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23:50~24:12, 출14:15-31, 계 1:10-18
오늘은 2024년도에 맞이하는 부활주일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이지만,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각별하고 특별한 날이다. 왜 그런가? 이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란 분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이 세상 만물의 처음이자 마지막 되신 분으로 믿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계1:17). 동시에 우리는 창조하신 만물이 비록 인간에 의하여 망가져 있으나, 그러나 그에 의하여 새롭게 될 줄을 확실히 믿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계21:5 참조).
이러한 신앙은 우리 믿는 자를 세상 사람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게 하였다.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좇고,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삶을 품고, 어제가 아니라 내일을 기다리며 사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어찌 보면, 우리가 마치 이 세상 사람과는 다른 별세계에서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차원의 내용을 쫓으며 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베드로가 언급한 나그네요 순례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이 된 것이다(벧전1:13-참조).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 사는가? 바로 우리가 믿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란 분 때문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보여줄 수 없는 놀라운 모습과 세상을 생생히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죽음을 넘어서 삶의 세상을 보여주셨고, 절망을 이겨 낼 기쁨을 맛보게 하셨으며, 의와 용서와 평화의 힘으로 악과 폭력과 불의의 세력을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승리의 참 능력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죽음을 넘어서 전혀 새롭게 열리는 영생과 영원의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오늘의 세 본문의 시작은 그에 대한 뜨겁고도 생생한 경험을 했던 초대교회 식구들의 이야기를 풀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듣고자 한다. 그것도 유대인도 아닌 외국인들이면서도, 그 예수님 대한 믿음 때문에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A.D81-96) 권력으로부터 무참히 억압과 박해와 죽임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켰던 이들의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그들은 누군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편지를 받았던 놀라운 경험을 가진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교회들이다. 곧 에베소-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사데-빌라델비아-라오디게아 교회들이다.
마침 오늘은 약70여 년 전에, 우리나라 제주도에서 국가 권력에 의하여 거의 3만여 명이나 되는 무수한 양민(良民)들이 이념(理念) 문제를 빌미로 아주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일을 추모하는 <제주4.3 기념주일>이기도 하다. 현재는 평화의 섬으로 각인된 제주가 그런 치명적인 아픔을 품고 있다는 점이 놀랍기 그지없다. 그것도 동족이요 가까운 이웃들에 의하여 그토록 무차별 학살된 일도 그렇고, 그런 엄중한 죄를 짓고도 아무런 죄책 고백이나 사죄도 없이 지금까지 뻔뻔하게 살아온 우리네 모습도 부끄럽다.
특히 그때의 중심적 토벌 세력이 월남한 서북(西北) 기독청년단이란 단체가 지금의 반공단체나 극우 기독교 보수세력의 원조들과 연계된 상황이라서, 더욱 참담하다. 그들은 진짜 역사의 쓴 뿌리가 되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통합이나 공존을 위한 평화를 저지하며, 남북간은 물론 동족 간의 관계를 포함하여 서로 하나 되어야 할 우리 한국 기독교까지도 분열되어 살도록, 적그리스도의 앞잡이 역할을 해온 모습이어서 가슴이 너무 아프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런 초대 일곱교회의 아픔이나 우리의 제주 4.3 수난의 아픔을 공유하게 된 우리들이, 함께 시선(視線)을 모아야 할 대목이 오늘의 계시록 말씀 속에 있음이 감사하다. 그것은 계시록의 기록자인 선견자 요한이 그 시련의 시기에, 하늘의 주님으로부터 소환을 받아 그곳에 올라가서 보고 받았던 놀라운 메시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승리의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 내용은 무엇인가?
그가 하늘에서 뵌 ‘해와 같은 빛을 가진 주님’께서 엎드러져 죽은 듯싶었던 그에게 손을 얹으며 주셨던 놀라운 위로와 소망의 말씀 때문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陰府)의 열쇠를 가졌노니-’(17-18절). 그러면 이게 무슨 내용의 말씀인가?
세상의 처음과 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고하신 말씀이다. 세상 안에서는 별별 일들이 난무하지만, 그러나 세상의 처음과 함께 그 마지막도 그분의 손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알리신 것이다. 이런 경륜의 비밀을 주께서 7교회들에게 알려주신 데에는 큰 뜻이 있다.
곧 당신의 백성들은 이 세상의 흐름이 주님이 세우신 목표에 따라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거기에 인내로서 순복하라는 사인을 주신 것이다. 즉 이 세상의 실질적인 통치권은 외풍을 주도하는 듯한 세상 권력자의 손에 있지 않고, 오직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그 권세가 있기에, 주의 백성들은 종말이 가까울수록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라고 선언하신 주의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며, 그 확신 속에서 살아갈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명령에 전적으로 믿고 순복하려면, 이제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죽었다고 다시 살아나셔서 , 요한을 만나 그토록 위로와 비전의 말씀을 전해주신 부활의 주 예수에게 집중하여야 한다. 대체 그는 누구시며 그의 부활 실체가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이번에는 계시록의 기록부터 살피고서, 구약에서 선보이신 그의 다시 살리시는 능력의 실체도 살펴본 후, 복음서에서는 어떻게 당신이 실제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는지도 확인하겠다.
1. 서신서 / 계1:10-18 / “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선견자 요한이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놀라운 사건은, 이미 그곳에 오르셔서 자리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었다. 이 부르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곳 하늘에서 그가 보고 들은 것을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소아시아의 7교회들에게 보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0-11절). 이 교회들은 모두 지금의 터키 서부 지역에 있다.
주님은 이 교회들을 무척 사랑하셨다. 당신의 몸으로 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존재하는 시대의 현실은 너무도 가혹하였다. 특히 로마 황제를 신과 구세주로 숭상하고 강요하는 환경에서 예수를 자신들의 왕이요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섬기는 일은 매우 위험천만하기도 했다. 그 바람에 교회들의 신앙적 대처는 다양했다. 칭찬받을 만한 교회들도 있었고, 미지근한 교회도 있었으며, 흔들리거나 타협적이어서 책망을 들을 만한 교회들도 있었다(계2-3장 참조).
그러기에 교회의 주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연약함에 힘겨워하는 교회들을 돕고자 하셨다. 책망이 목적은 아니었다. 대신 교회를 살리고 견고하게 하며 다가온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도 승리할 수 있는 강고한 영적 체력 구축이 필요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그 첫 단계로서 부르신 이인 당신을 요한에게 보여주고 알리시는 일부터 시작하셨다(12-16절). 특히 당신이 전에(-세상에 인간들과 함께 계실 때)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영존(永存)하실 분임을 확실히 알리셨다. 무엇보다도 다시는 죽지 않고 사실 분이면서, 사망(死亡)과 음부(陰府)의 열쇠를 가진 분이심도 밝히셨다(18절). 인간 생사권과 심판권을 쥐신 분임을 알렸다.
특히 요한이 확인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일곱 금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사람) 같은 이의 모습이었는데(12-13절), 그 치장하신 모습은 이랬다. 발에 끌리는 옷, 금띠 두른 가슴, 흰 양털 같고 눈 같은 흰머리와 털, 불꽃 같은 눈,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발, 물소리 같은 음성, 일곱 별을 든 오른손,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는 입, 힘 있게 비치는 해 같은 얼굴을 가진 분이셨다(12-16절).
무엇보다도 그가 장악하신 지배권이 놀랍다. 그가 처음(the First)이자 마지막(the Last)이다. 이는 당신이 만든 모든 하늘과 땅의 주권이 당신 안에 있음을 밝혀주신 것이다. 이런 절대적 지배권을 보유하신 분이, 바로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다가 살아나신 분이셨다! 그곳은 오직 살아있는 이들만의 세상인데, 그러기에 잠시나마 죽음을 경험한 주님의 존재는 그곳에서도 더욱 구별되고 빛났다. 그 일로 죽은 자의 세계(음부)까지 주도하신 분이 되셨다.
그러면 이런 놀랍고 영광스러운 분이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언제 부활의 역사를 보여 주셨나? 특히 성육신의 예수 이전에는 언제 당신의 부활 능력을 보여주신 걸까? 물론, 삼위의 일원으로 창조주로 활동하신 일들은 있었다.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예언자들이 죽은 자를 살리는 데에도 함께 하시긴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죽음의 권세를 꺾으시고 구원의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신 주님의 모습은 흔치 않다. 이스라엘 역사의 대장정인 출애굽 할 때에 그 현장을 주도하신 분이 그 부활의 주님이셨다는 점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 현장을 소개한다.
2. 구약 / 출14:15-31 / “ 그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의 430년간의 혹독했던 종살이(?)를 청산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탈출하는 중에, 마지막 관문인 홍해 바다(the Red sea)를 건넌 장면을 소개한 내용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 자기들의 종들로 부리고 억압하며 살게 하려는 애굽의 바로의 세력과, 그런 불의한 속박과 억압의 권세로부터 자유(自由)하고 구원(救援)받으려고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며 부르짖은 자기 백성을 그 굴레에서 해방하시고 새로이 독립된 민족으로 당당히 출발하게 하시려는 그 하나님과의 대결을 전한 내용이다. 이에 모세가 지도자로 부름을 받아 시종 충성하였지만, 이 싸움의 주도자는 전적으로 여호와이셨다.
이 과정에서의 하이라이트는 애굽 군대의 추적을 피하여 이스라엘이 바다를 육지로 걸으며 건넜고(22절), 애굽 군대와 모든 병거와 마병들은 이들을 다시 붙잡아 오기 위하여 그 뒤를 추적하며 바다 가운데까지 들어왔다가, 모세의 지휘에 따라 양 벽을 이루던 바닷물이 다시 합류하는 바람에, 그 바로 군대가 결국 하나도 남지 않고 그 바다에서 모두 몰사(沒死)당하는 대(大)참사가 발생한 일이었다(26-30절 참조).
그 바람에 약자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에서 살아났고, 그 대적 세력들은 집단 몰사하는 대 심판을 받았다. 이런 여호와의 살리시고 죽이시는 큰 능력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때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인 모세를 믿게 된다(31절). 이런 죽음과 부활의 집단적(集團的) 경험인 출애굽 사건은 그 후 그들 민족 신앙고백의 핵심이 되었고, 그들을 모든 우상숭배에서 떠나 오직 여호와만 섬기는 믿음의 백성이자 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였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이 출애굽 사건들을 민족의 집단적 세례(洗禮) 사건으로도 비유하였다(고전10:1-5참조). 확실히 이 사건 이후의 이스라엘과 이전의 이스라엘은 하늘과 땅처럼 달라졌기 때문이다. 삼위(三位) 되신 하나님은 그때에도 이미 이렇게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여호와로 선명히 존재하시면서, 당신의 백성들을 생성해 내셨다.
3. 복음서 / 눅23:50-24:12 / “ 두 사람(천사)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
복음서 본문은 부활의 주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살아나신 실체를 온 세상에 보여주신 곳이다. 본문은 두 마디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23장) 당사자이신 예수께서 그의 시신 처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통해서, 그가 세상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던 모습을 확증해 준다.
후반부는(24장) 그가 부활하셔서 빈 무덤을 남길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동시에 그 부활을 믿기엔 너무 놀랍고 기이하여, 제자들까지도 그 순간은 확실한 믿음엔 이르지 못할 정도였고, 다만 천사가 회상하게 한 주님의 이전 부활 예고만 의존하게 하였을 뿐임을 전한다(8-12절).
1) 예수가 죽으신 후, 그의 장례는 요셉이라는 선하고 의로운 공회원의 개입과 집행에 의하여 치러진다. 그는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예수를 처형하는 일에 찬성하지도 아니하였다(50-51절).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주검을 서둘러 처리하고자 한 것은, 안식일에 시체에 대한 무례한 처리방식이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 시체를 처리권을 요청했고 허락받아 집행했다. 예수의 시신은 세마포로 싸서, 아직 사람을 장사한 적이 없던 바위에 판 무덤 안에 안치(安置)되었다.
2) 이날은 안식일이 가까운 준비일(금요일 오후)였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그 무덤과 시체를 둔 모습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다(54-56절). 역사적 시간이다.
3) 안식 후 첫날(일요일) 새벽, 곧 제3일째 되는 날은 역사에 남을 기이하고도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예수께서 생전에 몇 차례 예고하신 바대로(눅9:22 참조), 그가 사망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의 부활로 인한 빈 무덤 사건은 더 이상 인간의 영역일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천사 둘을 보내셔서 예수 부활에 관련한 모든 시중을 들게 하셨고,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전하게 하셨다 -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1-7절).
o 예수 부활과 그를 향한 믿음은 이제 하늘의 일이 되었고, 영적인 일이 되었다. 오직 믿는 자에게만 그 세계는 경험될 수 있으며,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예수 부활은 세상의 온갖 거짓과 폭력과 단절의 세계를 넘어설 구원과 희망의 세계를 열어 줄 열쇠가 되었다. 성령은 부활의 영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선사하신다. 이제 남은 자는 성령이 주시는 부활의 생명을 새롭게 받아서, 그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새롭게 한다. 그리고 주님은 이들과 함께 일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