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문) 눅 15:1~10, 렘 31:10-14, 벧전 2:18-25
사순절 둘째 주일이다. 날씨는 벌써 봄을 느끼게 한다. 산수유, 매화, 목련, 개나리 등의 꽃부터 피고 보는 나무의 봉오리들은 세상에 얼굴을 내밀어야 할 때가 왔는가 싶어서 안달할 때일 듯하다. 마치 죽은 듯하던 초목들의 새 얼굴은 겨우내 찌들었던 우리들의 마음에도 한결 반가움과 설렘을 안겨줄 것이다. 또한 금방 시작된 듯한 새해도 어느덧 두 달을 보내고 있다. 마침 윤달이 들은 올해라서, 29일(목)이란 하루가 왠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할 듯하다.
게다가 오늘 주일은 3.1절 제105주년 기념 주일이기도 하다. 이 기념 주일 역시 계절이 주는 기상(氣像)에 매우 부합된다. 일제의 억압에 짓눌려 지내온 우리 조상들이 자신들은 죽지 않고 살아있음과 자주민(自主民)임을 목숨을 걸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온 세상과 지구촌에 외쳤던 미증유(未曾有)의 큰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 운동이 비폭력 운동이었고, 일제의 무도한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독립을 쟁취해 갈 것을 선포해서 의미가 더 컸다.
물론 이 1919년의 독립 만세 사건은 곧바로 민족 해방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하지만 그때를 개기(開基)로 우리에게는 민족혼(民族魂)이 살아나면서, 광범위한 독립운동으로 번졌고, 그 후엔 1945년의 해방과 함께 왕조(王朝)에서 벗어나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공화국(共和國)과 민주주의란 국가의 옷을 입고, 세계 열국의 일원으로 자리하며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완성된 국가 체재를 이루진 못했다. 그 후유증을 너무 크게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후, 하나님께서 안겨주신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채 오늘에 이르렀고, 1950년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매우 부끄럽고 쓰라린 이념대립을 바탕으로 한 대전쟁까지 치렀으며, 그때 갈라진 이산가족(離散家族)의 문제와 상호대결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현실적 과제로 무겁게 남아있다. 이런 데도 진짜 큰 과제는 지금의 상태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악화하여, 언제 또다시 제2의 동족 간에 재충돌이 발생할지 모를 만큼의 상황이 된 일이다.
이런 일은 동족의 문제를 어떻게 하든 화해와 평화의 차원으로 극복하고 해결해 가려는 의지로 접근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념의 종이 되어 북측 정권을 아예 배척하고 증오하며 거칠게 상대하려 하는 현 정권의 강경한 태도에 기인한다. 정말 심히 유감스러운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미국이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그들의 힘에 의한 우리의 평화를 보존하려 하는 제국 의존적 행태라서 더욱 부끄럽다. 그보다도 더 큰 힘인 민족의 자주적, 독립적, 공생 공존의 3.1정신인 평화 정신이 현 정권에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더욱 안타까운 일은 다수인 보수적 한국교회의 행태와 정권과의 결탁된 모습이다. 교회들마저 이념화되고 정부의 그런 사대주의적 경향에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취하기 때문이다. 참 교회라면 3.1정신의 자리에 서서, 민족혼을 깨우고 탈(脫) 사대주의적 평화 지향을 추구해야 할 터인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주권을 상실하고 피압박민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나선 목자 예수의 영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나라의 위기가 무엇인지, 위정자의 폭정이 왜 나라를 무너뜨리고 있는지에 대한 예언자의 소리와 그로 인한 십자가의 아픔이 없다.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나라는 오히려 편법이 판치고 자기 식구 보호하기에 급급한 행태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 소중한 법치주의를 무너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우리는, 당신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선 선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과 그를 따르는 그의 종들이 감당할 일과 품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하여 증언하는 세 본문 말씀을 받는다. 여기에서 먼저 우리가 헤아려야 할 대목이 있다. 모든 일에는 그 일을 주도하는 자가 있고, 그 일에 참여자 내지 혜택을 누리는 자가 있다. 또 주도하는 일에는 그 일의 성사를 위하여 몸 바쳐 헌신하는 자가 있고, 또 그 일을 두고 비판 내지 방해하려는 자도 있다.
그런 점에서 주도자가 경험하는 수고와 보람은 클 수밖에 없다. 하던 일이 성공하거나 잘되면 보람도 크고 기쁨과 환희도 크다. 위상도 커진다. 하지만 그 일이 실패하거나 진행하는 중에는 남다른 고뇌와 아픔과 충돌에서 나오는 시련들이 많다. 자연히 십자가와 고난이 따른다. 그럼에도 세상 역사는 이런 주도자들에 의해서 앞으로 발전해 간다. 다만 이런 위치에 서는 사람들은 특별한 마음과 영을 받은 사람들이다. 곧 서명자의 영을 받은 자들이다.
오늘 세 본문의 주역들은 예수와 그의 부르심을 받아 그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일꾼들이다. 그들은 남이 가지 아니한 길을 가는 이들이요 밟지 아니한 길을 밟고, 없던 길도 내며 가는 이들이다. 당연히 시련과 함께 보람과 기쁨을 누리며 사는 자들이다. 삶의 내용도 세상 일반인과는 전혀 다르다. 삶의 보람과 가치를 얻으려는 것은 분명하고 강렬하지만, 그 출처와 근저는 세상 일반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하늘의 광채와 빛이 있다.
1. 복음서 / 눅 15:1-10 / ”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본문은 예수의 길과 당시의 국가종교인 유대교의 길이 얼마나 다른지를 생생히 보여준 내용이다. 예수는 당시 유대교의 어긋난 모습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에 의하여 죄인으로 규정된 사회적 그룹들인 세리(稅吏)들을 찾으시고 어울리셨다. 하지만 당시의 대표적 종교인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런 예수의 행동을 비판했다(2절). ’어찌 이 사람이 죄인(罪人)을 영접하고 음식도 함께 먹을 수 있느냐‘라는 논리로 예수의 이질적인 행보를 거칠게 비난(非難)했다.
왜 이런 극심히 차이가 드러난 것일까? 바로 죄인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었다. 당시의 종교인들은 사회적으로 대표적인 죄인 그룹들로, 세리와 창기들을 꼽았다. 그들은 세리를 국민의 혈세를 거두면서 로마 정권을 섬기고 자신의 배를 채우는 부정한 집단으로 보았고, 창기(娼妓)들은 성매매로 살아가는 부정한 여자들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죄인들은 그들뿐만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도 그들의 정죄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이런 눈과 마음은 항상 상대에 대한 범법과 범죄 찾기에 활짝 열려 있었고, 상대방 속에 있는 고통과 고민과 외로움 따위에는 무관심하였다. 마치 요즈음 우리나라의 정치검찰들의 행태(?)와도 유사한 집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의 입장은 아주 달랐다. 그들의 처지를 매우 딱하게 보셨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모습에 연민(憐憫)을 가지셨다.
게다가 그런 행태로 인하여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란 공공적 낙인을 받고 종교인들부터 격리당하고 사는 일에 대하여 깊이 안타까워 하셨다. 주님은 그런 식의 인위적인 격리 행위는 그들의 삶을 더욱 돌아올 수 없는 막다른 곳으로 몰고 가는 행위로 보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버림당한 존재가 아니라 언제라도 돌아오면 하늘 아버지의 영접을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확실히 알려주시고자 하셨다.
1)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을 반드시 치유 받아야 할 환자로 보셨고, 당신은 그들을 왕진(往診)하여 치료하는 의사(醫師)와 같은 존재로 보셨다. 그 점에서 주님은 그들을 부정한 죄인들로 보고 사람들이 가까이하면 안 되는 자들로 간주하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는 천양지차로 달랐다. 이제 판단해 보자. 이 두 부류 중에서 누구에게 죄인의 변화와 구원을 견인할 기회가 주어지겠는가? 상대를 정죄하고 멀리하는 행동을 취하는 자일까, 아니면 힘들어도 계속 만나서 교제하며 선한 영향력을 안겨주는 자일까?
2)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처지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선 목자(牧者)로 밝히신다. 아울러 어둔 방에서 방바닥에 떨어진 한 드라크마를 절실하게 찾았던 여인의 처지와 같음도 밝히신다.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의 특징도 밝히셨다. 찾아 나서는 데서 오는 어려움, 외로움, 거기서 만나는 숱한 고통과 고난을 말씀하셨다, 동시에 그렇게 해서 비로소 찾았을 때 누리게 되는 환희에 감동과 기쁨도 함께 소개하셨다. 본문에는 5번의 ’즐기자‘는 표현, ’기뻐하자‘는 표현이 많이 나온 까닭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3) 주님의 이런 찾아 나선 자에 관련된 당신을 소개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신의 뒤를 따라나서게 될 수많은 자들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고 또 좌절하지 않고 잃은 자들을 찾아가는 사역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2, 구약 / 렘 31 : 1- 14 / ”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贖良)하셨으니 “
본문은 성부 하나님께서도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서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금 되찾아 오시는 분이심을 확인시켜 주신 내용이다. 한때는 백성들의 탈선으로 그들을 흩으신 적이 있었으나, 때가 되어서는 다시 불러 모으셔서 새롭고 풍요롭게 살아가게 하실 것임을 선포하셨다. 그때의 여호와는 마치 강한 짐승에 끌려간 당신의 양들을 찾아가 싸워서, 자기 울안으로 데려온 전사(戰士)인 목자(牧者)임을 알린다(11-12절).
그런데 그러한 여호와의 구원의 행위를 보고 나아가 온 세상에 전하라고 지시받게 된 대상은 자기 백성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이방인(異邦人)들이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처음부터 직간접으로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범죄한 일로 인하여 매를 맞고 형벌을 당하여, 나라는 바벨론에 멸망하고 백성들은 온 세상에 흩어지게 된 비극적인 일들을 친히 목격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와는 정반대 차원의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펼쳐질 터인 데다가, 이번에도 바로 그 이방인들이 그런 놀라운 광경까지도 직접 지켜보게 되었기에, 이제는 그 본 일들을 온 세상에 증언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 놀라운 일이란 무엇이었나?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이스라엘을 애굽의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 주셨듯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패망과 함께 시작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손을 통하여 건져내 주시는 일이었다. 곧 ’강한 자‘인 바벨론을 속량하게 하시면서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신 일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왜 주변의 이방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그런 모습을 잘 지켜보고 그 사실을 먼 섬에 전파하라고 명령하시는가(12절)? 여기에서의 ’먼 섬‘은 헬라의 많은 섬을 아우른 표현이다(10절). 그 까닭은 여호와는 당신이 택하신 백성은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반드시 기억하고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온 세상에 알리고자 함이다. 동시에 모든 백성들도 그런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양인 이스라엘이 누리게 되는 복은 이렇다(12-14절). 풍성한 희년의 복이다. 곧 주의 성전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영적 예배를 드리게 되고, 식량과 가축의 번성을 누리며 풍요롭게 사는 복을 향유하며, 그 사람들의 마음은 근심 걱정에서 벗어난 샬롬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12절). 처녀나 청년이나 노인 모두는 춤추며 즐거워할 것이다. 슬픔이 즐거움과 위로로 변하고 근심에서 해방된 기쁨을 얻는다(13절). 성전의 제사장도 풍요를 누리고 백성들은 여호와의 복으로 만족하게 살게 된다(14절). 마치 돌아온 탕자에게 베푼 아버지의 잔치상이다.
3. 서신서 / 벧전 2:18-25 /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본문의 수신자(受信者)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 전체이다. 이들을 향하여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하나님의 종의 길로 나아가셨음을 일깨운다(21절 상, 사53:4-6 참조). 동시에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우리가 의(義)가운데 사는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시고자 십자가를 지셨음도 상기시킨다(21절,하).
그 고난을 취하신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그 어떤 죄(罪)를 범하시거나 거짓된 변명을 늘어놓으시지를 아니하셨다(22절). 이런 모습은 누구나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닌데, 이 점에서 주님은 친히 그의 뒤를 따라 복음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될 모든 시련이나 유혹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본(本)이 되어 주셨다.
그뿐 아니다. 욕을 받으시지만 함께 욕하진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위협으로 맞서지도 않으셨다. 하지만 온갖 억울하고 서글픈 순간이 오면, 주님은 공의로우신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그에게 공정한 심판을 요청하는 것으로 대신하셨다(23절). 그러면서 주님은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자 친히 십자가에서 속죄(贖罪) 제물이 되셨다(24절).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찾았고, 의의 길에 들어서서 살게 되었다. 그의 찾은 바 된 양이 되었다(25절).
O 예수님은 길잃은 양들의 영원한 목자요 감독이며 보호자요 감시자이심을 주목하면서, 우리도 그 선행(길 잃은 양찾기)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존재임을 깨닫고, 그로 인해 고난 겪는 것을 회피하지 않고 꿋꿋이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겠다(20절). 의를 위한 고난과 시련이 없이는, 목자가 누릴 보람과 즐거움과 기쁨의 잔을 마실 수 없음도 깨달아야 하겠다. 이런 목자의 즐거움과 기쁨을 모른 체, 어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