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9:1~11, 민 9:15-23, 행 26:1-23
부활절 둘째 주일이다. 만물이 좋은 때를 맞이하여 회춘(回春)의 기회를 풍성히 누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금주 며칠 후에(4.10) 실시될 제22대 총선거를 통해서도, 좋은 선량(選良)들이 많이 국정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그동안의 침체(沈滯)된 분위기를 쇄신하여 새롭게 재도약의 길로 들어서는 기회가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은 국민이 성숙한 분별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국가의 진정한 주인임을 잘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核)이랄 수 있는 부활은 육체의 죽음에서 살아난 일만을 말하진 않는다. 죽은 상태에서 깨어난 모습이나, 잠자는 상태에서 일어난 모습이나, 짓눌린 모습에서 되살아나 회복된 상태 등의 모두를 다 포함한다. 지난 주일에 확인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을 민족 차원의 집단적 부활로 평가하고 있는 까닭도, 우리의 기독교 부활 신앙이 그러한 광범위한 이해 차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때가 이번 총선에서 재현되길 소망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예수의 부활은 생명의 승리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 생명과 그 이후의 세계까지도 말하려 한다. 성경은 부활 이전의 세계에 관한 증언보다는 부활 이후에 펼쳐질 차원의 세계에 관하여 훨씬 더 많은 분량을 증언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의 사망 권세를 이겨 내신 일을 축하하는 부활주일만을 관심하고, 그다음 주일부터는 부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반 주일로 되돌아간 듯한 설교를 하면 안 된다. 부활 예수로 시작된 부활 이후에 일어난 숱한 일들에 관하여서도 더욱 열심히 증언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 둘째 주일의 세 본문은 부활 신앙이 주는 실질적인 능력과 선물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증언한다. 곧 부활 신앙의 힘이 무엇이며 그 능력을 접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말씀들이다. 세 본문의 공통적 증언은 ‘삼위(三位) 하나님은 무지와 죄악의 어둠에 속해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의 빛을 비추셔서 광명(光明)의 세계를 보게 하시는 분이시다’는 점이다.
복음서는 성자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盲人)된 사람을 그의 빛으로 눈을 뜨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증언자의 삶을 살게 하셨고,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훈련을 그의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시키셨으며, 서신서에서는 성령 하나님이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박해자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눈을 뜨게 하셔서 세상 모든 사람을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모습을 전한다.
우리는 이제 매 주일에 올라오는 부활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주목하면서, 부활 신앙이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는 다양성에 대하여서 눈을 떠야 한다. 특히 요한복음에 나타난 기사들은 예수 부활 후, 시작된 성령 사역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서 반영한 후대의 기록물들이 대부분이다. 그 점을 숙고하여, 우리는 부활 능력들에 대하여서도 눈이 밝아져야 하겠다.
1) 복음서 / 요9:1-11 /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분문은 예수가 누구신지, 특히 세상을 위해서는 어떤 존재이신지를 밝혀준다. 말씀의 소재는 나면서부터 맹인(盲人)된 사람을 예수께서 저 실로암 못에 씻게 하시면서 앞을 보게 하신 치유의 사건이지만, 결국 이 내용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가 이 세상의 모든 눈먼 자들을 뜨게 하시는 분임을 고(告)한다.
물론 여기서 눈먼 자는 육체적 장애를 모델로 삼고 있으나, 의미상으로는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든 영적(靈的), 정신적 시각 장애 인간 모두를 포괄한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들 대부분도 시각이 온전치 못하다. 치우쳐 산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제대로 듣지 못하며, 말해야 할 것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체 살고 있다. 그래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 있고, 객관적 시각보다는 편협하고 편중된 시각으로 살아간다. 실로 건강하지 못한 장애가 있는 자들이 바로 지금의 우리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 인간들에게는 예수가 필요하다. 예수는 인간을 만드신 창조자로서, 우리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올바름과 제대로 된 균형감과 중심을 가진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이 세상 어떤 인간이 대신할 수 없다. 부모도, 친구도, 윤리도, 환경도, 종교도, 이념도, 법도 우리에게 그 어떠한 완전함을 안겨줄 수 없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만이 온전한 해결책이다.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만이 우리의 불완전성을 해결해 줄 대안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다(5절).
1) 예수께서 만나신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그런 점에서 특정인을 한정한다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들, 곧 치유(治癒)가 필요해서 만병의 의사 되신 예수와의 만남이 꼭 필요한 사람들인 우리 인간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1절). 그래서 이름이 없다!
2) 제자들의 질문이 있었다. ‘대체 이 사람의 맹인 됨은 누구의 죄 탓인가? 자기 죄 때문인가,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인가?’(2절). 그런 인과응보식 시각은 당시 유대교도들의 고착된 사고방식이었는데, 제자들까지도 여전히 그런 의식에 매여 있었다. 이런 수평적이고 진상 규명식의 접근으로는 지식이나 토론을 하게 할 수는 있으나, 그가 안고 있는 삶의 아픔을 해소하고 치유하려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3) 길을 아신 예수께서 답하셨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3절). 이는 ‘탓’ 문화에서 탈피한 시각으로서, 예수는 그 맹인의 문제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영광(榮光)을 받고자 하여 주어진 질병이라는 수직적 시각 차원으로 그 문제를 보도록 요구하셨다.
하나님께는 인간에게는 없는 무슨 질병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에, 그 누군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호소하는 청원이 있으면, 거기엔 반드시 응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4) 주님이 길을 제시하셨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7절). 무슨 말씀인가?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이 있다. 이는 자신의 삶에 부여된 소명(召命)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의 부여하신 뜻을 분별하게 된 삶을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재(存在)의 소명을 알게 되면 어찌 될까? 눈을 뜨게 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확인하면서, 자신의 모든 얽매인 모든 멍에도 속박이나 저주가 아니라 은혜요 선물로 안식하게 되고, 모든 난관을 감사함으로 극복하며 산다. 삶을 무한히 긍정하며 살아가게 된다. 어떤 멍에 속에서도 죽음이나 저주의 삶이 아니라, 부활과 해방의 삶을 향유하며 살게 된다.
5) 그 결과는 주변에 놀라움을 안겨 준 인생으로 산다. 자신을 저주와 어둠의 세계에서 구원해 주신 구원자 예수를 생생히 증언하는 간증자로 살게 된다(8-11절). 자신에게 부활 생명을 안겨주신 이를 전파하는 새 인생으로 출발하게 된다.
2) 구약 / 민9 :15-23 / “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職任)을 지켰더라 ”
광야 생활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성막(聖幕)을 세운 날은 매우 의미심장한 날이었다. 나라와 민족의 구심점(求心點)으로서의 여호와의 성막 시스템이 구축이 된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며, 그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좇아 살아가는 족속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날이기도 했다. 물론 모세라는 인간 지도자도 있었지만, 그는 여호와가 세우신 그의 종이고 충성된 신하였을 뿐이지, 그가 중심은 아니었다.
이를 기뻐하며 입증하듯, 그 성막 세우는 날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주(主)이시며 선(善)한 목자이심을 나타내 주셨다. 바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란 두 기둥을 표징으로 보이며 그들과 함께 하시며 이끌기 시작하셨다(15-23절, 출40:34-38 참조). 이것이 그들이 그 뜨겁고 독충이 많아서 생존이 불가능한 광야에서 40여 년을 죽지 않고 살아서 새 하늘 새 땅인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된 비결이었다. 불가사의한 생존체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 바람에 그들의 삶의 문화는 완전히 하나님 여호와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일차적으로 애굽에서의 오랜 이방 종교문화와 우상 종교가 주는 의타적 성격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뜨거운 낮에는 구름기둥이 나타나 모두가 시원한 생활을 누리게 되면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여호와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어둡고 추운 밤에는 불기둥이 나타나 따뜻하고 빛이 있는 생활 속에서 안식하게 하시는 여호와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실로 부족함이 없었다.
1) 그들이 언제 행진했는가?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를 때였다. 어느 때 진(陣)을 쳤는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를 때였다(17, 22절). 구름이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 진영에 머무는 시간도 길어졌다. 가느냐 머무느냐의 결정은 절대 여호와께서 하셨다. 그때가 밤이냐 낮이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구름이 머무는 때가 얼마냐 라는 문제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틀이든, 한 달이든, 일 년이든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백성들도 한곳에서 머물러야 했다(22절).
2) 그러기에 성경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움직임을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때’로 알았고, 그 움직임대로 이동과 멈춤을 계속하며 지냈다. 성경은 이런 모습을 이렇게 압축해서 표현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at the LORD’s command-)라는 표현을 무려 8번이나 사용하였다. 이런 여호와의 명령을 좇는 삶의 훈련은 절대 가볍지 않다. 무척 번거롭고 엄청난 인내와 겸손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며, 철저한 자기 부정을 해야만 했고, 자신들은 전적인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백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는 불순종으로 인하여 떼죽음을 당했던 그들 조상의 반복을 미연에 예방하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민16장 참조). 그래서 하나님 백성의 모델이 나왔다.
3) 이런 광야의 신앙훈련은 하나님을 앙망하며 바라며 살게 하였고, 기도하는 백성이 되게 하였으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눈이 뜨게 되는 사람들이 되게 하였다. 살고 죽는 일이 자신들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복종하는 데에 있음을 배우게 되었다. 이런 집단적 훈련은 당신의 선택하신 종들에게도 적용되기도 하였다.
3. 서신서 / 행26:1-23 / “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
분문은 바울 사도가 재판(裁判)을 받기 위해 동족 유대인인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를 소명(疏明)한 내용이다(1-3절). 한마디로, 엄격한 율법주의자로서 반(反)예수 집단의 괴수였던 바울이 한순간에 돌변하여 그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그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목숨을 건 삶을 선택하게 된 까닭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이전의 율법 세계에서는 결코 볼 수가 없었던 부활의 능력과 영원한 세계에 눈이 뜨게 되었기 때문이다. 곧 앞의 복음서에서 본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은 후, 보게 된 그 사람의 경험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예수를 만난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요9:1-7참조).
1) 바울은 자신이 소속된 바리새파로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고소를 당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증언한다. 그것은 매우 역설적(逆說的)이게도, 자신의 조상인 바리새인들이 오래전부터 믿어왔던, 죽은 사람들의 부활(復活)에 관한 증언을 자신이 지금 전하고 있는 일 때문이었다(6-8절). 그러면 왜 평소 일반적 부활을 믿었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 신앙을 거부하며 그 부활을 전하던 그를 고소한 것일까? 대체 무슨 차이가 있어서일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일반적 부활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과 또 이 한 사람 예수의 부활이 모든 사람의 부활의 근거가 되고 보장도 된다고 믿고 있었다(4:2, 고전15:12-28, 골1:18참조). 하지만 사울을 포함한 전 바리새인들은 종말의 사건으로 발생한 예수의 죽음에서의 부활 사건을 그 임박성에서나 현실성에서 믿을 수 없는 것이라면서 거부했다. 심지어 그 일원이었던 사울은 그런 믿는 자들에 격분하면서 박해까지 했다(9-11절).
2) 이 난제 해결은 부활하신 당사자인 예수께서 그 박해자 사울을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그의 이름까지를 부르면서 찾아주셨기 때문이다(12-14절). 그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며 밝히시면서, 그를 소명(召命)의 자리에 세우셨다. 이는 그의 실로암(소명) 체험이었고, 모세 호렙산 체험이었다(출3:4). 그를 이후로는 당신을 본 일과 그에게 자신을 나타낼 일을 전할 종과 증인으로 삼겠다는 새 임무가 부여되었다(16절).
3) 바울은 자신이 받은 소명의 보다 깊은 내용도 밝혔다(17-18절). 주께서 자신을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에게 보내셔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함으로,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을 얻게 하며,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성도들이 하늘 영생의 기업을 얻게 하리라는 내용들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자기는 그 하늘에서 보이신 소명을 쫓아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은 자의 첫 열매 되신 일을 그대로 전하게 되면서, 이 재판정에까지 서게 되었음을 밝힌다(19-23절). 결국 아그립바는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만 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 자리에서 석방될 자이다고 선언하였다(32절). 소명은 더욱 자신을 뚜렷한 자리에 세운다.
o 부활의 영을 받게 되면, 죽음과 시련에 대한 회피가 아니라 그것을 대면하면서 극복하는 과정을 만나게 된다. 그래야 부활의 생명과 능력과 영광이 빛을 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부활은 진리와 사랑과 생명에 눈을 뜨게 한다. 그래서 불의와 비겁과 나태에 용기로 맞서게 한다. 그러면서 결국 승리하게 하며, 그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며, 영생기업을 받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