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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어버이-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

관리자 2024-05-08 (수) 07:56 7개월전 579  

본문) 요 17:1~11, 단 7:9-14, 고후 5:14-21  


오늘은 2024 부활절기의 끝 주일이다. 지난 여섯 주간의 부활절 여정을 어떻게 보내며 오셨는가? 분명한 것은 예수 부활로 우리의 삶 역시 새로운 <거룩과 영광>이라는 신선한 영역에 발을 디디며 살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부활의 주되신 예수를 만남으로써,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알게 되었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현재는 영원에 잇대어 존재하는 일부이기에, 우리의 시선은 현재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되고 언제나 영원과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점도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다시 새롭게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제한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무한히 가치 있고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곧 죽어도 살게 하고 끊어지거나 단절되지 않고 영속(永續)되게 할 수 있겠느냐 하는 부분이다. 바로 이 점이 예수님이 무척 깊이 생각하시면서, 그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시려고 진력하신 대목이라고 보인다. 마침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당신의 아버지에게 올린 예수님의 고별(告別) 기도문인데, 그 내용에서 보면, 온통 당신 이후의 펼쳐질 당신의 생명과 역사가 어떻게 제자들에게서 이어질 것인지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 내용이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어버이 주일이면서 동시에 우리 교단이 제정한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주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오늘에 우리가 기억할 대상들은 우리의 어버이들인 부모님이고,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군부 세력들에 의하여 무참히 학살(虐殺)당한 분들이다. 이분들을 생각하면,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생전에는 자식들을 위하여 평생을 헌신하다 가신 분들이다. 또한 나라의 민주화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처참히 희생당한 분들이다. 


사실 이분들은 생전에 자신이 행한 수고와 희생을 기억하지 못한 채 살다가 가셨다. 그런데 돌아가신 후에는 아주 다르다. 남은 자인 후손들과 백성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과 존경과 다짐을 우리에게 안겨 주고 가신 자가 되었다. 곧 생전에 맛볼 수 없는 영화를 사후에야 누리게 되는 자들이 된 것이다. 매우 놀라운 변신이다. 이런 역사와 삶의 공식이 매우 놀랍지 아니한가! 대체 무엇이 이들을 기억하게 하며, 그들을 우리가 떠날 수 없게 만들고 있는가? 


이런 <차원(次元)의 변신>은 아무에게서나 찾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만한 수고와 밑거름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가장 대표적인 존재는 우리의 어버이들이다. 이분들은 생전에는 자식들을 낳고 그 자식들을 기르고 밑 바라지하느라고, 자신을 돌볼 틈이 없이 산다. 그 양육과 교육과정에서 자식들과의 갈등과 마찰도 컸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늙고 병들어 있는 것을 다 남겨주고 세상을 떠난다. 자식들의 짐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속절없이 떠난다. 


그런데 그걸로 부모 자식 관계가 끝나는가? 결코 아니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떠나신 부모가 자식 가슴에서 순간순간 되살아난다. 특히 자신이 늙어갈수록 오래전에 떠난 어버이 생각에 눈물짓는 일들이 많아진다. 떠난 어버이가 보고 싶고, 미안하고 죄송하며, 후회스런 마음만 커진다. 생전에는 갈등과 대립과 외면했던 관계가 이제는 그리움과 죄송함과 사랑하는 마음의 대상으로 되살아 난 것이다. 떠나도 떠나신 것이 아닌 분이 부모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대체 무엇이 이런 관계로 이어지게 한 것일까? 바로 자신을 대신한 사랑과 희생 때문이다! 


5.18 희생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일상은 우리 일반인들과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만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모든 백성의 존경과 영광을 받게 된 까닭은 그들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우리 대신 엄청난 희생제물이 되었음을 우리가 모두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그들은 잊을 수 없는 자들이 된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 모두는 하나님 은총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다. 어버이들은 보편적 은총을 받은 이들이라면, 광주 희생자들은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들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존재의 가치 변화의 흐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준 모델, 한 분이 있다. 바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무죄(無罪)한 존재이시면서도, 자신의 무거운 죄 짐 때문에 항상 탄식하며 지내는 세상의 모든 죄인의 영혼을 자유(自由)하게 하시고자 십자가에서의 형벌을 대신 당하신 예수이시다. 그 일로 그는 그를 보내신 하늘 아버지를 영화(榮華)롭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구촌의 아주 낯선 조그만 이스라엘 땅의 선생(랍비) 위치에서 온 우주와 온 세상 만민들의 구세주(救世主)가 되는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존재가 되셨다(계5:13 참조). 


더욱 주목되는 부분은, 예수께서는 당신이 취하실 그 영화의 자리에 이 땅에서 남아있을 당신의 여린 제자들까지도 함께 들어가도록 가르치고 기도해 주신 일이다. 그 까닭은 당신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하늘 아버지 것이었다가, 이제는 당신의 소유가 되었으며, 지금은 선생인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기까지 성장했기 때문이었다(6-11절 참조). 즉 이제는 결코 버릴 수 없는 존재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대목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큰 믿음을 갖게 하는 부분이다. 


1. 복음서 / 요17:1-11 / “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인 당신에게, 그동안의 억제 당해왔던 아들의 영화로운 신분을 회복(回復)시켜달라고 청원하신 일이다. 그 까닭은 이제 당신은 인간으로서의 최대 제약(制約)의 굴레였던 죽음이라는 마지막 단계에서까지 벗어나 부활하심으로써, 이제는 당신이 자신을 좇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도 영생(永生)을 줄 수 있도록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1-2절).


여기에서 주님이 회복을 바라신 영화로움은 당신이 예전의 창세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누리셨던 바로 그 영화로우심이다(4-5절). 따라서 부활한 이제는 아버지가 당신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부여하셨던 모든 사역을 완수하시고 하늘 본향으로 귀천(歸天)하게 되실 때가 되었기에, 바로 그 본래의 영화로움을 회복시켜달라는 아들의 청원이다. 곧 당신의 귀향 전에, 본래의 하늘 아버지 아들의 신분증을 정식으로 재발급해 달라고 요청하신 것이다(4-5절).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 한마디를 제자들에게 남기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3절). 이는 무슨 뜻인가?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하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와의 이런 관계를 숙지하고, 동시에 이분들과의 사귐을 갖고 사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신 것이다. 이 점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밝혀준 매우 핵심적 교본이다(빌2:5-11 참조).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의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또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 남겨질 당신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다(6-11절). 여기에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계셨는지를 밝힌다. 곧 제자들은 본래 아버지 것(소유)으로써 아버지가 당신에게 주셨던 존재들이었다고 고백하신다. 그러기에 당신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과 말씀을 꾸준히 나타내었는데, 그 바람에 이제는 제자들도 스승인 당신 자신은 물론 스승의 전부가 다 아버지에게서 왔음을 알고 믿게 되었다고 밝히셨다(6-8절).


이러한 인식 아래, 주님은 이 세상에 남아있게 될 제자들을 위하여 두 가지를 간구(懇求)하셨다. 하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해달라’는 요청이었고, 또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었듯이 제자 모두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요청하셨다(9-11절). 예수의 이 제자들 위한 간구는 결국 주의 이름으로 하나 된 공동체로서의 교회(敎會)의 출현을 견인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 흩어지면 결코 안 되는 교회의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 


2. 구약 / 단 7:9-14 / “ 내가 또 보니 — 인자 같은 이가 —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


구약의 다니엘서는 신약의 요한계시록과 함께 ‘묵시문학적(默示文學的)’이라 불리는 문서들이다. 이 표현은 주전 2세기에 발전한 신앙적인 세계 이해와 역사 이해의 한 형태를 뜻하는데, 유대교와 기독교의 첫 무렵의 경건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신약에서는 막13장, 마24장, 눅21장과 함께 요한계시록에서 이 묵시문학적 본문들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전 세계와 인류의 역사를 아직 닥치지 않은 종말로부터 들여다보게 한다. 여기에서는 늘 신화와 관련되고 그 구원의 개념들과 희망들을 표현하는 암호와 상징들이 동원된다. 


본 다니엘서에는 상징들과 주제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런 부분들은 성경의 마지막 책이자 더 발전적인 책인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보충할 필요가 있다. 본문인 단 7장은 ‘인자(人子)’와 같은 이‘로 보이는 천상의 존재에 관한 증언이 나오는데, 이 내용 역시 지난 주일(부활절 6주일)의 서신서 본문인 계 6장의 내용을 참조하면서 보면(계5:6-14 참조), 더욱 상세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곳에서 보게 된 인자가 바로 부활하시고 하늘에 승천하여 오르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본문에 나타난 다니엘의 환상 전체는 두 차원으로 전개된다. 전반부(9-12절)에서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란 존재와 그의 위치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증언이다. 후반부(13-14절)에서는 ’인자 같은 이‘란 존재와 그의 위상에 관한 증언이다. 그렇다면 이분들은 누구인가? 계시록의 증언을 참고해 보면, 그 이해가 쉽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는 계시록의 ’보좌에 앉으신 이‘로서 하나님 자신을 지칭한다(계5:13 참조). 그리고 ’인자 같은 이‘는 ’어린 양‘이며 또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이‘로서,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셨다가 부활의 영광을 얻으시고 하늘로 승천하여 귀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계5:6-7 참조). 두 곳에서의 인자 위상은 변함없다. 


다만 이 ’인자 같은 이‘는 다니엘 시대에는 그곳 천상에만 계셨기에 죽임을 당하시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후, 예수란 인간의 옷을 입고 지상에 성육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후 하늘에 오르신 다음에는 ’인자‘란 위상은 다니엘 때와 여전하시지만, 그러나 계시록에서 소개된 그의 존재를 알리는 공지 판(板)에는,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이‘라는 별칭이 덧붙여진 신분의 주인공이 되신 것이다. 이는 지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믿게 된 후에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모든 사람을 위한 특별한 배려임이 분명하다. 


3. 서신서 / 고후5:14-21 /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


교회와 선교의 사도인 바울은 자신들이야말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리고 이끌려서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주의 십자가 사랑은 대체 어떤 것이기에 그렇게 강력한가? 바로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도리어 자기를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예수를 위해 살게 할 정도라고 증언한다(14-15절). 이는 자기를 넘어설 더 크고 놀라운 새로운 생명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살지 않게 되었음을 말한다(16절). 곧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옛것에서 떠나 전혀 새로운 피조물(a new creation)이 되었음을 뜻한다(17절). 삶의 평가 기준이 육신이나 물질에 의하지 아니하고, 영을 좇아서 살아가게 되었음을 말한다(16절). 이는 또한 그가 하나님에게서 거듭났음을 의미하고(18,상), 하나님에게서 특별한 분부까지도 하달받고 살고 있음을 뜻한다, 그게 무언가? 바로 화목(和睦)하게 하는 직분이다(18절). 


그 화목은 어떤 화목인가? 하나님께서 취하신 화목이다. 곧 당신이 아들 예수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 방법 역시 새롭다. 곧 사람들에게 죄과(罪科)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안겨 주심으로써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이다(19절). 


그 점에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大使-ambassador)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를 앞세워 세상 사람들에게 간청하신다 – 이제 모든 사람은 죄를 모르신 아들에게 우리가 져야만 할 죗값을 씌우셨던 바로 그 ’하나님과 화해(和解)하라‘. 그래서 그리스도가 의로우셨고, 하나님의 화해 행위가 의(義)로우셨음을 입증하는 자가 되라(20-21절).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영화로우심에 참여할 자들이 되라! 


o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에게 올리신 고별 기도에 주목해야 한다. 그 기도에는 당신의 지상에서의 사명을 이루어 드리고 하늘에 오르셔서 다시 창세의 영화의 옷을 입고자 하시는 주님의 자신을 위한 기도가 들어있고, 당신에게 주신 제자들도 하늘 영광에까지 이르도록 보전해 달라는 기도가 들어있다. 우리의 교회와 믿음은 이 기도의 터전 위에 있다. 


특히 주님께서 언급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는 말씀은 절대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3절). 이분들은 이 악한 세상 속에 의로운 화해를 성취하시는 일에 하나 되셨다. 제자 된 우리 교회와 성도 역시 삼위 하나님의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고자 헌신할 때, 비로소 영생에 이르게 되고 그의 의를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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