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6-18, 사 11:1~9, 히 1:1-12
오늘은 2023년도에 오신 아기 예수를 기쁘게 맞이하는 성탄일이다. 그렇다면 아기 예수가 오신 일이 왜 그리 반갑고 기쁜가? 그 이유를 보는 시각은 다양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까닭은 ‘길 잃은 인류’에게 길을 찾게 할 생명의 빛이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 본인 자신이 자신의 정체성에 관련해서 친히 언급하신 말씀, ‘나는 길(the Way)이요 진리(the Truth)요 생명(the Life)이니’(요14:6)라는 말씀 안에, 우리가 그의 오심을 기뻐할 모든 이유들이 담겨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그 종교들은 대부분 종족(種族) 또는 민족(民族)을 장악하거나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나라의 문화와 윤리를 비롯한 삶의 가치관과 스타일 모두를 주도한다. 우리나라만 보아도, 삼국시대와 고려조에는 불교가, 이조 때에는 유교가,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대사에 이르러서는 기독교가 합세하면서 어느덧 다종교 국가가 된 상태이다. 그런 중에도 무속종교인 샤머니즘도 꾸준히 우리 민족의 의식구조에 영향을 끼쳐 왔다.
인간에게 구원을 안겨 줄 종교는 흔치 않다. 대체로 고등종교 정도가 되면, 인간에게 내세와 미래와 구원을 가르치며, 삶의 윤리를 제시한다. 그러기에 종교가 그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심대하다. 예컨대, 세계 2차 대전을 발발하여 인류에게 커다란 피해와 상처를 안겨 준 독일과 일본을 비교해 보면, 금방 종교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한다.
패전 후, 독일은 이스라엘을 비롯해 주변의 나라에 절대적인 사죄와 배상을 시행해 왔다. 지금까지도 계속한다.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변명과 부인과 발뺌으로 피해 당사자 국가들의 분노와 증오심을 갖게 한다. 왜 그렇게 두 나라가 차이가 나는가? 바로 종교의 영향력 때문이다. 독일은 종교개혁자를 배출할 만큼의 기독교 국가이다. 하지만 일본은 토속 및 민속과 가족신 종교집단이다. 경배는 있지만, 가르침이나 윤리를 세워 줄 말씀이 없는 종교집단이다.
그러기에 두 나라 모두는 자기들이 저지른 범죄와 잘못에 대하여,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회개와 사죄를 구원의 핵심으로 가르쳐 온 기독교 국가인 독일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잘못에 사죄하였다. 하지만 온갖 샤마니즘과 신사(神社)종교(잡신)에 붙들려 살아온 일본은 그들의 과오를 깨우치고 회개시킬 말씀이 없었다. 길과 진리를 찾아줄 신이 없음이다. 그러기에 국가이익 추구과 책임회피의 집단이 되고 만 것이다. 회개를 모르는 뻔뻔한 집단이 되었다.
지금 중동전쟁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모습에서도 그들이 붙들고 있는 종교의 힘의 특징이 여실하다. 두 나라는 율법 종교의 추종자들이다. 칼은 칼로, 총은 총으로 맞서는 보복 윤리에 투철하다. 어찌 보면 저들은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자유로워질 무리들이다. 그러기에 그들 문제의 해답은 따로 없다. 예수의 복음이 그들 사이에 들어가, 화해와 평화를 위해 서로 공생과 공존의 장에 나오도록 기독교 국가들의 강력한 도움 내지 압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성탄을 통하여 예수께서 보여주신 생명의 길은 바로 은혜(恩惠)와 진리(眞理)란 양(兩) 축이다(요1:15-17 참조). 이것은 길 잃은 세상을 구원해 낼 가장 필요한 구원의 다리이다. 은혜만이 아니라 ‘진리와 함께’이다. 진리만도 아니라 ‘은혜와 같이’이다! 이 둘은 조화하고 함께하면서, 서로를 채우고 보완하여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주기 때문이다. 이 둘은 마치 우리 육체의 근간이 되는 혈육(血肉)과 같다. 은혜가 피라면, 진리는 살과 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성탄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를 함께 안겨 주신 하나님 앞에 모였다. 은혜와 진리는 본래 히브리어 개념 쌍이다(출34:6, 미7:20, 시40:9-10, 85:10참조). 이런 구원의 두 축(軸)들은 종교가 고등종교와 구원과 생명 종교가 되기 위한 핵심적 요소들이다.
그렇다면 은혜는 어떤 건가? 내가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위로부터 거룩한 뜻을 담아서 거져 받은(주어진) 선물들을 말한다. 따라서 은혜는 위에서(외부에서) 나에게 내려와 주어진 것이기에, 성격이 수직적(垂直的)이다. 그 느낌은 나를 감싸는 모성애(母性愛)처럼, 포용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이다. 이성적이라기보다 감각적이다. 이는 물과 피와 같아, 생명력이 흐른다. 그래서 ‘왜’라는 물음에서부터가 아니라, ‘아멘’이라는 복종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성격을 갖는다.
진리는 어떤가? 그 은혜가 공급해 주는 생명력이 제대로 작동하고 흐르도록 길이 되고 다리가 되기에, 선(線-line)과 같고 뼈대와 같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들, 그리고 규칙과 윤리들이 모두 이 진리의 자료가 된다. 모세의 율법과 예수의 말씀도 모두 진리의 빼대들이다(17절). 여기에는 틀과 골격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에, 그 성격은 항상 바르고 공정하며 의롭고 참이어야 한다. 따라서 비록 힘들어도, 치우침이나 편협이나 야합이나 거짓이 끼어들면 절대 안 된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이러한 은혜와 진리를 우리가 하나로 누리며 살게 하려고 오셨음을 알리면서, 그를 믿는 우리가 그분이 제공해 주신 은혜와 진리의 충만한 생활을 누리고, 성령을 통하여 주변의 세상 만민들도 그 구원의 세계에 들어오도록 이끌어가게 하신다.
1. 복음서 / 요 1:6-18 /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성탄 관련한 여러 기사에서 본 요한복음은 예수란 존재의 오심과 등장이 이 인류사에 안겨 준 결정적 의미와 영향에 무엇인지를 집중하여 전한다. 그중에서 본문은 영원하신 존재인 신(神)이 허무와 부패할 존재의 틀인 육신(肉身)의 옷을 입고, 인간으로 오셨음을 알린다. 실로 대 파격(破格)이었다. 이런 증언은 당시에는 큰 거리낌이요 비웃음거리(가현설)였지만, 본 복음서는 이 점을 유독 강조하면서, 육신을 입으신 예수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된 빛을 집중해 조명한다. 바로 이 영광의 빛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은혜와 진리로서 나타난 것이다.
1) 여기에서도 예수의 선발대원으로 이 세상에 온 세례자 요한의 소개가 먼저 나온다(6-8절). 따라서 여기에서도 요한은 자기가 빛(구원자) 자체가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이며,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빛이신 그(예수)를 믿게 하려 한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자신을 좇으려는 당시의 많은 무리가, 그들의 시선을 오직 오실 분인 예수께로 돌리게 했다.
2) 그러면 요한이 밝힌 ‘참 빛’인 그이는 누군가? 여기서 요한은 매우 놀라운 선언을 한다. 본래부터 그는 세상에 절대적인 연고권과 지배권을 가진 분이셨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자요 주인이었고, 세상의 모든 일체가 그가 지은 피조물이었기 때문이다(10절). 그러기에 그의 오심인 성탄은 창조주가 바로 ‘자기 땅(집)에 오신 일’이다(11절, 상). 남은 집에 방문하신 것이 아니라, 집주인이 자기 집을 찾아오신 일이다. 그러니 어찌해야 하나?
3) 요한의 이런 증언을 대하면서,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존재와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의 증언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이 땅과 이 거주지와 내 생명 모두가 근본적으로 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주인이 당신의 것들을 관리해달라고 맡기며 내어준 것(위탁)을 가지고 살고 있는 한시적인 관리자들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놀라운 사실을 아는 자보다도 모르고 사는 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11절). 무지한 다수가 주도하는 세상이었으니, 어찌 되겠는가!
4) 그러나 주님은 절망이나 포기가 아닌, 희망(希望)을 보이신다. 다수의 무지한 자들 가운데에서도 당신을 보면 즉시 알아보고 믿으며 따라올 자들, 곧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 이 땅에는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획득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12-13절).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예수의 자기 계시(啓示)를 전적으로 긍정하고, 그에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드리고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다(2:23, 3:18, 요일3:23참조). 물론 예수의 제자들은 거기에 일차적으로 해당될 부류의 사람들이다(요17:6-9 참조).
5) 그들에게는 눈이 열려서, 말씀(로고스)으로 오신 예수, 인간 되어 오신 하나님 예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 세상 한복판에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 설레게 될 것이다. 그런 체험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에게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으로 접하게 된다(14절). 그것도 단순하고 가벼운 은혜가 아니라, ‘은혜 위에 은혜’(one blessing after another)로 경험한다(16절). 곧 독생자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일이다(18절).
6) 이로써, 이스라엘은 말씀과 은혜로 오신 하나님을 두 차례 경험하게 된다. 첫째는 모세를 통해서 주신 계명의 말씀인 율법으로, 둘째는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통하여 주신 은혜와 진리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17절). 다만, 죄의 법을 좇는 모세의 율법은 생명의 법을 제시한 예수의 은혜와 진리에 흡수되고 융합(融合)되어 승화(昇化)된 모습을 보이면서, 그 수명을 다하게 된다(롬7:5-6, 8:1-4 참조). 곧 예수로 인하여 인간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2. 구약 / 사 11:1-9 /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견하면서, 그가 이 세상에다 어떤 내용의 은혜와 질서를 제공하실 것인지를 예고한 내용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오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앞서 요한이 증언한 바대로, 은혜와 진리를 세상에 충만히 부어 주시고(3-5절), 이 세상이 약자와 강자가 함께, 낮은 자와 높은 자가 함께 더불어 사는 평화의 장소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6-8절). 이는 곧 세례 요한의 성취에 관한 증언과도 일치한다.
궁극적으로는 오실 메시아가 이룰 나라는 그 어떠한 가해(加害)나 빼앗김 등으로 인한 상해(傷害)가 없는 나라인데, 이는 그만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한 까닭이다(9절).
1) 여기에서 오실 이가 다윗의 줄기나 뿌리‘라고 하지 않고, 그의 아비인 이새의 싹과 가지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이는 다윗 왕조에 대한 심판을 나타내면서도 그 왕조를 없앤 것이 아니라 베인 나무에 견주신 까닭이다. 그래서 다윗이 아닌 그의 아비인 이새를 메시아 탄생의 그루터기로 삼고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1절, 삼상16:1, 미5:2참조).
2) 메시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분이시다(눅1:35참조). 그렇게 오신 분에게는 그 위에 여호와의 영이 항상 함께하신다. 어떤 영이신가? 지혜(wisdom)와 총명(understanding)의 영이시다. 모략(councel)과 재능(power)의 영이시다. 지식(knowledge)과 여호와를 경외(the fear of the Lord)하는 영이시다(2절). 그런데 이런 영의 내용은 오실 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를 영접할 모든 이들에게 여호와 경외에 도움 되도록 은혜(恩惠)로 나누어 주실 선물들이다.
3) 성령은 또한 진리(眞理)의 영이시다(요14:17). 그러기에 메시아가 내리는 판단은 세상과는 차원이 크게 다르다.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3절). 그의 판단 기준은 공의(公義-righteousness)와 정직(正直-justice)과 신실하심(信實-faithfulness)이다(4-5절).
4) 메시아인 당신의 아들을 보내실 여호와의 뜻은 그렇다. 곧 본래부터 은혜와 진리의 본체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그에게 있는 은혜와 진리를 세상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요1:12-13 참조)에게 주셔서, 받은 그들로 하여금 어둠에 있는 세상 만민을 변화시키고 구원해 내도록 계획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이 은혜와 진리의 성령이 서로 차이와 다름으로 맞지 않는 이들 모두를 거듭나게 하여 공존, 공영, 공생의 평화 세상을 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의 우리는 하나님의 그런 원대한 세상을 이루려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3. 서신서 / 히 1:1-12 / “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본문은 주의 백성이 예수를 어떤 분으로 맞이할 것인지를 히브리 기자를 통하여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종말(終末)을 사는 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실 매체로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택하셨음을 알린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충만한 은혜와 진리이시다.
1) 이 아들 예수가 은혜가 되신다는 것은 그가 만유의 상속자이자 만물의 창조자이지만, 하나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씀으로 오신 분이시는 사실 자체에 있다(1-2절). 동시에 그가 하나님 영광의 광채(光彩)이시고 그 본체의 형상이시며, 만물을 붙드실 능력의 말씀이시고, 속죄(贖罪)의 은혜를 죄인들에게 안겨 줄 지극히 크신 분이다는 사실이다(3절).
2) 오신 예수가 진리도 되심은 이 주님은 부리는 천사와는 완전 다른 하나님의 맏아들로서(6절, 롬8:29,계1:5), 그의 보좌는 영원무궁하고, 그의 통치의 막대기는 공정하다는 데에 있다(8절). 동시에 이 주님은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의를 미워하셔서, 하나님이 그런 주님에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시고, 동료들 위에 높이 들리셨다는 데에 있다(9절). 곧 우리 미래의 비전이다.
3) 그 밖에도 주님은 태초부터 땅의 기초를 두신 분이고, 하늘도 지으신 분이시다. 천지가 없어질지라도 주님은 영존하신다. 보이는 그 모든 것 다 사라져도, 주님은 여전히 무한하신다(10-12절). 이런 영원한 분이 지금 낮고 천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 이 땅에 성육하여 오셨다.
o 그러니, 이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중의 은혜인가! 이제 우리는 성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에게 순복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그는 우리의 어두운 과거를 씻어내 주실 분이시고, 현재를 건강하게 세워주실 분이시며, 미래를 영광과 영생으로 채워주실 구원자이시다. 그를 향한 믿음과 충성으로 은혜와 진리의 사람으로 굳게 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