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문) 롬 12:9~21, 레 19:9-18, 눅 6:32-38 / - 둘째 해, 9째 주일의 본문임을 알려드립니다.
오늘은 강림 후 아홉째 주일이다. 무더위와 장마 속에서 오곡백과가 무르익어간다. 부디 긴 여름 건강에 유의하셔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시기를 기원한다. 곧 있을 파리 하계 올림픽 소식에 지구촌의 관심도 높아만 간다. 이런 중에 미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에 재도전하는 트럼프 후보가 유세 중에 피격을 당하는 불상사도 발행했다. 매우 불행한 일이다. 물리적 폭력으로 대통령 선거란 국가 대사에 치명타를 던지는 미 국민의 잘못된 태도에 큰 분노를 표한다.
이런 중에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전해 주신 세 본문 말씀을 받는다. 그렇다면 이번 주의 말씀은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이끄시는가? 큰 틀에서 보면, <이웃 사랑>에 관련된 메시지들이다. 이는 지난 주일의 <하나님 사랑>(신명기 중심)에서 나왔던 또 다른 신앙의 날개 축(軸)인 이웃 사랑에 관한 증언들이다.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양 날개 사랑 안에서 우리의 영생이 있음을 확인해 주신 바가 있기에, 우리에겐 이 대목도 매우 큰 관심사이긴 하다.
사실 하나님 사랑보다는 이웃 사랑이 항상 취약한 것이 우리들 실정이다. 하나님 사랑에는 그토록 열심인 유대인들이 결국 예수님에게 매우 격하게 책망 듣게 된 까닭도, 바로 이 이웃 사랑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까닭이다. 사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도 알고 보면 유대교의 그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제대로 보여주시고 훈련 시키시고자 오신 것 아닌가. 주님은 그 목표를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셔서 다 이루셨다.
성령이 오셔서 복음의 세계화를 펼치신 까닭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원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화시키고자 하심이었다. 중세기 대 신학자 요한 칼빈이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를 그의 성령론에서 깊이 있게 다룬 일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그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과 행동을 크게 관심하신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처럼, 성령을 은사나 복을 베푸는 기능적인 영으로 보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능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회의 사도인 바울은 오늘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의 후반부에서 성도들의 이웃 사랑에 관하여 매우 구체적인 권고를 한다. 그의 이웃 사랑의 관심 속에는 교회공동체 내부를 향한 부분도 있지만, 꼭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교회 밖의 이웃들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대응을 어떻게 해야 마땅한지도 함께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원수에 관련된 부분에서 그렇다. 그의 이런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음이 분명하다.
모세 5경의 하나인 레위기 내용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웃 사랑은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 것인지를 일찍이 깨우쳐 주신 바가 있다. 그 이웃 사랑의 전체적인 틀은 사회정의(社會正義)와 공의(公義) 차원에서 내려주신 지침들로 보인다. 자신들만 사는 사회가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임을 인지하여, 사익(私益)을 버리고 공익을 우선하고 배려하는 건강한 이웃 정신을 반드시 실천하라는 명령을 내려주신 것이다.
레위기에 나타난 계명만을 보면, 하나님의 성민(聖民)의 삶의 수준과 내용이 어떠해야 마땅한지를 알게 하여 준다. 당시의 세상이 원시적이었음을 고려하면, 율법은 이미 정의, 생명, 평화, 인권 세상을 지향하는 성숙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진리의 신’으로 부르는지를 확실히 알게 하는 곳이다(요18:37). 또한 그런 진리의 말씀을 좇아서 사는 자들 역시, 당시의 세상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도 충분히 가능하게 해준다.
사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계획과 꿈을 밝히신 바 있었다. 백성들이 당신의 명령과 법도를 지켜 행하게 될 때, 여호와는 그들을 세상 모든 민족 앞에서 지혜와 지식으로 보게 될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great)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심같이 그 신이 가까이함을 얻은 큰(great)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great)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6-8 참조).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이웃 사랑의 강도(强度)도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웃 사랑에 대하여 교육하신 내용을 보면, 일반 세상 죄인들이 보여준 통상적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차원의 사랑이어야 함을 일관되게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웃 사랑 요구는 어떤 경우에도 피동적인 수준은 없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적극적인 이웃 사랑이 표현되기를 원하셨다. 위대함은 본래 크기 문제가 아니라 내용에서 결정된다.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관되게 명령하신 이웃 사랑의 계명을 세 본문을 통하여 다시 배우면서, 우리가 이 어려운 시대에 어떤 지혜와 지식을 가진 무리이며, 큰 나라 큰 백성인 지를 세상에 보여주며 살아가야겠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웃 사랑의 계명들을 순서로 정하여 증언하겠다. 상호 겹치는 부분도 많고, 보완될 부분도 있다.
1. 구약 / 레 19:9-18 / ”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하나님의 이웃 사랑의 모든 요구는 당신을 향한 사랑과 직결되어 있음이 특징이다. 왜 그럴까? 내가 상대할 모든 이웃인 인간들 모두가 하나님에게는 사랑하시는 피조물이요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에 대한 잘못과 무시와 차별과 따돌림 따위는 곧 그의 조물주인 여호와를 향한 것처럼 간주(看做)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매 계명들의 뒷문 쪽에는 이런 내용이 반복해 올라와 있다. - ”나는 여호와이니라 “(I am the Lord - 10, 12, 14, 16, 18절)
1)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빈자(貧者)나 거류민(居留民)과 같은 사회 주변의 소외(疏外)된 자들을 향한 배려(配慮)심이 항상 있어야 된다(9-10절). 이를 위해 농사 후 추수 시에 그들도 떨어진 것들을 취합해서라도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떨어진 것은 수거하지 말기 등이 요청되었다.
2) 이웃과의 거래 내지 신용 담보가 시행될 때, 어떤 경우에도 거짓이나 속임 등이 개입되면 안되었다(-십계명8-9계명 사항). 이는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11-12절).
3) 힘없는 이웃을 억압하는 일, 착취를 일삼는 일, 그날그날 먹고 살기에 매달린 노동자들에게 임금 지급을 미루는 일, 귀먹어리나 맹인인 장애인들이 활동하기에 힘들도록 장애물을 놓는 일을 강하게 경계하셨다(13-14절). 그런 일은 하나님께 불경(不敬)하는 범죄라고 지적하셨다.
4) 사익이나 뇌물 등으로 인한 불의한 재판(裁判)을 단호히 경계하셨다. 가난한 자이든 힘센 자이든 모두가 예외없이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함을 강조하셨다, 봐주기 재판이 아닌 공의로 재판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을 강하게 명령하셨다. 공개 행보로 사람을 비방하는 일이나, 사익을 위한 행동도 금지하셨다(15-16절).
5) 이웃이 잘못할 경우엔 침착한 대응이 필요하다.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아야 하면서도 그의 죄과는 정확히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 이웃 때문에 그의 죄과를 떠맡지는 말아야 한다(17절). 그러면서도 원수(怨讐)가 생겨나면, 자신이 갚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18절). 보복의 악순환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여호와께 맡기고 선대하는 모습이 바람직하다(눅6:35,롬12:19 참조). 특히 동포(동족)에 대한 원망도 금하셨다(18절.중). 그러면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고 요구하셨다(18절, 하). 아, 이 얼마나 차원 높은 이웃사랑의 계명인가?
2. 복음서 / 눅 6:32-38 / ”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 사랑의 관점(觀點)이 제대로 드러난 곳이 본문에 올라와 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이웃 사랑의 수준을 먼저 거론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의 사랑 수준이 그와 똑같다면 무슨 칭찬거리(자랑할 거리)가 되겠느냐고 물으신다. 한마디로 본능과 관습에 따른 수준의 이웃 사랑 정도로는, ’나도 이웃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순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면 세상의 수준, 곧 불신자나 죄인 일반의 이웃 사랑 수준은 어떠한가? 그들의 인간적 상호관계는 대략 주고받기식(式)이다. 상대가 먼저 나에게 선을 베풀었으니, 나도 그에게 선행을 하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가 아무 일도 안하면 나도 그에게 아무 일도 안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또 있다. 개인적 이익 여부에 따라서 나의 선행도 결정되는 흐름이다. 주님은 이런 정도의 흐름을 좇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세상 사람들과 하등의 뭐가 다를 것이 있으랴라고 반문하신다. 죄인들 수준 가지고, 하늘의 칭찬은 결코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32-34절).
그러면 예수께서 바라시는 제자들의 이웃 사랑은 어느 수준인가? 주의 지적대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된 자의 수준‘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그 점에서 예수님은 매우 적극적(積極的)인 선행을 주문하고 나오셨다(35절). 특히 자기를 미워하고 힘들게 하는 원수(怨讐)를 향한 적극적 선행을 주문하셨다. 사랑하라고. 선대하라고. 대가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방식(=은혜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도 인자하심)과 같다고 하셨다. 그런 행동을 하게 되면, 하늘 아버지와같이 자비(慈悲)로운 자가 될 수 있음을 일깨우셨다(35절).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간 행보(行步)‘를 주문하셨다. 이웃 사랑을 위한 행동 지침으로 이금이행(二禁二行) 원칙을 제시하셨다(37-38절). 이 원칙은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 무대에서의 헤아림을 도로 받게 된다‘는 필연적 결과론에 의거하여 제시된 것들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도록 배려와 용서와 은혜를 풍성히 받아온 자들이었기에, 더욱 예수의 이 지침이 힘이 있었다!
이금은 무엇인가? ’남을 비판(批判-judge)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추후에 비판받지 않기 위함이다. 아울러 ’남을 정죄(定罪-condemn)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 역시 자신이 정죄 받지 않게 될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행은 무엇인가? ’잘못을 용서(容恕-forgive)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자신이 용서받게 될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주는 것(give)‘이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자신이 받게 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의 교회들이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일을 금함과 동시에, 용서하고 주는 선행을 생활화함으로써, 교회의 순수성을 보전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현장을 견고히 할 수 있음을 제시하셨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이러한 내용에 많이 어긋나 있음은 매우 유감이다. 그러기에 오늘의 이 말씀은 더욱 피가 되고 살이 되도록 지켜 행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다.
3. 서신서 / 롬12:9-21 / ”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善)에 속하라 —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악(惡)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성령에 의하여 교회의 사도가 된 바울은 다민족 다종족 다문화로 이루어진 로마 교회의 상황을 주목하면서, 그들 모두가 공통으로 지향하여야 할 영적 초점을 ’사랑으로 선(善)을 행하는 공동체‘에 두었다. 이를 기준으로 바울은 성도들이 상대할 두 부류(部類)인 교회 내부 가족들을 향한 태도와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을 향한 태도를 염두에 두고, 행동 지침을 전달하였다.
1) 성도들의 교회내 생활은 기본적으로 사랑으로 행하며 지내는 일이다.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확고히 할 자세는 악을 미워하며 선에 속한 모습을 견지하며 사는 일이다(9절). 악과는 단호한 마음으로 비타협적 태도로 발붙일 여지를 교회 안에는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본은 선하고 착함을 견지해야 한다.
2) 이웃(형제) 사랑에는 주도권을 행사하는 일이 중요하다. 서로 우애(友愛)하는 일, 서로 먼저 존경을 표시하는 일을 선도하는 일이 중요하다(10절). 이 모든 주의 일에는 역시 부지런과 열심히 있어야 한다(11절). 시련과 환난에 견딜 인내심도 있어야 하고, 기도에 항상 힘써야 된다(12절). 성도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도 살펴서 공급하고, 손 대접하는 일도 힘써야 된다(13절).
3) 성도들과의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공유(共有)의 영성도 중요하다(15-16절, 고후11:29참조).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의 옷을 입고 처신해야 한다(빌2:2 참조). 악을 악으로 갚으려 말고, 모두 앞에서는 선한 일을 도모하여야 하고(17절), 누구와도 더불어 화목(和睦)하도록 해야 한다(18절, 막9:50, 히12:14참조).
4) 원수들이나 박해자들이 등장하면 어떻게 응대해야 할까?(14,19-20절) 앞에서의 성부와 성자의 뜻과 같다. 자신이 직접 원수 갚으려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김이 옳다(신32:35 참조). 힘겨워도 주의 분부를 기억하며, 그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자(마5:44 참조). 한발 더 나아가 그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자(왕하6:22참조). 그렇게 해서, 교회나 성도가 어떤 경우에도 악에게 패(敗)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자.
O 이런 영적 싸움의 모습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머잖아 그의 나라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걸맞은 자격자의 품격과 내용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도 이곳, 이 땅에서부터 말이다. 이를 위한 싸움의 시간은 지금뿐이다. 내일이나 심판대에서는 이미 늦다. 따라서 성령의 도움과 기도의 인내로, 남은 삶의 여정을 반드시 이겨내자. 세상 수준의 사랑이나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 크고 위대한 백성들만이 보여줄 그 차원 있는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신 예수를 본받아, 우리도 자격증을 필히 확보해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