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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청년주일- 순교자기념주일

관리자 2024-03-05 (화) 21:21 7개월전 665  

본문) 요 16:25~33, 사63:1-6, 롬 8:18-27


사순절 넷째 주일이다. 날씨는 완연한 봄기운을 드러내고 있다. 나라는 곧 있을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기 위하여, 각 정당 마다 후보자를 내세우려는 공천(公薦)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 일이 중요한 까닭은 후보자가 좋아야 당선자들 많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뽑힌 이들은 자신을 추천해 준 소속 정당에 충성하는 일은 물론, 나라 살림하는 역할까지도 감당하게 되기에 중요한 인물들이 된다. 


그러기에 정당들은 자신들의 유지는 물론, 미래의 집권 세력으로서의 인적 역량을 제고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과 수고를 집중한다. 그런데 이런 미래를 위한 준비와 전력투구는 정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정들도 마찬가지이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가정을 현재에 되살리고 후대에는 더욱 성숙한 가계가 되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 경주한다. 자녀 교육에 목을 매는 까닭도 그 이유이다. 학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명문 학교로 자리매김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좋은 교인들을 양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많은 일들을 수행하게 하려 한다. 기업들이나 단체들도 마찬가지이다. 


의식이 있고 생각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 모두는 이렇게 자신들의 건강한 역사와 생명을 이어가기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하여,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좋은 것은 계승하고 부끄러운 것은 반성한다. 그리고 어제 보다 더 낳은 현재가 되도록 모든 수고를 경주한다. 동시에 영광스러운 미래의 주역이 되게 하고자 엄청난 투자와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서 아름답고 명예로운 역사를 이어가게 한다. 


만일 그런 깨어 있는 정신과 의식이 부재한 인물이 나라를 이끌고, 가정이나 교회나 단체를 책임지게 된다면, 그런 곳은 어찌 되겠는가. 마침 지난 금요일은 3.1절 105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날의 기념식에서 행한 윤 대통령의 대일본 인식에 관한 문제가 여전히 화제이다. 그는 당시의 침략자인 일제(日帝)를 향해 우리가 외친 독립 만세를 ‘일본과 우리와 서로 함께 잘 지내자’라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일본은 여전히 우리의 발전을 위한 중요 파트너라고 일본을 감싸고 도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대일본관이 매우 유감이며, 독립 만세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뭉뚱그리는 내용엔 큰 분노를 느낀다. 그러면서 동족(同族)인 북한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화해와 평화를 포기한 대결 구도 차원으로만 몰아붙인 것도 아주 유감스럽다. 


마침 오늘은 교단이 제정한 청년 주일이며 순교자기념주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미래를 걸머지고 가야 할 젊은이들은 우리 역사엔 최상의 자원들이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교회가 급속히 퇴락하는 가운데, 우리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교회를 등지고 있음은 더욱 안타깝다. 왜 이런 현상이 되었을까? 원인이야 많겠지만, 기존의 교인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가치 있는 신앙의 유산을 제대로 물려주지 못했거나, 본을 보이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싶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울러 순교자들은 우리 교회들의 자랑스러운 유산이기도 하다. 그들은 주의 복음을 수호하고 교회를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과 진리에 목숨을 걸고 씨름하다가 죽임을 당한 분들이다. 그들은 교회의 씨앗들이며, 우리 믿음의 걸음이다. 그러기에 후손인 우리들은 그들의 피 값이 헛되지 않도록 깨어 책임을 다하는 믿음의 전사들이 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도 우리의 현실 타협적인 죽은 신앙은 크게 부끄럽다. 두려운 것은 이런 나약한 신앙으로서는 그 어떠한 생명의 역사나 영광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고, 역사의 단절만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마침 오늘 복음서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 올라와 있다.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 고난 직전에, 제자들과 우선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구원 역사 이어가기를 주도하신 일이다. 이 문제, 곧 당신이 본향인 하늘에 오르셔도, 그간의 행하여 왔던 생명 구원 사역이 제자들에 의하여 차질 없이 계속되는 일을 예수님은 절대 이루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이 과제를 해결치 못하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무가치해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제자들이 홀로 있어도 담대하게 선교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일깨우셨다. 그래서 당신의 지상에서의 사역이 제자들에 의하여 차질 없이 계승(繼承)되게 하셨다. 


이런 성자 예수님의 모습은 그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방법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엘리야의 시대를 마감하며 그를 하늘로 부르시기 전에, 그에게 후계자로 엘리사를 불러 기름 부어 대신하게 할 것을 지시하셨고, 그 일로 인하여 엘리야 못잖게 큰 역사를 이룬 엘리사 시대가 펼쳐진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왕상19:16-21 참조). 그렇다. 건강한 역사는 자신의 대로 끝나지 않는다. 더 크고 광대한 양질(良質)의 미래로 계속된다. 


구약의 이사야의 증언에서는 이런 역사 발전과 갱신의 주도권이 패역하고 나약한 인간 집단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이고 공의로우시며 구원의 능력을 보유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펼쳐지는 일임을 밝혀 준다(사63:1,3-5참조). 서신서인 로마서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 구원 역사 세우기가 삼위 되신 성령(聖靈)의 기도 도움을 받게 된 피조물(被造物)들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뜻을 펼칠 때 그 빛을 보게 될 것을 예고한다. 그 모습은 썩어짐에서 해방되고,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는 모습이다. (롬8:20-27, 요16:26-27,33 참조)


1. 복음서 / 요16:25-33 / “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예수님에게 제자들과의 이별할 때가 임박했다. 비록 육신적 이별이지만, 그러기에 아직 여린 제자들에게는 그 충격과 고통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그 난감한 부분을 해소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 영적 무장에 심혈을 쏟으셨다. 첫째는 당신이 가실 곳을 알리셨다. 바로 당신을 보내신 하늘 아버지에게로 가심을 알리셨다(16:5, 14:1-4). 그리고 다시 오실 것도 예고 하셨다(14:3). 그런데 이 지점에서 주님이 각별하게 챙겨주신 내용이 있었다. 


바로 당신의 떠나심이 제자들에게는 유익(有益)할 것이라는 점이었다(16:7). 그 까닭은 당신을 대리할 또 다른 위로자요 도우미인 보혜사(保惠師)인 성령이 그들에게 오실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보혜사는 진리의 영으로서, 그들 안에 들어와서 스승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생각나게 하고 장래 일도 알려주시며 주의 영광도 드러내실 분이셨다(16:13-15). 


그러면서 주님은 떠나신 예수와의 교통을 이어가기 위하여, 그들의 새로운 하늘 아버지와의 교제 방법도 안내해 주셨다. 그것은 당신 예수의 이름으로 하늘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을 기도(祈禱)와 간구(懇求)로 구하는 일이었다(25-26절).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그들은 이미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고, 또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분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27절). 만일 이러한 기본 여건이 구비(具備)되지 못했으면, 기도나 하나님과의 교제나 응답 모두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그들은 이제 그 단계를 넘어서 있기에, 기도만 하면 그때부터는 스승 없는 그들만으로도 모든 구원의 사역을 이 땅에서 펼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기도의 문이 열리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결이 이루어지고, 교제하게 되며, 세상을 이길 능력이 공급된다. 곧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면 먼저 성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동시에 그 기도의 내용과 뜻이 충분히 전달되고 응답 되도록 그 중간에서 성령께서 도우신다(롬8:26-27절 참조). 그리고 기도는 성자이자 우리의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하고 마감한다. 곧 한 기도 속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삶과 상황에 개입해 들어오실 자리를 마련해 드리게 되면서, 그가 제공하시는 각종 역사를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아, 기도가 얼마나 큰 선물인가-!


따라서 주님이 안겨주신 기도의 분부를 즐기고 살게 되면, 우리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게 되고, 결코 어떤 처지에도 외롭지 아니하며,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 혹 육체적으로는 환난과 시련을 겪을 수 있어도, 결국 기도와 믿음으로 담대하게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게 된다. 그때 그곳에는 반드시 하늘 아버지가 성령으로 그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세상에 패배하지 않는다. 주님처럼 세상을 이긴 자가 된다(32-33절). 


2. 구약 / 사 63:1-6 / “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


본문은 당신의 백성들, 특히 기도하는 이들을 위하여 싸움판에 들어오셔서 의로운 심판을 내려주실 여호와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그는 어떤 분인가? 한마디로 그를 대신할 자는 신이든 인간이든 온 천지 그 어디에도 없다. 오직 스스로 계신 분이요(출3:14) 공의만을 말씀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능력을 갖추신 분(뿐)이시다(1절). 


1) 이사야는 자신의 환상 속에서 본 역사의 현장에 등장하시는 여호와에 대하여 매우 긴장감 있게 소개한다(1절). 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세력의 대표인 애돔과 그 세력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수도 보스라를 피바다 되게 짓밟으며 심판하시고 자신의 백성에게는 승리를 안겨 주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의복이 붉고 옷이 포도즙 틀을 밟은 자 같은 이’(2절)란 표현은 그곳 에돔이 본래 포도주로 유명한 곳임을 비유하면서, 하나님께서 피비린내 나는 피의 심판을 그들 범죄자들에게 집행하신 모습을 설명한다. 


2) 이때의 여호와는 그 누구와의 상의나 협력도 없이, 당신 홀로의 능력과 공의와 의지만으로 이 모든 싸움을 주도하시고 심판하시며 해방하신다(1-3절). 주목되는 부분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방법이다. 인간이 주도하신 심판은 어느 한쪽을 편들기 쉽지만, 하나님은 양쪽 모두를 함께 살피고 판단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에, 매우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약하고 부족하여 긍휼과 자비가 필요한 자들에게는 아낌없이 은혜를 베푸시지만, 사악하고 교만하며 패역해진 무리를 심판하실 때는 대부분 자기들 내부의 자중지난(自重至難)으로 스스로 무너지게 하신다. 곧 적들이 자기들끼리 싸워서 무너지게 하신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네 원수 갚은 것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라고 권고한다(롬12:19, 신32:35 참조). 우리는 기드온 300명 군사로 수만의 미디안 대군을 휩쓸어 버리신 하나님의 방법을 잘 알고 있다(삿7장). 기도하는 유다왕 히스기야의 예루살렘 보호를 위하여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왕 산혜립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을 우리는 기억한다(왕상19:1-37참조). 유대의 식민지에서의 귀환을 위하여 바벨론 제국이 바사(페르시아) 제국에 망하게 된 모습도 우리는 안다. 


3) 그렇다. 여호와가 원수 갚으시는 일은 그의 마음에 있다. 그가 결정만 하시면, 그 누구의 도움이나 협력도 없이, 오직 그의 팔의 힘만으로 구원하시며 그의 의지만으로도 역사를 심판하시며 바로 잡아 세우신다(4-6절). 따라서 이런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권세자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모시고, 교제하며, 그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게 된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떤 존재가 되겠는가! 이 놀라운 은혜와 관계 수립을 위하여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의 성취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속해 죽으셨다. 따라서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다. 그게 바로 새 역사의 시작이다! 


3. 서신서 / 롬 8:18-27 / “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현재적 고난과 미래적 영광>이라는 주제를 세 가지 점층적 발언으로 증언한다. 곧 피조물의 탄식(19-22절)과 하나님 자녀들의 탄식(23-25절)과 성령의 탄식(25-26절)으로 우리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실현되어 갈 수 있음을 정리해 준다.


피조물은 각종 허무한 데에 굴복하고 살아가는 일에 탄식(歎息)한다. 이는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을 통하여 야기된 저주에 인간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넘겨진 까닭이다(창3:17-18참조), 그러기에 피조물은 저주에서 나오는 각종 탄식의 늪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고 싶어한다. 이런 일의 실현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이 출현하고 그들과 교제를 나눌 때 가능하다. 이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집단인 신령한 교회로 본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가? 피조물이 고대할 만큼 자유에 이르렀는가? 아니다. 그들도 탄식한다. 그들이 얻은 구원은 소망으로 얻어낸 것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 역시 진정한 구원, 곧 다시 오실 구세주 예수의 영접을 받아 양자(養子-adoption as sons)로써 자신의 낮고 천한 신령한 몸으로 속량(贖良)되기를 인내(忍耐)하며 기다리는 중이다. 


이런 사정을 직시하면서 바울은 궁극적으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개입과 간구를 통한 도우심을 보게 한다. 예수께서 소개하신 그 성령 말이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도 잘 살피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여 주시는 보혜사이시기 때문이다. 


o 그리스도의 제자이기도 했던 사도 바울 역시 순교자였다. 피조물의 탄식에 부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기도 했다. 바울이 지금처럼 예수와 복음으로 온 세계를 구원하는 선교 사역자의 모델로 세움받은 일이나, 우리 앞에서 복음을 위해 순교의 자리에 들어간 이들 모두는 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의 탄식과 기도에 대응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지금 우리는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노상(路上)에 있다. 피조물의 탄식 단계를 지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머잖아 양자의 영광을 입기까지 우리의 신앙 역사의 행진은 훨씬 견고해야 한다. 하나님 자녀의 확고한 의식과 정체성을 품은 자의 기도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강화되어야 한다. 청년일수록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분과의 동행이 내 삶과 후대에까지 이어지도록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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