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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4-06-26 (수) 11:56 6개월전 491  

분문) 벧후 3:8~13, 습1:14-18, 눅17:20-37 


오늘은 강림 후 여섯째 주일이다. 이는 성령께서 그가 부르신 백성인 교회와 성도를 보다 하나님의 깊은 곳으로 인도해 가시는 때이기도 하다. ‘깊은 곳’이란 하나님의 본체를 보다 깊게 접할 수 있는 영역을 말한다. 이는 사람이 과일을 말할 때, 껍데기로서는 그 맛을 볼 수 없고 그 속살까지 먹어보아야만 알 수 있음과 같다.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도 그 말만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나 오직 그 내면의 본질을 접할 때 비로소 그 맛을 알 수 있음과 같다. 


그 점에서 요즈음의 한국교회에는 안타까운 일이 많다. 무엇인가? 교회가 세상에서 그 권위와 신뢰를 크게 잃어버린 일이다. 윤석열 정권이 무속화(巫俗化)되어, 국가와 백성을 점점 더 우매화와 독재화와 분열화 정책으로 이끌어가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교회의 경고나 저지 운동은 없거나 묵인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재영 목사의 용감한 김건희 고발 사건이나, 우리 기장 교단의 저항 움직임마저도 없었다면, 교회는 죽은 교회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 보여줄 것은 무엇일까? 아니 교회가 하나님을 보여주려는 방법은 무엇일까? 건물일까, 소리일까? 눈요기일까, 깨우침일까? 대체 교회가 세상에 갖게 될 권위는 무엇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반응, 곧 ‘이 성전을 헐라’라고 채찍질하며 장사치를 내쫓으셨던 일을 참고하게 된다(요2:19). 그때 만일 예수께서 그 성전의 규모나 외형적 위세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으셨다면, 결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말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종교의 허위의식만 가득했기 때문에, 그렇게 무섭게 부정하시고 질책하셨다.


나라와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교회라도 그 권위와 신뢰를 확고히 갖고 있다면, 그나마 이 세상은 희망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사람들의 의지하고 비빌 언덕이요 피난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교회의 신뢰 상실은 혼돈의 세상을 더욱 고아(孤兒)처럼 만든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과 진리의 본질을 보여주지 못하고, 외형과 외곽이란 껍데기 치장과 과시에만 매달려 있는 교회의 모습은 비극이며 치욕이다. 그들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예수와 그의 빛과 희망을 오히려 앞장서 가리고 있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최후의 날에 가장 먼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회가 항상 깨어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그의 나라를 교회가 품고 있느냐’에 있다. 교회가 항상 앞서서 기도하고 씨름해야 할 영적 과제는 외형적 치장이나 규모 문제가 아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보유하고 있느냐, 있다면 그 내용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냐’에 대한 답변 거리를 갖추고 사는 일이다. 그 답이 있을 때, 우리 교회는 비로소 세상에 보여줄 것이 있고 답할 것이 있는 ‘생명의 공동체’가 된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우리 신앙 영역에서 가장 민감하고 첨단적인 영역이자 하나님 영역의 깊은 속살인, ‘주의 날‘(벧후3:10), ‘하나님의 날’(3:12), ‘새 하늘과 새 땅’(3:13), ‘여호와의 큰 날’(습1:14), ‘여호와의 분노의 날’(1:15), ‘하나님의 나라’(눅17:20), ‘인자의 날’(17:22), ‘인자의 때’(17:26) 등의 그날(the Day)에 대한 내용들로 차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종말론의 정점에 있는 순간이며 지금과 영원의 경계 선상의 획을 긋는 때의 표시로서, 주의 오시는 날이 주는 심판성을 확연히 드러낸다. 이곳(빛)과 저곳(어둠)으로 갈라짐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이 부분의 말씀들을 듣기에 다소 부담되고 힘겨울지라도, 깊이 경청하면서 제대로 소화 시켜야 한다. 종합적으로 보면, 이날은 우리가 마치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그 누구도 절대 피할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그날이다! 다만 여기에는 확실한 갈림길이 있다. 그날이 갖는 영원한 심판(審判)의 성격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심히 기쁜 날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슬픔과 저주의 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리고 잘 분별(分別)해서 살아야 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언젠가 있을 피할 수 없는 죽음에만 신경 쓰며 살아가는데-, 사실은 그 죽음보다도 더 우선하고 더 앞서서, 관심을 갖고 대처해서 맞이해야 할 대상이 바로 ‘그날’(주의 날)이다. 그날은 우리를 죽음 이후의 생명(生命)과 영생(永生)으로 인도할 수도 있고, 죽음 이후의 어둠의 고통(지옥)에로 인도하는 그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 너머에서 그날 내 운명을 결정지을 주역(主役)은 누구며 무엇인가? 여러분은 당연히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것이다. 맞다. 옳다. 하지만 하나님 심판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때, 하늘의 것을 좇아 왔느냐, 땅의 것을 좇아 왔느냐에 근거하여 심판하신다는 점이다. 삶에서 그가 하나님의 것인 영원한 것과 거룩한 것을 붙들고 살아왔느냐, 아니면 땅의 것들인 순간적이고 금방 낡아서 사라지고 말 것들 위주로 살고 있느냐가 바로, 하나님 심판의 절대적 기준(基準)이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현재와 지금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의 삶의 내용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의 나를 위한 점검(點檢)을 냉철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세 본문 말씀들은 이 점에서 매우 귀중한 말씀 자료들이다. 


1. 서신서 / 벧후 3:8-13 / “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교회의 사도인 베드로는 당시 교회를 크게 혼란스럽게 하는 거짓 이단들과 종말론자들의 준동을 막고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교회들에게 다시 오실 주님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맞이해야 마땅한지를 일깨우는 편지를 보낸다. 이런 점은 오늘 우리가 받을 내용이기도 하다. 


1) 사도는 우선 왜 주님의 재림(再臨)이 지체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한다(8-9절). 그것은 주님이 약속을 잊었기 때문이거나, 시간 개념이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우리 죄인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당신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을 기회를 부여하는 어버이의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과 긍휼의 지체(遲滯)인 늦춤’임을 밝힌 것이다. 이런 기다림의 마음이 바로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처럼’의 마음이다. 냉혹한 심판 이전에, 최후로 베푸시는 자비와 인내의 시간이다. 


2) 그런 인내(忍耐)의 시간이 끝나면 어찌 되는가? 그날 곧 ‘주의 날’이 임한다. 베드로는 이때를 ‘도둑이 온 것 같다’고 표현한다(10절). 도둑의 특성은 주인의 허점을 파고 들어와, 그 집을 뒤지고 가장 귀한 보화를 탈취해 가는 자라는 데 있다. 도둑을 맞게 되면 무엇이 가장 불쾌한가? 단순히 귀한 보화를 약탈당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집 내부가 그에게 샅샅이 짓밟히고 폭로되었다는 점에서, 허탈감과 분노로 큰 충격을 받는다(10-11,상). 


3) 해결책은 무엇인가? 바깥에서 오는 도둑 단속에 앞서서, 먼저 자기 단속부터 잘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자기 단속 방안은 무엇인가? 베드로는 세 가지를 짧게 제시한다(11-13절 참조). 


첫째는 행실이 거룩해야 한다. 둘째는 마음이 경건해야 한다. 셋째는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그날이 앞당겨지도록 사는 일이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을 향한 말씀(眞理)의 도(道-2:2)와 인간을 향한 의(義)의 도(道-2:21)위에 굳게 세우는 일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항상 다시 오실 주님의 때를 사모하며, 그날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이런 훈련과 무장으로 항상 깨어 있으면, 그에게는 주의 날이 도둑 같이 가 아닌, 기쁨과 환호와 승리와 감사의 순간이 될 것이다. 그에게는 약속된 의의 세상인 새 하늘 새 땅을 보게 된다.


2. 구약 / 습 1:13-18 / “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그들의 은(銀)과 금(金)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겨지리니 이  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선지자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 일에 대하여 매우 신랄하고 엄중한 표현으로 예고한다(14-18절 참조). 그 예언에서 나타날 징조들에는 분명한 특징(特徵)들이 있다. 곧 그는 여호와의 날에 전개될 심판을, 전쟁에서의 사나운 적군의 압도적인 공격에 무참하게 짓밟힘을 당하는 처지의 허망한 사람들의 모습을 대비시키며 그때의 참상(慘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여호와의 순간적 빠르고 신속한 공세에, 세상의 그 어떠한 용사들도 맞서거나 대응하지 못한다. 그 점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운다’(14절). 


2) 세상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패(完敗)당하는 날이다. 그래서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며 황폐와 패망의 날이고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 된다(15절). 


3) 하나님께서 인간의 그 어떤 자구책(自救策)도 무력하게 하시기에, 그날에는 인간의 그 어떤 안전장치도 쓸모없다. 범죄와 탐욕과 욕망의 아성들은 순식간에 거덜 날 뿐이다. 오랫동안 쌓아두고 과시하며 의지해 온 부자들의 금과 은도 자신들을 전혀 구하지 못한다(16-18절). 


4) 특히 주목할 부분이 있다. 우리는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심판이 우리보다도 우리의 대적자나 불신자들을 향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질투하시는 여호와의 심판의 불은 당신을 믿는다면서도 평소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더욱 집중한다는 점이다(암5:18-20 참조). 그러기에 그날을 대비해야 하는 우리는 믿음의 주소가 더욱 분명해야 한다. 영적인지, 육적인지. 세상과 다른 새 하늘 새 땅을 품고 지내고 있는지의 여부를 더욱 분명하게 해야 한다. 참믿음에는 애매모호가 설 자리가 없다!


3. 복음서 / 눅17:20-37 / “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within you) ”


예수 시대에도 가장 보편적인 관심사는 오시는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였다. 이는 예수님 자신의 선교 구호의 핵심 주제이기도 했지만, 그의 행태에 늘 비판적이었던 바리새인들의 관심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날을 ‘메시아의 오실 날’로 생각하며 기다린 것이다. 다만 그 나라를 찾는 시각이 아주 달랐다. 언제 어디에서에 대한 관심은 공통이지만, 그 나라에 접근하는 길이 달랐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에 대한 이해 차이 때문이다. 


저들은 예수를 몰랐다. 그가 누군지도 몰랐고 왜 오셨는지도 몰랐다. 곧 예수가 자기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임을 몰랐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온 세상에 안겨주려고 오신 이임을 몰랐다. 자기들이 그토록 오랜 기도의 응답으로 오신 분가 예수임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정작 답이 눈앞에 주어졌음에도, 여전히 다른 데에서 그 답을 찾고자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답이 이미 그들 손에 쥐어줬음에도, 그들은 방황을 멈출 줄 몰랐다. 큰 불행이었다. 


답답하긴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바로 그들이 찾는 하나님 나라였고 그때인데-, 그래서 당신을 영접하면 그게 곧 하나님 나라에 입성한 자가 되고, 그 나라 백성의 은혜와 축복이 주어질 것인 데에도(요1:12-13 참조), 그걸 모르고 사람들은 계속 다른 신(우상), 다른 영웅(인간), 다른 교리, 다른 충격과 문화 등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만 하는 모습이 크게 답답하셨다. 결국 인간 무지의 한계를 잘 아신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찾아내셨다. 


실로 큰 우주사적 대전(大戰)을 준비하셨다. 그것은 전능하신 신이 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죄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당신이 그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어 그 사망의 형장에 들어가 대신 매를 맞고 피를 쏟으며 죽는 일이었다. 바로 <십자가 대전>이었다(25절). 그리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때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이었나? 부활(復活)이다! 예수의 선택이 의로웠음을 입증하시려고,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예수를 믿고, 그의 말씀과 행위에서 생명과 기쁨과 살림의 길을 찾고자 예수에게 모여드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을 베풀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기 시작했고,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까지 보내셔서 그들의 영과 양심과 의식을 깨우치며 세상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복음 운동을 펼치고 계신다. 


o 이제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할까? 명심하자. 예수가 답임을 믿고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예수 없는 곳에는 죽음과 어둠만 있다! 그러기에 그런 자들에게는 시체를 뜯어먹고 사는 독수리들만 모인다(눅17:37 참조). 만일 믿는다면서도 계속 부끄러운 일들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면, 그는 어서 깊이 회개해야 한다. 현재 독수리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려면, 저 선지자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서의 회개 차원의 출발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내 안에는 예수가 절대 계셔야 한다. 그의 말씀이 계셔야 하고, 그의 영이 운동하셔야만 한다. 그의 나라가 내 안에 진리와 의의 삶으로 자리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이 접근할 수 없는 새 하늘 새 땅이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 잠깐 있다가 없어질 세상 것에 내 마음과 삶이 메여 있으면 안 된다. 그의 날에는 그런 것들이 순식간에 붙타서 살아지고 말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피동적으로 맞이하기보다는 능동적인 자세로 맞이하는 일이 바람직하다.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잘 준비하고 사모하면서 맞이하는 일이다(벧후3:12). 깨어 있어야 한다. 언제 어느 순간에 주의 나라가 임할지라도, 나의 주인은 세상 것이 아니라 예수요 그의 세계이며 그의 말씀과 사랑이었음을 보여줄 인생이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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