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11:17~44, 욥33:14-18, 23-28, 고전15:51-58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이다. 총선거도 야당의 압승으로 끝났고, 시대의 변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현 정권의 기반이 무지(無知)와 무속(巫俗)에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염려가 크다. 자신의 부족을 채우려고는 하겠지만, 그 출구를 낡은 세력과 함께 그의 스승인 모 무속인의 지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한계는 분명하다. 어떻게 저항하고 나올지, 궁금하다. 그러기에 ‘탄핵(彈劾)’이라는 말이 끊임없이 거론될 수밖에 없다.
이런 때, 마침 저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이란이 정면 충돌하기 시작했다. 탄력을 잃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의 불씨가 이제 그곳 맹주(盟主)의 하나인 이란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강대강의 맞대결이 불가피하다. 미국의 처신도 중요하다. 이래저래 세계는 지금 전쟁이란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고 있다. 이런 때, 우리 한반도 역시 주의해야 할 수밖에 없는 위험지역이다. 김정은의 힘자랑도 위험하다. 문제는 대처할 능력과 지혜가 현저히 부족한 우리네 지도력이다. 우리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이 간절하다. 어느 때보다 우리의 기도가 요구된다.
오늘은 마침 장애인 주일이기도 하다. 전국에는 수백만 명의 장애인들이 있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일 때문에, 자신의 평생을 사회적 각가지 차별로 인하여 주어진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애환(哀歡)과 아픔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환경은 옛 보다는 많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우리 안에 엄존하는 차별의식은 여전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이들이 비장애인들과 전혀 차별 없이 공존하고 공생하는 세상 만들기 위해, 우리 교회가 더욱 수고해야겠다.
이런 때 오늘의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시선을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승리를 안겨 줄 차원의 세계를 바라보도록 이끌어 준다. 곧 죽음을 이겨 낸 부활(復活)의 세계이다. 부활 세계는 단순히 죽음만을 상대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부활은 인간의 모든 시련과 고통, 아픔과 슬픔, 장애와 통증, 애환과 눈물, 방황과 번민, 외로움과 단절 등등의 모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차원의 불의한 것들에 대한 극복이나 승리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자체를 복음(福音)이며 복음의 핵심으로 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바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세상에 확인해 주셨기 때문이다(요11:25 참조). 그것도 인간 최후의 한계인 죽음을 이겨 내신 주역이고, 그 부활 이후에까지 접할 수 있을 영원한 생명(永生)도 안겨주신 주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매우 주목할 일은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가 이러한 생명과 부활의 주이신 줄을 모르고, 그를 아예 이 지상에서 죽여 없애려고 잔인한 모의(謀議)를 했고, 또 실행까지 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죽이면 끝난다’는 그들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하여 예수 죽이는 일을 모델 삼아 실험을 전개하였다. 오늘 복음서 본문 내용과 앞뒤 배경은(11장 참조) 예수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다’는 선언에 맞서서, ‘부활은 무슨 부활이냐, 인간은 죽으면 끝나는 것이다’라는 세속적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대결의 한마당을 생생히 보여준다(요11:45-53 참조). 그렇다면 그들의 집단적 시도는 성공하였는가?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의 주되심을 확인시키고자,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이끄셨다. 예수님은 그런 당신을 입증하시고자, 평소 사랑해 왔던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안장되자, 바로 그의 무덤으로 직접 찾아가셔서 그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살리시는 부활 행위를 친히 선보이셨다(요11:1-44 참조). 이 사상 초유의 나사로 부활 사건은 현장의 목격자들이 많아서 금방 온 유대에 퍼졌고, 그로 인하여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기 시작할 정도였다(11:45절).
그러면 이런 나사로를 살려내신 놀라운 사건을 주도하신 예수는 그 싸움에서 승리하셨는가? 아니다. 충격과 여파는 컸지만, 본격적인 승패의 대결은 아직 남았다. 그것은 남을 살린 예수는 과연 자신에게 가해진 죽음까지도 이겨 낼 것이냐는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단계까지 완벽히 죽음을 이긴 모습을 온 천하에 보여줄 수 있어야만, 예수는 비로소 부활과 생명의 주가 되신다. 곧 남을 살리는 일인 전반부와 자신도 살아나는 일인 후반부가 함께 완성될 때, 비로소 예수에 관한 계시는 진리가 되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도 절대적 믿음을 안겨준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의 예수를 향한 증오와 미움과 고발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모든 악한 행위들, 그리고 그들의 고소를 듣고 결국엔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내어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모든 행위는,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부활 신앙을 부정하고 살아온 천박한 무리인지를 입증한 일이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에서 예수야말로 진정한 부활의 주이심을 입증하게 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쓰임 받았던 들러리 들이었다.
1. 복음서 / 요11:17-44 /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본문에 나타난 사건의 주도자요 핵심은 예수이시다. 그는 당신의 때가 임박하셨음을 아시고, 당신이 세상 만민에게 누구신지를 밝혀주시는 일에 집중하셨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전하려 하신 메시지는 바로 ‘당신은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다’(25절)라는 점과, 그러기에 당신의 그러한 계시(啓示)를 받아들여 ‘믿는 자들은 죽어도 살 것이요,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25-26절)는 점을 온 세상에 고지(告知)하신 일이었다.
이와 함께, 예수님은 당신을 좇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면서, 압박하듯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하셨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예수가 당신의 부활의 주이심을 모두에게 알리는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도 당신을 부활의 중보자로 알아서, 사람들도 당신의 그 부활의 은혜를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결코 당신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심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예수를 부활과 생명의 주로 믿느냐 안 믿느냐 여부는 그 사람의 구원과 영생을 결정짓는 요건이 되었음을 확실하게 공지한, 곧 ‘새로운 계명(誡命)’으로 등장하였음을 알리신 것이다(26절). 이를 재확인하듯, 주님은 머뭇거리는 자매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라고까지 다독여서 일러주셨다(40절). 곧 당신의 백성들은 반드시 부활 신앙(信仰)을 보유하여야만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해주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 신앙인에게는 부활신앙(復活信仰)이 모든 신앙 목록 중에 제1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1) 예수께서 베다니의 남매들이 거주하는 상가(喪家)를 방문하실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17-18절). 상가엔 이미 많은 조문객이 왕래하고 있었는데, 예수가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다가 나와서, 예수를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이 주실 줄 압니다’(21-22절). 이런 수준은 동생 마리아도 보유하고 있었다(32절).
2) 주님이 통보하시듯 말씀하셨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 그러자 마르다는 그 부활이 마지막 날에 있을 줄로 받아들였다(24절).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었다. 종말과 최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곧 부활과 생명의 주되신 당신이 계신 곳에서‘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을 통보하신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깨우심이다. 그가 현존(現存)하시는 곳에는 죽음이 극복되고, 반드시 생명이 되살아나는 일이 발생하리라고 알리신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가 계신 곳에는 생명이 흐르고 죽었던 자들이 재생(再生), 재활(再活), 부활(復活)의 생명‘을 새롭게 받게 된다고 하셨다. 곧 예수는 언제나 산 자의 주이심을 밑받침한 말씀이다.
3) 여전히 헷갈린 신앙에 머문 자매를 앞두고, 주님은 직접 부활의 역사를 집행하기 시작했다.
나사로 무덤을 친히 찾으신 것이다. 그의 시신은 이미 나흘째 안장된 상태였고, 돌무덤으로 인봉까지 되어서 바깥세상과도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 놀라운 장면은 도중에 눈물을 보이신 모습이었다(35절). 인간들과도 함께 슬픔을 공감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신 장면이다. 무덤 입구에 서신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지시하셨다. 당황한 마르다의 만류도 없지 않았으나, 주님의 지시가 준엄하였기에 돌을 옮겨 놓자, 주님의 하늘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감사기도와 함께, 큰소리로 명령하셨다(39-42절), ’나사로야 나오라‘(Lazarus, come out!)(43절).
4) 결과는 어땠는가? 죽음이나 사망 권세도 예수 그분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함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모습이 펼쳐졌다. 사지(四肢)가 베로 동인 채 잠들어 있던(11절) 나사로가 주님의 명령대로 일어나 산자의 세계인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주님이 또다시 명령하셨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44절). 여기서 우리는 죽은 자 나사로에게 시선을 집중하려 하지 말고, 죽음까지도 그의 명령을 거스릴 수 없이 복종하게 되는 예수의 권세에 집중해야 한다. 그는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계1:18참조). 바로 그 부분이 우리가 그를 우리 생명의 주요, 영생을 안겨 주실 구원자로 믿게 되는 이유이다.
2. 구약 / 욥33:14-18, 23-28 / “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mediator)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ransom-몸값)을 얻었다 하시리라 ”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매우 특별한 배려의 방법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연약한 인간이 범죄하여 그 받게 될 형벌(刑罰)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 받지 못하는 절망적 상황에 처할 때, 그를 대신하고 대체할 수단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그가 용서받고 형벌을 면하게 되는 기회까지 부여되는 영적인 제도를 두신 일이다. 예전에, 레위기에서 본 희생양인 아사셀 염소도 그런 류이다(레16:10).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중보의 영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영으로도 소개하셨다(요14장). 바울도 같은 입장이었다(롬8장).
하지만 정작 가장 확실한 제일의 중보자는 예수 자신이시다. 세례 요한은 이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는데(요1:29), 이는 예수의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역 자체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 인간들을 돕고 깨우치며 살려내어서 최후로는 당신 나라의 영원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오셔서 펼치신 중보 사역이다. 물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일 모두도, 우리 구원을 목적으로 행하신 중보 사역들이었다.
앞의 복음서에서 죽었던 나사로를 대중 앞에서 살려내신 예수의 행태도 절대로 당신을 과시하고자 하심이 아니었다. 연약한 우리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부활과 생명의 세계에 눈이 뜨고 또 그 길을 열어 줄 예수 당신을 믿고 따라와서, 당신과 함께 영생의 길에 참여하게 하시고자 하는 뜨거운 배려와 사랑에서 보여주신 행위였다. 실로 최고의 중보 행위를 선보이셨다.
욥기 본문은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연약한 인간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잘보여 준 내용이다. 아울러 하나님은 주변의 중보자들의 역할에 대하여서도 매우 큰 관심을 갖고, 그들의 변호로 인하여 연약한 죄인들을 구원하실 실마리도 존중하시는 분이심을 확실하게 전한다(24-25절). 예전에는 우리나라에도 대리 곤장(棍杖) 제도가 있어서, 약한 죄인의 형벌을 대신하는 제도도 있었다.
더욱 주목되는 부분은 교회가 바로 중보(仲保) 공동체라는 점이다. 그 핵심 사역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일이다. 물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포용하는 일들도 해당이 되지만, 그래도 하나님과의 최선의 교통망인 기도를 통한 중보는 교회와 성도들을 훨씬 더 강하고 건강하게 묶어줄 밧줄이 된다(26-28절). 그렇다. 중보 기도는 서로를 돕고 협력하며 하나 되게 하는 큰 동력이다. 동시에 중보 기도가 활발한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하면서, 다양한 영적 각성과 체험을 나누며 서로 연합된 신앙공동체로 발전해 간다(14-18절).
3. 서신서 / 고전15:51-58 / “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 이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
부활장인 고전15장 후반의 말씀은 우리 최후(最後)의 모습에 대하여 언급한다. 여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한 우리의 위치를 전제한다. 그때의 우리에겐 이미 죽음과 사망에 대한 완전한 승리(勝利)의 선물이 선사 된다(57절). 사망을 비웃는 위치에 올랐기 때문이다(55절).
바울은 이런 모습이 아직은 비밀(秘密)임을 밝히면서, 마지막 때 우리는 다 잠잘 것(=죽은 것)이 아니요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變化)될 것이다(51절). 그 변화되어 승리하게 될 모습은 어떤 것인가? 죄와 율법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불사(不死)의 몸으로 변화되고 불멸(不滅)의 옷을 입고 살게 된다. 곧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변화된다(52절).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다(53절).
그때를 고대하며 아직 남은 여생(餘生)을 살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 그 정답이 바로 사도 바울의 마지막 권면이다. 곧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자. 이는 우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알기 때문이다“(58절).
o 우리의 몸의 부활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約束)된 내용이다. 하지만 그 부활은 나중에 신령한 몸과 옷으로 입기 전에, 먼저 앞서서 우리가 확보할 부분이 있다. 살아있는 지금, 바로 현재가 예수의 말씀과 빛을 좇아서 변화를 받아야만 되는 일이다. 부활이란 궁극적인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그 전조가 될 변화의 빛이 절대 필요하다. 말씀과 성령을 좇는 삶으로 사는 모습이다. 가장 큰 장애는 이 신앙으로 살지 못하는 데에 있다. 반면에 부활신앙에 확고해지면, 그는 어떠한 육체적 장애로부터도 평화를 누리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 점을 강조하고자 바울이 마지막 강조를 그렇게 하였다.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부디 부활신앙에 굳게 서서, 거듭난 모습으로 신실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