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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관리자 2024-10-01 (화) 20:42 2일전 21  

본문) 창 8:13-22 , 눅17:11-19, 골3:12-17 


오늘은 창조절 여섯째 주일이다. 그토록 무더웠던 여름 기운도 이제 넘어간 듯하다. 우리는 마치 몸에 난 열이 오랫동안 떨어지지 아니하면서 통증과 아픔으로 시달리게 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떠나간 느낌을 준다. 이런 일기 변화로 온 세상은 분명 심각한 몸살을 앓았다. 그러면서 이대로의 삶은 안되기에 응분의 변화가 있어야 함도 자각하고 있다. 교회들이 요즈음 시도하는 각종 <탄소금식 행위>들도 그 변화를 위한 일환이리라. 


그러나 이제 우리는 보는 시각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올릴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제껏 피조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제반 양상에만 놀랍게 들여다보았으나, 이제는 그 모든 피조 세계의 피조물을 친히 창조하여 만들어내신 조물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과 그 마음을 헤아려 보는 일에 집중하는 일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대자연도, 푸른 하늘도, 대지도, 바다와 온 대양들도, 공기와 대기도, 그 안에 생존하는 각종 생명체도, 모두가 그분의 작품들이잖은가! 


그런 당신의 작품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아름답고 멋진 모습을 잃고 처처에서 망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지켜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리고 아프시겠느냐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대형산불로 그 엄청난 산지가 소멸되고, 극심한 인간의 쓰레기 배출로 인해 바다 수온이나 대기 온도가 상승하면서 얼음 빙산이 녹아내리고 해수면이 급상승하여, 바다 생태계가 변질되면서 그 안의 생물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등의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천재지변들이 잇따르고 있으니-, 그 주인 되신 창조주는 또 얼마나 가슴 아프시겠느냐 말이다. 


왜 이런가? 조물주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다스리라’는 축복의 명령을 받은 인간들이 그런 조물주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 공의와 사랑으로 채워져야 할 자연과 환경을 자기의 욕망과 탐욕의 무대와 대상으로 악용해 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말 못 하는 피조물의 거친 탄식과 원망이 조물주께 이미 상달된 것이다. 그러기에 조물주의 허락하에 지금 이토록 생태계의 거친 역습(逆襲)이 우리 인간 세계를 잇달아 강타(强打)하고 있다.


마침 오늘 세계성만찬주일을 맞이한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와 징벌이 당신이 만드신 자연과 환경의 위력을 동원하셔서, 정신을 못 차리고 탐욕과 정욕과 배신의 삶에 빠져 지내던 당시의 세상 사람에게 무자비하게 심판하셨던 노아 홍수(洪水) 이야기로 듣는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우리가 맞이한 기후환경으로 인한 대공습 상황은 제2의 노아시대 상황을 엿보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서 무엇을 배우는가’가 문제이다. 


그때의 인간 사회와 지금의 인간 사회, 그리고 인간들의 속성들은 오랜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는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궁금하다. 우리는 대자연의 분노에서 조물주의 분노를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그리고 피조물인 자연의 아픔과 신음과 탄식 소리에도 과연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그래서 대자연의 역습을 당하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깨달으며 배우고 있으며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려고 하는가? 


그래도 오늘 세 본문 내용은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서의 갈등이나 대립이 아닌, 조화와 협력에 따른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는 노아의 영적 시도를 담고 있다. 놀랍게도 그 화해와 새출발 시도를 위한 대상은, 자신들을 공격한 자연이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인 여호와이시다. 이는 노아의 시야가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자연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공격과 생존을 위한 화해와 새출발을 가능하게 하실 주역으로 보았음을 말한다. 그는 자연도 인간도 모두 조물주 여호와의 것이며 그의 손안에 생존하는 대상들로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매우 중요했다. 


그 점에서 우리는 노아가 거의 한 해 동안 계속된 홍수(洪水)의 재앙을 비로소 거두어 주신 여호와께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보게 된다(13절 참조). 이제 그 내용부터 살펴보자. 


1. 구약 / 창 8:13-22 / “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aroma)를 받으시고 ---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


40일간에 밤낮없이 쏟아진 대홍수의 위력은 당시 최고봉인 아라랏 산과 주변의 모든 산들을 뒤덮을 정도로 온 세상을 물바다가 되게 했다(7:17-22 참조). 그러면서 근 1년간 지속된 홍수의 여파는 당시의 세상을 완전 초토화(焦土化)시켰다. 온 세상이 압도적으로 제압을 당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노아의 여덟 가족들과 그가 선택한 짐승들과 생명체들을 위하여 방주(方舟)를 마련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시의 인류는 완전 멸절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그만큼 세상과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분노와 실망이 온 세상을 덮어 해치울 만큼 크고 무거웠음을 말한다. 창 6장은 당시의 인류의 불의와 죄악이 얼마나 심각했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마음고생이 컸는지를 잘 전한다. 하나님의 후회, 단호한 심판, 새로운 다짐이 드러난 때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상과 인간을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비록 절대다수가 불의에 빠졌다 해도, 도매금 처리로 생존하고 있는 모두를 몰살(沒殺)하는 일은 결코 그분의 뜻이 아니었다. 가능성이 있고, 살려야 할 이유가 있는 대상은 반드시 살리시는 여호와이셨다. 바로 그 적합한 대상이 노아였고, 그가 거느린 가족과 생명체들이었다. 하나님은 불의와 죄악은 응징하시지만, 의와 선은 반드시 보상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노아 가족 구원의 방편은 방주(=선)였다. 인류사에 배가 등장한 첫 증언이 여기서 나온다. 물에서 생명을 건져내는 그릇으로 배가 등장한 것이다. 구원선에 탄 방주란 배에 올라탄 여덟 명의 숫자를 담아낸 뜻도 배란 의미를 담고 있는 중국 언어인 한자에까지, ‘배‘(船) 속에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곧 ’배는 8명의 사람이 탄 곳이다‘라는 세 가지 내용을 담아낸 합성어이다. 아주 옛날 노아 이야기가 중국 땅에까지 반영된 것 아닐까 싶은 문자이다. 


본문은 두 단원으로 묶어져 있다. 전반부(13-19절)는 노아 일행이 1년 만에 하선(下船)하는 장면이고, 후반부(20-22절)는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노아가 창조주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경배하는 모습이다. 하선의 내용들은 간단명료하게 전한다. 물이 걷히고, 땅이 말랐음을 노아가 확인했다(13-14절). 그러자 하나님의 하선 명령이 노아에게 떨어졌다. 


1) 노아의 행동거지는 여호와의 말씀에 있음을 보여준 장면이다(15-16절). 1년 만의 밝게 갠 하늘과 육지를 본 노아 가족들의 가슴은 얼마나 뛰었을까! 한시도 빨리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고, 여호와의 명령이 있기까지 기다렸다. 그런 후, 하선 명령을 받자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땅에 비로소 발을 내디뎠다. 벅찼을 거고, 하지만 막막한 현장 상황에 어찌할 바도 몰랐을 것이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자기들 생각과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생각과 뜻을 받는 일이었다. 노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2) 당시 하나님이 보신 노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성경 곳곳에 증언되어 있다(창6:8-10, 18-22, 7:1 참조). 노아는 당시 세상의 육체적 욕망과 욕구에 매달려 산 인물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과 뜻을 헤아려 거기에 맞추어 살아온 사람이었다. 가족들도 그렇게 이끌었다. 그래서 노아는 창조주와 소통이 가능한 존재였다. 그것이 하선한 노아가 모든 일에 앞서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고 엎드려 경배드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20절). 


3) 그의 경배를 기쁘게 받으신 창조주께서는 노아에게 당신의 깊은 계획을 두 가지 밝히셨다(21절). 하나는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것과 ’이런 식으로 모든 생명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이다. 땅과 사람이 창조주의 진노로 멸망하는 모습을 하나님 자신이 크게 가슴 아파하신 것이다. 땅과 생명의 애꿎은 희생을 중지하셨다. 


또한 심판의 방식에 대한 수정 예고였다. 아무리 매를 들고 때려도 죄의 속성에서 스스로 헤어나지 못할 존재가 인간임을 헤아리신 창조주께서는(21절), 이때를 계기로 당신의 심판의 방식을 대대적으로 수정하고 나오신 것이다. 여기에서 대속(代贖)과 속죄(贖罪)제의 방식이 선보이게 되었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 대속물이 되심도 나오게 된다. 매가 아닌 자각과 회개를 통한 새 존재의 창출 방식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4) 그와 함께 계절의 변화를 통하여, 인간의 수명과 한계도 분명히 정해 주기도 하셨다(22절). 


2. 복음서 / 눅17:11-19 / “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한 마을에 들어가시는 데서 만난 10명의 나병환자들에 대한 치유 사건을 소개하는 곳이다. 단순한 소개 정도가 아니라, 전원 예수로부터 치유의 은혜를 받아 완쾌되었음에도, 그 열 명은 두 부류로 갈라져서 자기들이 받은 은혜에 각각 대응하는 모습이 나온다. 9명은 아무런 사의(謝意) 표명도 없이 제사장을 만나러 갔으나, 오직 한 사람만 그것도 사마리아 출신 한 사람만 찬양하고 예수께 찾아와 엎드려 감사한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의 감사를 받은 순간에 강한 반응(反應)을 보이셨다. 즉 ’그 열 사람 중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그냥 떠나간 사람들을 찾으시면서, ’이 이방인(사마리아)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왔느냐‘라면서 깊은 아쉬움을 드러내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앞에 엎드려있던 그 사람에게 이렇게 축복하셨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5-19절). 여기에는 몇 가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1) 하나님은 자신이 받은 은혜와 사랑과 축복에 대하여, 그때를 놓치지 않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사람을 귀하게 구별해 주신다는 점이다. 추측건대, 그 남은 아홉 명도 그 후 제사장으로부터 정결 선언을 받은 후에는, 율법의 지침을 따라서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께 감사했을 것이다(레14:1-32 참조). 하지만 감사와 찬양은 그때와 장소가 지나거나 바뀌면 제 효력을 내기가 쉽지 않다. 항상 이동하시는 예수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찬양과 감사는 즉시 그리고 그곳에서 하는 것이 아주 효과적이다. 


2) 예수님은 즉시 즉각 하나님께 찬양하고 당신께 감사하는 그를 ’믿음‘이 있는 자로 규정하시면서, 구원(救援)까지 선포해 주셨다(19절). 그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구원받을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로 그 사람이 당신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구별해 주셨다. 그렇다. 구원은 다름이 아니다. 예수의 인정을 받고, 예수와 언제나 교제가 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런 사람은 하늘 아버지의 계속되는 선물을 받게 된다.


3) 이 구원받은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구약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반열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가 노아처럼, 홍수의 대환란에서 생존한 은혜를 입은 후, 즉시 여호와께 경배와 제사를 드리며 영광 돌리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생활은 어떤가? 무엇으로 나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며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점을 위하여 이제 서신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들어보자.


3. 서신서 / 골3:12-17 /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


교회 가족들에도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공존한다. 여전히 옛사람이 있고, 완전히 새 사람도 있다. 전자는 오랜 세월을 교회 생활을 했으나, 여전히 거듭나지 못하고 옛사람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새 인격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본문에는 후자의 모습과 그 삶의 내용이 올라와 있다. 이들이 바로 노아(구약)와 그 한 사람(복음서)의 계열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다. 그 내용을 확인해 보며, 내 설 자리도 찾자. 


1) 내 영혼과 신앙 인격의 유니폼을 입고 살아야 한다(12-14절). 하나님의 본성인 긍휼과 자비, 예수님의 품성인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옷 입어야 한다(마12:29 참조). 서로 간에 다소의 불만이 있더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하셨듯이, 서로 용납하며 피차 용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한다. 사랑만이 서로와 모두를 하나로 묶는 띠가 되기 때문이다. 


2) 교회 공동체가 언제나 그리스도의 평화(平和)가 자리하고 주장하도록 기도하고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주의 한 몸 공동체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불평불만이 자리하지 못하도록 서로 감사(感謝)하며 살아야 한다(15절). 


3) 무엇보다도 말씀이 풍성해야 한다(16절). 그래야 성도 간에 생겨날 감정대립에 의한 분열과 갈등들을 쉽게 이겨낼 수 있다. 그 바탕에서 지혜와 권면이 있게 하고, 시와 찬양이 흐르게 하며,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17절). 그럴 때,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게 된다. 


o 마침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군 선교주일이기도 하다. 군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는 군목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고 잊지 말자. 실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용사들이다. 창조 질서를 보전해야 하는 용사들이고, 내 믿음도 지켜내야 하는 용사들이며, 섬기는 교회와 가정과 일터도 건강하게 살려내야 할 용사들이다. 그러기에 할 일이 많고 규모도 크다. 이 일은 내 힘과 능력에 의지하려면 안된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강고한 관계 속에서 그의 능력과 은혜를 의지하면 다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노아와 저 사마리아인과 골로세 교회가 받은 교훈을 잘 배우고 익히자. 우리 대장 예수를 신뢰하고 소명에 감사하고, 믿음의 힘으로 승리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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