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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4-02-27 (화) 20:51 7개월전 702  

​본문) 눅 15:11~32, 호14:1-9, 요일 1:8-2:6


사순절 셋째 주일이다. 완연한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삼월의 첫째 주일이기도 하다. 곧 있을 제22대 총선거를 통하여 이 한반도에도 정치와 경제와 남북 관계에도 평화의 새 기운이 동터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특히 온 국민이 마음의 눈을 밝게 떠서 나라의 거짓 세력과 참 세력을 제대로 분별하여 이태 전에 초래했던 이러한 국가적 난감한 시절이 또다시 이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런 때에 나라의 정치 영역에서 우리 기독교계와 관련된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21세기의 본회퍼(D.Bonheoffer) 목사를 생각하게 할 두 목사들의 등장이다. 본회퍼 목사는 대체 누군가? 독일의 신학자로서, 나치 히틀러 시대에 ‘미친 운전자를 끌어내려야 거기에 탄 모든 승객을 살려낼 수 있다’라는 논리를 펴면서, 당시의 자기 나라의 독재자요 세계 2차 대전을 발발한 전쟁광인 히틀러 총독을 암살(暗殺)하고자 모의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결국 옥중에서 처형당한 목사이다.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나, 지금까지도 그는 세계 신학계에 큰 별이 되어, 양심적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흠모하는 성직자요 신학자가 되었다. 


이런 본회퍼를 한국교회와 정치 현장에 먼저 끌어들인 인물이 있다. 그는 전광훈 목사라는 인물인데, 이는 지난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당 빨갱이’라면서, 자기와 자기 그룹이 그를 제거하는 데에 앞장선다는 점에서, 자신을 한국의 본회퍼라고 자칭하여 오랫동안 선전해 왔다. 그 바람에 그는 진짜 본회퍼 학파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자기들이 지지하던 윤석열 정권이 등장하자, 더 이상 자신의 본회퍼 성을 거론하지 못하고 지낸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런 이념논쟁이란 퇴행적 논제에 매달린 전광훈과는 성격이 판이한 목사가 등장했다. 바로 최재영 목사이다. 그는 미국 시민권자이면서, 오랫동안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의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그 누구보다도 한국, 북한, 미국 모두를 두루 섭렵하면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이룩되도록 활동해 온 인물이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동향인이었던 대통령 부인 김건희의 뇌물을 수수하는 행태를 직접 녹화하여 폭로한 일과, 김건희 자신이 마치 대통령인 것처럼 처신하며 국정의 인사권까지 휘두르며 행세하는 모습, 그리고 그들 부부가 천공이란 무속인의 제자가 되어 그의 지휘를 받으면서, 국가 대사를 집행하는 충격적인 일등을 연일 폭로하면서, 우리 국회로 하여금 <김건희 특검법>까지 통과시키게 하고, 또 대통령은 그것을 즉각 거부하게 하는 일까지도 유도하게 한 일연의 중요한 일들을 주도해 왔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최 목사는 윤석열 지지층으로부터와 보수 기독교계로부터는 ‘목사가 떳떳지 못한 행동으로 성직자의 세계를 욕보였다’라고 비난을 받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행동이 정권의 비리와 악행을 과감하게 고발하며 책망한 매우 용감한 일이라고 격려를 받기도 하는 대상이 되었다. 최 목사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는 자신의 일련의 행위들을 목회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위험 인물들이 집권을 계속하면, 온 나라와 백성들의 미래는 완전히 패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였기에, 그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폭로의 길에 들어섰음을 밝힌다. 


그의 행동과 증언을 보면, 그는 이미 칼날 위에 선 인물이다. 최근 이재명 대표를 검으로 목숨을 노렸던 또 다른 패악한 세력들이 지금 얼마나 그를 노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총선을 앞두고, 보수세력의 몰락을 막고, 그 반대 세력의 힘을 차단하기 위하여, 이 최 목사의 행보를 저지하고자 무슨 일이든 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저 전광훈처럼 자칭 본회퍼란 떠벌림은 전혀 없지만, 그러나 그의 행위와 그 증언의 방향을 보면, 그가 오히려 이 시대의 한국판 진짜 본회퍼의 자리에 들어선 인물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오늘 우리는 사순절 셋째 주일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듣는다. 하지만 문제는 ‘돌아온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깨닫고 있느냐는 데에 있다. 오늘 복음서에서 보면, 큰아들과 작은 아들인 두 아들이 나오는 데, 몸으로는 큰아들이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오히려 돌아온 둘째 아들이 몸으로는 아버지를 떠났었지만, 그 마음에는 아버지가 그의 전부로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돌아온다는 주제는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늘 교회에 꾸준히 참석한다고 해도, 그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지 않고 자기만 있다면 그도 역시 돌아와야 할 큰아들일 뿐이다. 몸이 바깥에 있어도, 그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그는 이미 돌아온 아들이다. 본래부터 하나님은 근본 ‘잃은 자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말씀은 자신의 신앙과 삶의 위치를 들여다보면서, 돌아와 있는가 아니면 돌아가야만 하는 자리에 있는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러면서 돌아와 있다고 고백할 수 있댜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지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실을 입증할 자료는 마음과 입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증으로 보여주는 모습에서 나타날 뿐이다. 곧 행동과 몸으로 진실을 입증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이 베푸신 축복의 선물은 감당할 수 없이 내리게 된다. 


1. 복음서 / 눅 15:11-32 /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본문은 흔히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 ‘탕자의 비유’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작은 아들은 오직 자신만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실현의 가능성만을 생각하며 몰두해 살았다. 아버지의 권리나 아버지의 감정에 대하여서는 냉담했고 무감각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서 멀리 떠나,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즐기며 살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죄와 죄인의 호사와 비참함, 자신의 한계에서 오는 세상의 비정함만을 진하게 맛보았다.


재산이 바닥나고 흉년이 깊어지고 일자리도 막히면서, 끼니 해결의 길마저 막혔다. 돼지 먹이인 쥐엄 열매도 먹기 힘들 정도였다. 굶어 죽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때야 비로소 가슴 뭉클하게 생각나면서 몸부림칠 정도로 후회되며 그리워진 곳이 생각났다. 바로 아버지와 그의 품이었다. 그곳에는 지금 자기에게 없는 모든 것이 풍성히 있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길은 오직 아버지께 돌아가는 데에 있음을 깨달았다. 염치없는 일이었기에, ‘아들이 아닌 종의 일원으로라도 받아달라’고 간청하자는 마음뿐이었다. ‘돌아가자’는 용기(勇氣)만이 필요했다. 


그렇게 지금까지의 자기를 내려놓고 오직 돌아가자며 용기를 내어서 아버지께 나아간 그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는가? 불행한 인간의 시간대가 아닌, 행복한 하나님의 시간대인 카이로스가 임했다! 곧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회복과 배상과 기쁨과 축복의 시간인 희년(禧年) 세상이 주어진 것이다. 실로 상상을 넘어선 놀랍고도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그를 영접하신 아버지로부터 은혜와 사랑과 축복과 은총(恩寵)의 파격적인 선물들로 덧씌워진 것이다. 이는 어쩌면, 이 땅의 우리가 머잖아 하늘의 아버지를 뵙게 될 때, 우리가 맛보게 될 그 차원의 복을 예고하신 내용이기도 하다! 이제 그 내용들을 확인해 보자. 


1) 돌아온 아들의 새 삶의 출발은 아버지의 영접으로부터 시작되었다(20절).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파격적 영접은 그만큼 아버지가 그를 고대하고 기다리심이 깊었음을 말해 준다. 


2) 마음에서 나온 아들의 참회(懺悔) 고백이 있었다(21절). 왜 다시 돌아왔는지를 밝히면서,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아버지께 범죄 했음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자신은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컬을 수 없다고까지 고백했다. 


3) 그러자 돌아온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아들의 지금까지의 더러운 신분(身分)에 대한 세탁부터 해주셨다(22-24절). 새 아들로 영접해 주시는 순간이었다. 제일 좋은 옷, 손의 가락지, 발의 신들을 입히고 키우고 신기셨다. 동시에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변의 모든 사람을 초청하여 큰 잔치상을 펼쳤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아들을 맞이했으니 어찌 즐거움을 나누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마음 때문이었다(눅15:4-10절 참조). 


4) 하지만 그곳에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만 하는 맏아들이 있었다. 그는 동생에 대한 정죄적인 마음만 가득했고(30절), 그런 동생의 귀환을 크게 환영해 주는 아버지에게도 심히 불만했다. 특히 아버지는 자신 곁에서 묵묵히 함께 해온 자신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내주어 잔치해 준 적이 없으면서도, 유산을 거덜 내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선 어찌 그렇게 큰 잔치마당을 베풀 수 있느냐는 것이다(29절). 바리새인의 그 마음을 대변했다. 


5) 시각의 차이 때문이었다. 맏아들은 돌아온 동생보다 그가 허비한 재산과 그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했으나(30절), 아버지의 관심은 물질보다는, 돌아온 자식 자체에 있었다. 특히 잃었던 아들이 회개하고 완전히 거듭난 모습으로 되돌아온 그 자체를,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다’는 시각으로 본 것이다(31-32절). 아버지는 그렇게 새로 거듭난 아들은 얼마든지 예전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할 자로 본 것이다. 바로 이 아버지의 시각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2. 구약 / 호14:1-9 /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예물을 주께 드리리이다 ”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언자인 호세아는 마치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멸망을 앞둔 백성들의 운명을 직시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용서하심에 기대를 갖고, 백성들이 각종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행위를 회개하고 여전히 그들을 기다리시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절박하게 외쳤다. 이런 기다리시는 여호와는 앞의 복음서에서 나온 아버지의 모습이었다(눅15:20참조). 


1) 그들의 당시 탈선(脫線)의 모습은 2-3절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예배는 마음과 뜻을 모아 말씀을 좇는 영적 예배가 아니라, 수송아지를 예물로 드리면 된다는 보험용 종교인 수준이었다(2절, 6:6참조). 또한 자신들의 안위와 구원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긴 것이 아니라, 앗수르 제국과 그들의 신에게 의뢰한 상태였다. 이런 모습은 꼭 지금의 정권이 동맹국이라는 미국과 일본의 군사력에다 우리의 생명을 의탁하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역사의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아주 힘없는 허수아비처럼 취급하는 무신론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2) 그뿐 아니다. 저들은 주변의 가나안 국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만들어 세운 각종 우상들을 수입하여 그것들에 경배하며 복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바람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고갈되면서, 백성들은 어둠에 빠져서 길잃은 양무리가 되어 살고 있었다. 영적 음란에 심각히 빠져들면서, 하나님을 향한 패역은 물론, 말씀과 율법이 주는 건강한 삶도 황폐해진 것이다. 


3) 그럼에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마치 둘째 아들의 귀가를 애타게 기다리시듯 하심을 애써 전한다(4-8절).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둘째 아들에게 대하시듯 선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눅15:21-24 참조). 곧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그들을 진노 대신 사랑하실 것이며, 비천한 신분 회복의 은혜를 베푸신다. 그래서 우상들이 못한 다양하고도 풍성한 삶의 축복들을 누리며 살게 하시리라 약속하신다. 오직 여호와만 행하실 수 있는 미쁘신 은혜를 돌아온 백성들에게 제공하시라고 약속하신 것이다(9절). 


3. 서신서 / 요일 1:8-2:6 / “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自白)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지금까지 우리는 죄(罪)에서 용서(容恕)함을 받고 자유(自由)로워지려고 할 때, 절대적이고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죄에 대한 자신의 진솔한 고백임을 확인했다(눅15:21. 호14:1-3참조). 즉 죄책(罪責) 고백(告白)은 자신이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데에 핵심임을 확인했다. 이것이 작동되지 못하면, 새 인생의 출발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함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죄의 고백을 누구에게,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 지를 상세히 안내해 준다. 죄의 고백은 인간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올린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할 때에는, 그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죄 사유와 빛의 자녀에로의 새 출발을 하게 할 유일한 통로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구원 질서이다. 


왜 이렇게 해야만 되는가? 하나님을 향해 죄를 고백할 이유는 하나님은 빛이시고 우리를 완벽히 아시는 분이셔서, 그 앞에 설 때 우리는 죄인임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시로 저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께 자백해야 한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를 십자가에서 우리와의 화목제물로 내어 주셨고, 동시에 우리의 연약함을 변호해 줄 대언자(代言者-Anrade)로도 보내어 주신 까닭이다.


따라서 우리는 저 영지주의자들처럼, 십자가의 예수 없이도 자신들 안에 있는 신적 지식이나 빛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등의 위선 교리에 빠져들면 안 된다.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화목제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서만 사죄를 올려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미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축복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게 된다(9절, 2:2참조). 


o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예수께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피를 쏟아내셔서 이룩한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에는 하나님 영광의 광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흐른다. 여기에 모인 성도들은 예배와 말씀을 통하여, 계속 자신의 죄와 수치를 씻고, 그가 주신 은총의 기쁨을 향유 해야 한다. 하나님께 겸손하고 정직하자. 말만의 사랑이 아니라, 서로 먼저 사랑함으로서 내가 여호와께 돌아온 존재요 내 안에 주님이 동행하심을 보여주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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