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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신학교육주일

관리자 2024-02-06 (화) 19:54 8개월전 690  

분문) 막 2:23~3:6  창2:1-3, 롬14:1-12


주현절 여섯째 주일이다. 사순절을 앞둔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어제 설 민속절(民俗節)을 보낸 후 맞이한 주일이다. 여러분은 어제의 명절을 어떻게 보내셨는가? 보통 민속 명절은 당일을 전후하여 3일을 연휴로 보내지만, 그 사이에 오늘같이 주일이 끼어들면, 대체(代替) 휴일이 추가되어 4일간을 휴무하게 된다. 제법 긴 연휴를 보낸다. 따라서 이 기회를 적절하게 배려하게 되면, 이 기간은 모두에게 매우 유익한 때가 될 것이다. 


오늘은 또 매년 총회가 제정한 신학교육(神學敎育) 주일이기도 하다. 교단의 교회를 섬기도록 설립된 한신대학교의 신학부를 기억하며, 거기에서 양육 받는 미래의 교회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성원하는 주일이기도 하다. 특히 최근에는 우리 신학교가 전 신학생들이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여, 보다 유능한 목회자 육성이 되도록 총력을 경주하기 시작하였는데, 부디 우리도 이 뜻깊은 일이 잘되도록 기도와 마음을 모아야 하겠다. 


이런 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제정(制定)해 주신 안식일(安息日)에 관련된 올바른 이해를 갖고 믿음 생활을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시는 내용들이다. 사실 안식의 문제는 창조와 더불어 아주 중요하고 민감한 신학과 신앙의 주제가 아닌가! 안식은 영생(靈生)과도 연계된 차원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중에 안식일은 모든 하나님 백성이 준수하는 전체 절기들의 기본이다. 안식에 대한 이해가 올발라야 한다. 


안식일 이해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 종교는 당연히 생명력을 잃는다. 신자들의 신앙을 역동적으로 만들지 못하게 한다. 수많은 성도를 죄인으로 만든다. 오늘 복음서에서도 당시의 국가 종교였던 유대교가 안식의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안식일을 복되게 누릴 줄을 모르게 경직된 교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신랄한 공격을 받았다. 나중에는 이 안식일 논쟁에 따른 분노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꾀할 정도였다(6절).


이런 흐름은 우리 한국교회도 매우 오랜 세월 경직된 안식일관을 가르쳐 오면서, 그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어오기도 했다. 안식에 대한 복음적 이해도 빈곤했지만, 안식일을 어떻게 하면 복되고 생명을 살리는 절기(날)로 지킬 것인지에 대한 신앙적 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연고로, 안식일이 주는 유익과 축복을 폭넓고 생명력 있게 누리며 사는 성도들로 육성시키지를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말씀을 잘 배우고 익혀서, 참된 안식 신앙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자.


오늘의 말씀은 당시 유대교의 경직된 안식일관(觀)하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새로운 안식일관(觀)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모습을 전하면서,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의 뜻이 무엇임을 밝혀준다. 동시에 그 안식 신앙을 좇아 사는 교회는 어떤 주의가 필요한 지도 안내해 준다. 


복음서를 보면, 당시의 유대교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안식일을 사람 위에다 올려놓았다. 안식일 자체가 하나님인 것처럼 각인시킨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은 달랐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보셨다. 게다가 인자(人子)인 당신이 그 안식일의 주인이시다(28절)라고 까지 선언하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저들이 금기(禁忌)시하였던 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도 주저 없이 공개적으로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시기까지 하셨다. 


구약 창세기 본문은 예수의 그런 선언이 어떤 근거에서 나왔는지를 규명해 줄 근거로 제시된 내용이다. 곧 하나님이 천지 창조의 일을 마치신 후,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면서, 그날에 안식(安息)하셨음을 밝힌다. 이는 매우 중요한 안식일의 근원이 될 본문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이 안식을 하셨는지를 묻게 되면서, 예수께서 증언하신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다’고 선언하신 이유를 확인하게 된다. 


서신서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거룩한 안식일을 교회 생활 속에서 함께 누리며 살아가게 된 성도들이, 서로 간에 조심하고 유의(留意)해야만 할 부분들에 관하여 지침을 제시한 내용들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主)의 것임을 먼저 기억하고(8절), 자기주장만을 앞세워서 서로에게, 특히 믿음의 연약한 이들을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비판하는 언행은 절대 삼갈 것을 경고한다. 대신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直告)만 하면 된다. 


1. 복음서 / 막 2:23-3:6 / “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


본문은 당시의 전통적인 안식일 이해를 두고, 그 집행 과정에서 붉어진 문제점을 놓고,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예수 사이에 매우 날카로운 논쟁과 격론(激論)을 펼친 내용이다. 저들은 ‘쉼’과 ‘휴식’이라는 개념을 담은 안식일이란 신적 제도에는 그 어떠한 인간도 무조건 쫓아야만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안식일에는 그 어떠한 일이나 노동이나 인위적 활동은 완전 금지했다. 오직 여호와를 경배하는 일만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교리와 가르침은 결국 많은 문제와 한계를 드러냈다. 배고픈 일을 해소하기 위해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을 더 배고프게 하였고, 발병으로 인해 아파하는 이들에게도 고통을 가중했으며, 잇따르는 돌발적 긴급상황들에도 속절없이 당하게 되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들이 계속되었다. 문제는 거역 행동들이 그때부터는 그를 안식일 법을 위반한 죄인이 되게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범죄가 계속 쌓여가면서, 그들은 회복 불가능한 죄인들이 되어 살게 된 것이다. 


실로 <죄인 천국>을 만드는 안식일 법이 되게 하고 말았다. 거기에서 자유로운 자가 없는 세상이 되게 한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안식일 법은 사람을 구원하려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죄인을 양산하게 하는 악법(?)일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 그게 은혜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과연 의도하신 일이었겠는가? 그럴 리는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안식일 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의 취지와 운용을 잘못 사용하는 인간들(유대교)에게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시의 악법으로 오용되고 있던 안식일 법을 집행하고 있던 유대교 지도자들과 충돌하시는 일을 서슴지 않으셨다. 안식일 법 자체에 대한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 법 취지와 정신을 실종시킨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도전하셨다. 그 도전이 바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였다(27절). 이런 예수의 선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에 못잖은 파장을 온 지구촌에 안겨 주었다.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신 선언이었다. 그러면 이 선언이 왜 나왔는가? 


하나님에게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를 새삼 되돌아보게 하신 선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 정점(頂点)에 인간 창조를 두셨다. 그 인간은 당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것도 삼위일체적 특성(살-뼈-생기)을 담아서 만드셨다. 그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위임해 주셨다. 그뿐 아니다. 그들이 당신의 형상을 이루며 살도록 말씀과 지혜도 부어 주셨다. 그 어떠한 말씀과 그로 인한 제도들도 당신의 사람들이 건강하고 바르게 살게 하시려고 주신 것들이다. 괴롭히고 멸망시키려고 주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안식일도 사랑의 법이었다. 


그런 취지를 살려야만 하는 안식일 법이 지금 이스라엘 한복판에서는 백성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죄인들이 쏟아져나오게 하는 도구로 전락 된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현실을 현장에 오셔서 직접 목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그런 왜곡된 모습을 결코 가만둘 수 없었다. 안식일을 본래의 취지로 되돌려 놓으셔야만 했다. 그러기에 그 집행자들과 목숨을 건 치열한 논쟁에 뛰어든 것이다(23-29참조). 그 누구도 감히 거론하기 힘든 시대적 과제를 당신의 권위를 걸고 해결코자 앞장서셨다(28절, 3:6절 참조).


그렇다면, 안식일은 어떻게 누려야 하는가? 본래의 안식의 취지와 정신을 구현하려는 데로 가면 된다. 예수께서 안식일인데도, 회당에서 만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명분을 걸고, 그의 손이 회복되게 하신 일은 바로 안식일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취해야 할 일임을 선명히 가르쳐 주신 표본이었다(막3:1-5 참조). 물론, 안식일을 요용하는 일은 범죄이다. 당연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 돌리는 일은 최우선 과제이다. 하지만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은 안식일일수록, 더욱 집중해야 할 과제임도 잊지 말아야 한다. 


2. 구약 / 창 2:1- 3 / “ 하나님이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 창조의 정점에 안식이 위치한 일은 매우 주목된다. 창조가 시작이라면, 안식은 마지막이란 점이다. 알파는 창조요 오메가는 안식이다. 이런 구도는 우리 신앙에 깊은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토록 소중한 안식관을 얼마나 깊이 생각하며 지내는가? 창조 신앙 못잖게 안식 신앙도 분명해야 우리의 삶의 여정도 탄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목표가 분명하면, 과정도 탄탄해진다는 말이다. 보다 건강한 새로운 안식(安息) 신앙(信仰)관이 요청된다. 


본문에서 관점은 왜 여호와께서 모든 일을 마치신 후에 안식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그렇게 휴식과 쉼을 취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일하신 후에, 피곤하시고 진정한 쉼이 필요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런 공식은 전능자에게는 전혀 합당한 논리가 못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쉼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 바로 우리 연약한 인간을 위한 배려 때문이다. 노동하면서 살아가야 할 인간들에게 쉼과 안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바로 그 부분을 전수(傳授)시켜 주시려 함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은 인간을 위하여 있다’(막2:27)라고 외치신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이 안식일을 대할 때, 부담이나 억압으로 받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피곤한 나를 배려하신 하나님의 복된 선물이라는 생각으로 받아야 한다. 그러면 바로 안식일이 자신에게 복이 된다! 그런 마음으로 안식일을 맞이하고 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지각에 뛰어난 평강과 축복들로 풍성히 채워주신다. 이것은 체험자들은 다 아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배려에는, 우리 인간의 생체 리듬에 대한 배려도 포함된다. 개인적인 체력과 역량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인간들에게는 엿새간의 노동에 하루의 휴식이 절대 필요하도록 조물주가 인간을 제조하셨기 때문이다. 이 생체 균형을 존중하여 쉴 줄 아는 사람은, 당연히 건강한 모습으로 생산활동을 계속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균형을 무시하고 쉼이 없이 일에만 매달리면, 그것은 화(禍)와 재앙만을 불러들일 뿐이다. 


그 외에도 안식일 준수가 왜 중요한가? 잘 쉴 줄 알고 쉼의 맛을 아는 이들에게 참되고 영원한 안식의 그날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교우들에게 참 안식의 길을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안내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곧 만나게 될 영원한 안식을 설렘으로 대면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안식 훈련은 어떤 것일까? 안식의 주이신 하나님을 기쁨으로 만나게 하는 일이다. 육의 일이 아닌 영의 일이어야 한다. 그러면서 함께 하는 교우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기회를 얻도록 한다. 그렇다. 안식은 엿새와는 전혀 차원의 다른 하루를 성별(聖別)할 때 가능하다. 주와의 하루가 세상과의 엿새를 구원하게 하도록 이끄는 힘이 바로 안식일 힘이다. 


3. 서신서 / 롬 14:1-12 / “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본문은 앞에서 말한, ‘주(主)와의 하루’를 어떻게 성별 되게 잘 보낼 것인지를 성찰하게 하는 지침서이다. 그곳의 무대는 성별 받은 하나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敎會) 공동체이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고 믿으며 영원한 안식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함께 삶의 여정을 순례하는 무리이다. 그러기에 이들 서로는 평생을 교회에서 함께 만나 살아간다. 그러기에 혈육의 가족보다도 훨씬 더 삶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특이한 이웃들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교회들에게 매우 주의하여야 할 신앙 윤리(倫理)가 있음을 일깨워 준다. 아니, 이 권고는 교회에 부여된 안식의 나라 여정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하여, 반드시 인내와 겸손으로 지켜내야 할 필수적인 계명(誡命)들이기도 하다. 이게 준수될 때 우리는 참 안식에 이르게 되지만, 거부되어 파괴될 때는 마귀의 밥거리가 될 수도 있음을 강력히 지적해 준다. 


1) 믿음 있는 자는 항상 겸손하여 믿음이 연약한 자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1-4절). 그들은 아직 여린 믿음 때문에, 가르침을 소화 시킬 능력이 부족하다. 그런 자에게 비판과 차별을 앞세우면, 자칫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 있다. 따라서 비판과 판단의 전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그들의 변화를 인내와 온유로 기다리며 더욱 좋은 본으로 상대해야 한다.


2) 나만 주의 것이 아님도 알아야 한다. 여리고 부족한 상대방도 주의 것이다. 모두가 주의 것이기에, 어쨌든지 서로가 온전한 주의 것으로 용납되도록 돕고 협력하는 자세가 요긴하다. 나와는 다른 상대에게 ‘너는 틀렸다’라는 딱지를 붙이는 행태는 안 된다. 주의 판단의 몫으로 돌릴 줄도 알아야 한다. 다른 입장에는 신앙고백의 등급이 매겨져 있지 않음도 알아야 한다. 


3) 가슴에 더욱 새겨둘 경고(警告)가 있다. 교회에서 네 형제를 비판하는 일이나 업신여기는 일, 이 모두는 결국 그 자신부터 하나님의 심판대 앞을 피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10절).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피할 자는 그 누구도 없음을 명심(銘心)해야 한다. 자기만은 면제되리라는 생각은 오만이며 착각 중의 착각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서, 자신은 하나님께 무엇을 용서받고자 고할 것인지부터 성찰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다(12절).


o 신학은 교회의 진리 체계에서 몸의 뼈대와 같다. 그러기에 올바른 신학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 점에서 안식에 관련된 교리와 신앙 체계는 매우 정확히 선포되고 가르침이 전달되어야 한다. 안식일은 전적으로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구원의 도리이다. 영원한 안식으로 우리를 안내할 믿음의 체계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매우 기쁘게 준수되어야 하며, 서로를 사랑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고, 영과 육이 참 쉼을 제공하는 때여야 한다. 건강한 안식 신앙으로 우리 신앙의 활력이 도모되도록 더욱 힘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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