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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여신도회 주일

관리자 2025-01-14 (화) 22:39 1일전 8  

본문) 막 9:38-50, 사11:10-13, 고전3:1-9  


오늘은 주현절 둘째 주일이다. 2025년 새해 들어 셋째 주일을 맞이한 지금의 우리나라는 내란의 괴수로 지목되어 공수처에 체포당하지 아니하려고, 당사자인 대통령이 그의 관저에서의 경호원들을 앞세워 강력히 저항하는 문제로, 나라가 다소 혼란스럽다. 


법과 정의를 앞세워 대통령이 된 자의 행위치고는 너무 치사스럽다. 합법적인 영장 집행을 불법이라고 매도하면서, 애꿎은 경호원들을 무장하여 국가 공권력과 대립하게 하는 바람에 지금은 나라가 마치 어둠과 빛의 싸움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의 대립인 양 분위기를 양극화로 몰고 가고 있다. 윤석열 지키기에 나선 옛날 정치 폭력집단인 백골단의 등장은 더 충격적이다. 


게다가 극우세력의 앞잡이가 오랫동안 기독교 극우세력을 결집해서 나라의 민주주의의 질서를 계속 어지럽혀온 태극기부대의 전광훈이라는 점에서 통탄스럽다. 그들은 세속의 무속(巫俗)정치 세력과 완전히 하나로 결탁한 기독교 정치세력을 형성한 바람에, 한국교회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저질화의 벼랑 끝에 서있는 형국이 되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두렵기만 하다. 이미 역사의 심판은 내려졌지만, 저들은 최대한 상황을 지연시키면서 상황 대반전을 꾀하려는 하는 듯하다. 애꿎은 시민 세력이 이 차디찬 겨울 거리를 떠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교단은 오늘 주일을 여신도회 주일로도 지킨다. 여신도회는 교회의 공적 평신도 조직 중에 남신도회와 청년회와 함께 가장 핵심 조직이다. 그중에서 여신도회는 규모로나 감당하는 일에서나 교회에서 가장 역동적인 집단이다. 그들은 대체로 결혼한 부인들 조직체로서, 그들의 품에는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으며, 가정과 가족 전체를 살리는 살림의 주역들이다. 그 손과 품으로 교회 살림과 하나님의 일들까지 앞장서 책임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활동이나 역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러기에 ‘여신도회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말은 확실한 정답이다. 그러기에 여신도회는 자신의 중요성과 건강성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행동거지에도 더욱 성숙하고 신중해야 한다. 여기에는 모든 대외적 집단행동도 그렇지만, 특히 자신들 서로 간의 인격적 관계와 결속 관계의 견고함을 위해 더욱 서로를 아끼고 돌보며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대체로 여신도 회원들은 친가족 못잖게 평생을 교회 생활 안에서 만나 하나 되어 살아간다. 이는 매우 소중한 인적 자산이요 자원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든든한 인적 자원을 획득할 수 없다. 특히 그들 사이에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기에, 그 결속력은 더욱 견고하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조심해야 할 대목도 있다. 그 견고함을 깨려는 마귀와 귀신의 역사들이 항상 그 가운데에 있다는 점이다. 틈새를 엿보면서, 언제든 하나 됨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사실 수많은 교회 가족이 자체 안의 관계 유지에서 힘들어한다. 아니, 서로에게 상처를 많이 받기도 하고, 많이 상처를 주면서 살기도 한다. 이런 일에서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거나 힘들어지면, 교회를 떠나게 되거나 깊은 시험에 빠져 믿음 유지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다행히 연단 과정으로 삼아 잘 극복하고 그런 일로 인하여 보다 성숙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이 부분에서 역시 가장 엄격해야 할 대상은 상대보다는 바로 자신이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그런 점에서 교회를 섬기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강한 메시지를 준다. 특히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유지와 보전을 위하여 자기 마음과 행실을 어디까지 다스려야 할 지에 관하여 일깨워 준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구를 가까이하여야 하고, 무엇을 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마음가짐에 관하여 깊은 메시지를 준다. 


1. 복음서 / 막 9:38-50 /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시하신 인간관계 유지에 관련한 지침(指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제자들에게는 예수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상담하게 되며 관계를 맺고 살게 된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자칫 사람을 얻기도 하지만, 찾아온 사람을 잃기도 한다. 그러기에 적절한 지침이 필요하다. 다만 기본 입장은 있다. 예수께 나아온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모두 품어야 한다는 점이다. 실망하여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가게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만민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 때문에도 더욱 유의해야 할 점이다. 이를 위하여 본문은 몇 가지 사례들 중심으로 주님의 가르침이 제시되었다.


1) 제자 요한은 예수께 바깥에서 있었던 한 일을 보고드렸다. 그것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것을 보면서, 그 일이 우리를 따르지 아니한 자의 소행이라서 부당하다고 판단되어, 그 행위를 금하였다는 것이다(38절). 그러자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는가? 놀랍게도 ‘금(禁)하지 말라’였다(39절). 아니, 허락(許諾)하시는 입장이셨다. 그 이유로서, 주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그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즉시로 당신을 비방할 자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주님은 한발 더 나아간 놀라운 선언까지 하셨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Whoever is Not against Us is for Us.’(40절). 동시에 주님은 ‘누구든지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이유로 너희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그 보상을 받으리라’고 선언하셨다(41절).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당신의 지지자의 폭을 매우 넓게 잡고 계심을 확인하게 된다. 제자들처럼 자기 켐프에 들어온 자만 국한하지 않으시고, 비록 외곽에 있더라도 뜻을 같이하고 당신 일행에 대한 후의를 품고 선대하는 자들은 모두 같은 동지처럼 간주하셨다. 이 점을 헤아려, 제자들 역시 교회 공동체 안에만 천착하지 말고, 뜻과 행동에서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세상의 사람들과의 연대적 삶을 과감히 행하며 살도록 권고하여 주셨다. 


2) 그러면서도 주님은 당신의 우리(켐프) 안에 들어와 있는 자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책임을 드러내 주셨다(42절). 그중에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이란 대상들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여건상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까지도 매우 유의하여야 함을 지적한 내용이다. 예컨대, 잘 깨닫지 못한 사람들, 까다로운 사람들, 지겨운 사람들까지도 소중히 여길 것을 공동체에 권장한 말씀이다. 이는 예수를 따르고 함께 있는 일의 중요성을 헤아려야 됨을 말했다. 


3) 43-49절에 나타난, 범죄 하게 하는 나의 지체들인 손과 발과 눈을 찍어 내버리고 빼어 내버려서라도, 남은 전체 몸을 불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게 하는 것이 낫다고 강하게 권하신 말씀의 뜻은 이렇다. 곧 그리스도 곁에 충실히 머무는 것을 중요한 일로 삼는다면, 사람은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하여 희생할 각오를 철저히 하고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이다. 


4)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5:13). 소금은 모든 음식의 근본을 이룬다. 하지만 제맛을 낼 때에만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소금이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이에 음식의 소금이 들어가서 제맛을 내게 하듯, 서로 화목(和睦)하라(평화)고 명하신다(50절).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이다. 나란 존재가 있기에, 맛이 살아난 가정, 교회, 공동체, 세상을 이루라고 명하신 분부이다. 이런 나를 이루려면 방법은 있다. 예수와 함께해야 한다!


2. 구약 / 사11:10-13 /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


본문은 구약에서 일찍부터 오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으로서 매우 높은 가치를 가진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의 낯선 점은 오실 메시아가 다윗의 왕조가 아닌 그의 아버지 이새의 줄기(후손)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공의와 성실에 있어서, 커다란 실망을 안겨 준 다윗 왕조(王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원줄기인 그루터기를 이새로 대체하면서 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는 견지(堅持)한다. 이는 세상의 전통적 왕권이 아닌 공의와 성실을 드러낼 새 차원의 왕권을 가진 메시아의 오심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1) 그가 오시면 어떤 존재로 자신을 보이실까? 이사야는 그를 ‘만민의 기치(旗幟-banner)’요 ‘열방을 향한 기치’로 말한다(10,12절). 이 기치는 배너로서. 우리식의 표현으로 말하면 ‘깃발’의 성격을 띈다. 일종의 대중과 집단의 움직임을 이 깃발로 모이게 하고, 자기 집단임을 알게 하며 흩어진 자들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하는 표지이다. 일종의 십자가가 교회의 기치와 같듯이, 오실 메시아는 열방을 그에게로 모으는 인물이 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로 모인 자들은 모두가 그 안에서 하나요 가족이며 동족이요 공동체 일원이 되는 것이다. 


2) 이 ‘한 싹’은 누구일까? 이 만민의 기치로 오실 메시아는 누굴까? 바로 나사렛 예수이시다! 그 구원자 예수란 존재와 이름의 기치 아래, 구원의 길을 찾으려는 희망을 품은 온 세상 무리들이 동서남북(東西南北)에서 다 모여들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10-11절). 특히 세계 처처에 흩어져 살아왔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들도 그 기치 아래로 모여들 것이다(12절). 이는 이미 행2:5-12절에서의 그 예언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성취된 모습을 우리는 확인한다. 


3) 또한 이 새 기치와 깃발 아래에서는 어떤 놀라운 현상이 나타나는가? 분열이 극복되어 통합이 이루어지고, 시기와 분쟁과 질투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겸손과 섬김과 하나 됨의 모습으로 새 역사의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본문은 에브라함의 질투가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이 끊어지며 에브라함과 유다는 서로 더 이상 질투나 괴롭힘으로 맞서지 아니할 것을 말하는데(13절), 이것도 예수와 성령 시대의 도래를 통하여 유다와 사마리아 사이에 공고한 적대감이나 상종치 아니한 장벽들이 무너져 내린 것으로 이미 성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와 그의 십자가의 기치 아래 모인 오늘날의 우리 한국교회의 실상은 어떤가? 모두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 아래 하나가 되었는가? 아니다. 너무도 아니다! 너무도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예수의 이름을 훼손하는 행동들을 자행하고 있기에, 더욱 죄송하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 윤석열 탄핵 반대 그룹에 앞장서서, 나라의 민주주의 회복을 훼방하는 일에 앞장선 자들이 한국의 대형 교회에 속한 자들이 대부분일 정도이다. 그러기에 한없이 가슴 아프고, 주님 앞에 죄송하기가 그지없다. 주님의 교회라기에는 너무도 인간중심적 집단이라서 부끄럽다. 그러기에 앞으로의 하나님의 징벌이 더욱 두렵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저 고린도 교회의 책망받았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본 모습을 되찾아야 하겠다. 


3. 서신서 / 고전 3:1-9 / “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 심는 자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니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개척하고 부흥시킨 매우 유력한 교회였다. 사정상 바울이 임지를 떠나게 되면서 그 후임으로 아볼로라는 젊고 유능한 교역자가 부임해 왔다. 아볼로는 에베소에서 파송 받아 온 사람으로서, 여러모로 힘 있게 사역한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교회에 문제가 생겼다. 바로 전임교역자와 후임 교역자를 두고, 교인 간에 선호하는 그룹들이 형성된 것이다. 문제는 그런 흐름이 교회 전체적인 운영에도 영향을 줄 정도가 된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한 사도 바울이 큰 충격과 함께 도저히 침묵할 수 없는 사안임을 직감해서 드디어 편지를 보냈다. 


1) 바울은 교인들 모두를 매우 강하게 질책(叱責)했다. 그들을 ‘육신(肉身-worldly)에 속한 자’들로 규정하면서, 믿음의 자라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매섭게 나무랐다. 그들 정도로 교회 생활했으면, 이제는 당연히 신령한(spiritual) 자가 되어야 하는 데에도, 그들은 아직도 영적 수준이 저급한 육신에 속한 자(=세상에 속한 자)에 불과함을 지적하였다. 이는 그들의 영혼이 밥을 먹을 정도도 못되고 여전히 젖먹이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었다(1-2절). 그 바람에, 그들은 서로 하나 되지 못하고, 시기(猜忌)와 분쟁(紛爭)에 휘말려 ‘나는 바울파’, ‘너는 아볼로파’로 갈라져서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3-4절). 


2) 그러면서 바울은 그들에게 필요한 시각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의식 변화를 요구하였다. 아볼로나 바울은 모두 주님의 사역을 맡아 집행하는 종(從)들에 불과하다(5절). 차이가 있다면, 바울은 심었고(시작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성장하게 하고), 그러나 오직 자라게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6절). 그러기에 심는 이가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만이 주체이심을 명심하라고 강조했다(7절). 심는 이나 물주는 이 모두는 각각 자기의 일한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보상(報償)은 받을 뿐이다(8절). 


3) 이런 해설과 함께 바울은 그곳의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를 알아야 할 말씀을 전했다. 곧 자기들은 하나님의 동역자(God’s fellow workers)들이지만, 그들 성도는 하나님의 밭(God’s field)이요 집(God’s building)이다(9절). 그런 큰 틀에서 서로는 무모한 시기와 다툼을 버리고, 하나님이 위임하신 자신의 역할에만 성실히 감당하여 많은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하라고 독려하였다. 


o 오늘은 여신도회 주일이다. 우리는 몸 된 주님 교회의 핵심적 동역자들이다.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집을 이룬 공동체 요원들이다. 다만 우리는 예수의 거룩하신 이름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쳐있다. 이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기억하자. 어떤 경우에도 우리 사이에는 시기와 분쟁이 자리하는 육체의 행실이 자리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며 기도하여 깨어 살자. 우리와 함께 교회 안에 거하는 모든 이들과 소금 치듯 화목하며 살아가자. 힘들어도 크고 작은 차이들을 극복할 품을 품고 살도록 간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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