 은사들은 모두 한 성령이 당신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들이다. 자기가 원해서 받은 것이 아니기에, 자기 자랑은 허용되지 않고, 오로지 섬김에만 유용하다.
2. 구약 / 슥 4:1-14 / “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본문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두 번째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어떻게 완공되었는지를 알리는 내용이다. 이는 본래의 첫 번째 성전인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 포로기에 처절하게 파괴당하였고, 70년 포로기를 지난 이후 많은 백성이 해외에서 유다로 귀환한 환경 속에서 다시 성전을 복원하는 과정이 매우 힘겨웠던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시기로는 B.C 520-518년 경이다.
첫 번째 성전인 솔로몬 성전은 왕과 백성이 한마음으로 매달려 이루어낸 성과물이었지만, 지금의 스룹바벨 상황은 재건축의 당위성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여러모로 백성들의 마음이 해이해졌고, 또 주변 상황들도 결집 되지 못한 연고로, 재건축하기에는 힘겹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결국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과 능력으로 이 성전이 온전히 재건축되게 되었음을 소개한 기록이기도 하다(6절).
그때 재건축의 거룩한 불씨는, 바사(페르시아) 제국에서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내려온 스룹바벨과 그때의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였다(3장). 이 둘은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에서 만난 천사가 지목했던 두 감람나무들과 같은 재목들이었고,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었다(11,14절). 하나님은 이 둘 중에서 특히 소명에 투철한 지도자인 스룹바벨에게 당신의 성전 건축 완공에 관련한 분명한 뜻과 의지를 앞서서 이렇게 밝히셨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靈)으로 되느니라’(6절).
이 말씀에 의지하여, 스룹바벨은 백성 일부의 회의적인 눈초리를 의식하면서도(10절), 믿음으로 성전의 초석인 머릿돌을 놓았다. 그의 그런 믿음의 태도는 마치 백성들에게는, ‘큰 산’과 같이 보이는, 산더미처럼 쌓은 어렵고 무모한 일들처럼 보였다(7절). 그럼에도 바로 그 스룹바벨의 과감한 믿음의 첫 발걸음은 나약한 백성들의 감동을 불러오는 촉발제가 되었고(7,하),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그들 모두의 마음을 충동하게 하시면서 모든 회의와 의혹을 잠재우시면서, 결국은 스룹바벨이 그 성전의 완공(完工)까지 이루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9-10절).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메시지를 얻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과 뜻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힘과 능력을 주셔서, 당신의 뜻을 확실히 이루게 하신다는 점이다. 스룹바벨은 비록 성전 재건에 가진 여건이 현저히 부족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선하신 능력으로 그의 부요하심으로 자신의 그러한 빈곤에 하나님의 부요과 풍요로 채워주실 것을 바라보며, 문을 열고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런 믿음에 복을 주셔서, 그에게 제2 성전의 완성의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이다. 받은 자신의 소명과 은사에 응답하려는 자는 반드시 그 복을 받는다.
3. 복음서 / 눅17:5-10 /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손종하였으리라”
- “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
본문에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Increase our faith)라는 믿음의 은사를 간구하는 제자들의 요청이 나온다(5절). 이는 제자가 아닌 사도들의 요청이란 기록으로 보아서, 제자시대 이후의 사도 시대, 곧 교회의 기도임이 분명하다. 믿음의 힘이 소진(消盡) 되어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심각히 뒤틀려진 요즈음의 우리 한국교회의 절박한 기도 요청이기도 하다. 진정 다시금 믿음의 힘을 가진 교회 됨을 위해, 우리 모두가 합심으로 간구해야 이 기도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게 된 자신들에게 역시 필요한 무기는 믿음임을 깨닫게 된 교회의 각성에서 나온 고백이며 요청 사항이다. 그렇다.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적의 무기(武器)는 바로 주인의 명령과 지시를 좇아 행하는 진실한 믿음이다. 주인이 종에게 지시할 때는 그것을 감당해 낼 힘과 지혜와 능력도 은사로 함께 주신다는 점을 믿는 믿음이 절대 선행되어야 한다. 그 믿음은 요란하지 않다. 오히려 겨자씨같이 아주 적은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모든 것’은,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하여 드러날 뿐이다.
아울러, 본문은 주의 일꾼들의 일관된 마음가짐에 관하여서도 교육하신다. 그것은 바로 겸손(謙遜)한 종의 마음이요 자세이다. 그것은 종에게는 주인의 일을 하다 보면, 자연히 각종 유혹이 따르기 때문이다. 주인으로 위임받은 수많은 업무, 금전 관리들, 숱한 사람들과 그 관계들,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각종 권세들 등등이 바로 종으로 일한 사람 자체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마치 자기 것인 양, 자기 능력인 양, 자기 사람인 양, 자기가 잘나서 된 일인 양, 그래서 나중엔 주인도 따돌리고 자기 자랑과 권세만 내세우는 어이없는 모양새를 보인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모습인가를 본문 말씀은 주의 일을 하는 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뼈아프게 경고한다. 본래 전부가 주인의 것뿐이고, 일할 기회와 역량도 모두 주인의 것이었기에, 어떤 일의 끝도 결국 모든 영광은 주인의 것이 되어야 하며, 자기는 그저 ‘무익한 종이요, 내가 할 일만 한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하며 뒤로 빠져야 마땅하다(10절). 그런데 오늘날 바로 이 부분에서, 실패한 주의 종들이 얼마나 많은가! 착각이다! 특히 퇴임 시에, 보여 주는 추태들이 범람한다. 그래서 앞에서는 성공한 듯하지만, 뒤에서는 허망하게 끝나고 마는 자들이 너무 많다!
o 우리에게 할 기회와 일거리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부족한 자를 기억하셔서 그 귀하고 놀라운 주의 일꾼으로 택하여 주심도 감사하자. 무엇보다도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과 지혜 등의 은사들을 주심에도 감사하자. 아울러 이 모든 과정을 마무리까지 할 기회를 주심도 감사하자. 다만, 이제 다시 정신 차리자! 어떤 경우에도, 내 것은 없었다. 오직 모든 것들은 다 주의 것들 뿐이었다. 내 평가는 하나님의 몫임을 인정하자. 그리고 무익한 종에게 할 일을 안겨 주신 여호와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자. 끝까지 그의 종으로 살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