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2:22-35, 출1:15~2:10, 딤후 1:3-14
오늘은 성탄절 첫째 주일이다. 이번 성탄절은 금 주간으로(1.6/토) 마감하게 된다. 절기 규정상, 성탄절은 성탄일을 포함해서 12일간을 초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2023년도 성탄일을 지난 월요일에 시작하여 금주 토요일(1월6일)까지만 이어지는 바람에, 2024년도 첫 주일인 1월 7일은 성탄절 둘째 주일이 아닌, 주현절(主顯節) 첫 주일로 맞이하게 된다.
그러면서 오늘은 올 한 해, 곧 2023년을 마감하는 송년(送年) 주일이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의 여건으로나 매우 다사다난(多事多難)한 한 해였으나, 그럼에도 이렇게 건강과 평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지금의 우리는 주의 크신 은혜(恩惠)가 분명하다. 마침 오늘 밤은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까지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올 한 해를 어떤 마음으로 보내고, 갑진년(甲辰年-용띠) 새해는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으신가?
내 눈에는, 올해의 한국교회는 지난 코로나 3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체, 현저히 힘을 잃고 재기를 위해 몸부림하는 시기로 보인다. 그러면서 검사 독재로 인하여 탄식하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지내온 한국교회의 한 해였다고도 본다. 아울러 나라는 남북의 군사적 대치가 심화되어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경제력의 기반마저 무너진 여건 속에서 소상공인들의 삶의 기반이 무너져 내리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인구 절벽 현상마저 더욱 가팔라지는 일로 인하여, 나라의 내일이 매우 걱정되는 때였다.
하지만 이렇게 아픈 부분에 탄식을 하면서도, 그래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찾아 노래하며, 우리 교회와 백성을 추동해야 할 위치에서 산다. 그것은 창조주이자 우리 한반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우리를 추동하시기 때문이다(사40:1). 그러기에 부디 성령을 통한 복음의 거룩한 분별력을 받아서, 나쁘고 불편한 것은 과감히 떨쳐버리고, 새롭고 신선한 것들은 붙잡고 채우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이 되도록 하자.
그렇다면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시는가? 이는 앞을 내다보기 전에, 잠시 멈추어 서서 지금까지 음과 양으로 나와 우리를 돕고 응원하며 힘이 되어 준 이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도록 인도하신다. 이런 일이 필요한 이유는, 이런 성찰과 감사의 행위들은 우리가 앞으로 나가는 데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동력과 디딤돌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보라, 우리 그 누가, 주변의 도움이 없이, 자신만의 독자적 힘만으로 살아온 자가 있단 말인가!
마침 오늘 우리가 받게 된 세 본문 내용들은 모두가, 돕고 세워주며 서로를 하나님의 큰 인물들이 되도록 응원한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사례들을 대하면서, 내 삶에도 여전히 들어와서 나에게 힘이 되고 인물이 되도록 해준 이들을 찾아보면서, 그런 소중한 존재들을 선물들로 안겨 주신 여호와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도록 해보자.
복음서에서는 시므온이란 노인이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까닭은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여 정결 예식의 날이 되자, 엄마인 산모의 정결 예식과 맏아들인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아(獻兒)식을 인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때 마침 신령한 눈이 뜬 시므온이 아기의 구세주이심을 분별하고, 안내자 역할을 수행한다. 만일 그때 그의 아기 영접과 찬양의 행위가 없었더라면, 주님의 성전 방문은 마치 ‘주인 없는 객들만의 잔치’로 끝났을 것이다.
구약에서는 모세의 등장에 얽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전한다. 아기 모세의 등장이 가능하도록, 하나님은 많은 믿음의 여자들을 동원해 주신 것이다. 우선은 히브리 산파들이 십브라와 부아의 목숨을 건 활동이 눈부셨다. 태어나서는 가족인 어머니와 누이 미리암이 생존의 징검다리가 된다. 그리고 애굽의 바로의 딸인 공주도 예기치 않게 모세의 양모가 되어서, 이스라엘의 구원사의 매우 중요한 헌신자가 된다.
서신서인 디모데후서의 내용도 큰 의미를 담고 있다. 한 사람의 훌륭한 목회자를 생산하는 데에,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기도와 도우미의 사람들을 동원하시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젊은 목회자로서, 힘겨워하며 먹으면 체하기까지 하는 허약한 디모데를 돕기 위하여, 선배 목회자인 바울의 뜨거운 격려와 도움이 돋보이고,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의 후원이 그를 붙들어 세우는 요인임을 알게 한다. 실로 감동을 주는 증언이다.
이제 본문의 내용들을 통하여 이제 세부적인 내용들을 보다 세밀히 볼 터인데, 이 기회에 나의 경우는 어떤 상황인지도 성찰해 보자. 나란 존재를 하나님의 살아있는 주역(主役)이 되게 하시려고. 내 옆에서 나와 함께 하면서, 나의 조역(助役)이 되어 꾸준히 응원을 보내 준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자. 나의 시므온, 나의 서포터들(supporter)로서의 남자와 여자, 나의 선배, 나의 조상인 증조부와 증조모, 그리고 부모님들을 다시 생각하며 기억하고 감사해 보자.
1. 복음서 / 눅 2:22-35 / ”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
기록자인 누가는 아기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방문한 일을 전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산모(産母)인 마리아가 날이 차자 모세의 율법에 따른 정결(淨潔) 예식에 참여하기 위함이다(레12:1-8 참조). 다른 하나는 맏아들이 될 아기 예수를 율법이 따라 주의 거룩한 자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아(獻兒)식에 참여시키고자 함이다(출13:1-2,14-15 참조).
이 맏아들을 드리는 예식은 대치(代置) 예물로 산비들기 한쌍이나 어린 집비들기 둘로 드리게 되면서 드린 아기를 도로 찾는 예전으로 진행되는데, 여기에서는 그 구체적인 도로 찾음의 절차를 외면한다. 그 이유는 이 아기 예수는 ‘값을 지불하고 되찾을 수 없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과 그의 죽음으로 우리 모두를 속량해야 한다는 것을 누가가 이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를 드리는 이야기는 삼상1:11,21-28의 사무엘의 평생 드림과도 유사하다.
1) 이 과정에서 매우 주목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예루살렘 사람인 시므온인데, 노인으로서 신앙이 매우 깨어 있는 인물이었다. 누가는 그를 의(義)롭고 경건(敬虔)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한다. 메시아의 오심을 항상 기다리며 살아온 종말론적(終末論的) 경건성을 보유한 자로 보았다. 그에게는 성령께서 항상 그 위에 계셨다(25절).
2) 그는 언젠가 주의 성령으로부터 확실한 약속을 통보받은 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생전(生前)에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통보를 받은 일이었다(26절).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이었겠는가? 그런데 그 날따라 성령이 감동 속에서 그를 예루살렘 성전에로 인도하셔서, 마침 부모 품에 안겨서 들어오신 아기 예수를 대면하게 하신 것이다(27절, 10:23-24 참조). 그는 즉시 메시아 아기 예수를 받아 안았다. 성령이 안겨준 약속의 성취를 이룬 것이다. 아니 평생의 소원을 이루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28절).
3) 눈이 열리고 몸도 열린 그는 입술까지 열렸다. 실로 모두를 다 얻어낸 자의 감격(感激)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기 시작한 것이다(28-32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며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 내용은 예수께서 유대인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전 세계인)의 구세주가 되실 것임을 놀랍게 예고한 것이다(사42:6 등).
- 이런 시므온의 찬양과 신앙고백은 아기 부모 자신들의 영적 인식 수준을 뛰어넘는 증언이요 외침이었기에, 그 부모 자신들에게는 깊은 놀라움을(두려움도) 안겨준 일이 되었다(33절).
4) 최후에는 시므온이 그들 부모를 향해 축복을 하면서도, 특히 그의 어머니를 향해서는 아기의 생애에 만나게 될 운명적 시련에 관련한 예언(豫言)도 전해 주었다(34-35절). - 그가 본 주님의 생애에는 어떤 모습이었나? 예수의 말씀은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지만 거부하는 자에게는 자신들의 마음을 찌르듯 말하는 예수에 대하여, 적개심과 반발도 불러올 것이기에, 그로 인한 수난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그를 보는 모친의 가슴은 찌르듯 아플 것이다.
5) 결국 성령의 사람, 시므온은 그곳 성전의 참 주인이신 아기 예수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를 경배하며, 그의 존재가 세상에 오셨음을 알리고 높이며, 특히 그 미숙한 어린 부모로 하여금 아기 예수의 미래에 대하여 인지하고 대비시키는 커다란 도우미가 되었다.
2, 구약 / 출1:15-2:10 /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이스라엘 역사의 한 축인 모세가 태어난 시절은 너무도 엄혹(嚴酷)하였다. 그때엔 나라도, 민족도 형성되지 못한 채 살던 시절이었고, 그것도 이방 땅인 이집트(애굽)에서 400여 년 넘게 얹혀서 살아왔기에, 민족의 주권이나 인권이란 것도 아예 거론할 수 없이 지내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애굽 왕이 바로란 존재는 하늘의 신만큼 높고 큰 권세자 이기에, 그의 지엄한 명령은 모두가 목숨을 걸고 순복해야만 살아남을 시절이었다.
그런 여건에서, 지금 바로의 맞춤형 특별명령이 히브리 산파들에게 떨어졌다. ‘해산을 도울 때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1:15-16절). 그 이유는 그곳에 급속히 불어나 번성하기 시작한 히브리인(아브라함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하여, 바로가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탄압이 거세졌고, 종족 멸절까지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큰 위기였다.
모세는 그런 엄혹한 시절에 히브리인의 아기로 태어났다(2:1-2절). 태어나자 죽어야 할 존재로 세상에 왔다. 마치 아기 예수가 탄생하면서 맞이한 헤롯의 아기 학살 명령 때와 같았다(마2:12-18 참조). 하지만 본문은 그런데도 아기 모세가 어떻게 생존하여서, 결국은 출애굽하게 하여 백성의 해방자요 가나안을 상속하게 한 위인이 될 수 있었는지를 전한다. 큰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기를 돌보고 지켜낼 여인들의 섬세한 손길들 때문이었다.
1) 히브리 산파들인 십부라와 부아 두 여인들의 역할이 빛났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어기고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면서(18-19절), 하나님의 백성인 사내 아기들의 생명을 보전해 냈기 때문이었다(17, 20-21절).
2) 레위인 출신인 엄마의 강인한 사랑과 돌봄 때문이었다. 그는 건강한 아기가 커서 직접 돌볼 수가 없을 만큼의 3개월간, 아들을 숨겨서 키웠다. 그 후에는 나일강 강가에 갈대 상자에 담아 띄워 보냈다. 하나님의 손길과 품에 아들을 맡긴 것이다(1-3절). 그 결과는 어땠나? 얼마 후엔, 유모의 신분으로 친자식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이며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출2:5-9).
3) 이런 극적인 상황을 주도한 인물은 아기의 누나인 미리암이었다. 나일강의 물결을 따라 갈대(파피루스) 상자에 담긴 채 떠내려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쫓아갔었기 때문이다(4-9절). 그 바람에 그는 목욕하러 나일강에 왔다가 그 문제의 상자를 보면서 그 안에 담긴 아이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바로의 딸을 만나게 된다. 그때 누이는 기지를 발휘해서 유모가 필요한지를 묻고, 허락을 받아 결국 친모를 유모로 소개한 주역이 된 것이다.
4) 바로의 딸의 협력은 모세가 동족인 히브리 노예의 일원이 아닌 바로의 궁정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성장하고, 나중엔 출애굽의 지도자로 뻗어가는 데 결정적 밑거름이 된다(10절). ‘건져냄’이란 뜻을 가진 ‘모세’란 이름도 그녀의 작품이었다. 애굽에서는 ‘아들’이란 뜻을 가졌는데, 이는 공주의 양자로 입적됨을 의미한다. 이런 주변 여성들의 뜨거운 사랑과 협력으로 결국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자, 민족의 해방자인 모세가 등장한 것이다. 그가 어찌 이 은혜를 잊겠나-!
3. 서신서 / 딤후 1:3-14 /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바울의 옥중서신 중에 하나인 본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자 젊은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이다. 본문은 목회에 힘겨워 하는 디모데를 다시 고취하고 격려하여, 그에게 부여된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의 직무를 충실하게 감당하도록 하려는 바울의 뜻으로 가득하다(4, 11-14절). 그 고취의 핵심 방편(方便)으로 바울은 두 가지 것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1) 디모데의 영성 안에 있는 조상들로부터 전승(傳承)받은 믿음의 힘을 상기시켰다. 디모데에게는 거짓이 없는 순수한 믿음이 있었는데, 바로 그 귀한 믿음은 그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인 유니게 속에 있었던 것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곧 신앙 3대의 아름답고도 힘 있는 고귀한 영적 유산이 그에게 확고히 있어서, 커다란 동력이 됨을 기억하게 한 것이다(4-5절).
2) 바울은 그가 목회자로 안수받으면서 주님께로 부터 받게 된 소명(召命)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었다. 그 점을 상기시키면서 바울은 담대히 권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6-8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3-14절). 이런 선배의 뜨거운 권유를 받은 디모데의 그 후 사역이 어떠했을까? 분명 재기에 큰 힘을 얻었으리라.
o 한 해가 저물었다. 오늘 지금까지의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동시에 나를 돕고 지켜봐 주고 응원해 준 주변 분들의 사랑의 힘 때문이었다. 배우자들, 가족들, 목회자와 교우들, 이웃들, 그리고 지근(至近)에서 격려와 비판을 보내 준 많은 분들 덕분이다. 그러기에 나의 삶과 생애는 더욱 가치가 있고 무게가 있음이다. 이게 내가 더욱 힘을 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