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상 2:1~10, 눅 1:39-56. 히 11:1-3, 8-16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상징들이 많다. 교회 강단의 촛불은 벌써 세 개를 밝힌다. 세상 곳곳이나 상점들에서도 성탄 트리와 장식물들이 제법 많이 내걸려 있다. 그리고 구유 가운데에 오신 아기 예수의 정신과 뜻을 구현하기 위하여, 전국의 곳곳에서는 가난한 이들과 고통 중에 사는 이들을 찾아서 나름대로 사랑이 담긴 성탄 선물도 전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 일반의 대체적인 의식들은 성탄에 그리 관심이 없다. 예수와 그의 종교인 기독교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일상생활에만 전념하여 살고 있을 뿐이다. 시집 장가가며 아이 낳고 자기 생활에 매여 살다가 때 되면 죽어간다. 이런 모습은 아마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와도 여전히 그와 같았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前)인 노아 홍수로 인한 심판 때에도 그러했다(창 6장 참조).
그렇다면 대체 예수님은 왜 오셨는가? 누가 당신을 그토록 기다리며 오시길 요청한다고 해서 오시는 건가? 아무리 보다도, 당신의 오심에 그리 주목하는 인간들이 많지 않아 보이는 데에도 불구하고, 오시는 당신은 왜 인가? 반면에 인간들이 당신의 오심에 대하여 집단적인 항변이나 거부를 한다면, 오시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단 말인가? 혹 우리 인간에게는 그렇게 따져 물을 수 있는 자격은 과연 부여되어 있기는 한가? 이런 기회에 두루두루 물어본다.
답은 이 내용 안에 있다. 이 세상과 모든 만물은 창조주이신 당신의 것이요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주권과 관리 아래에 둔 만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당신의 소속된 만물들이 잘못되거나 온전치 못하면, 그대로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전 지구촌이 모두 당신의 것이요, 인간들도 당신의 소유이며, 그들의 삶의 일체도 모두 주인으로서는 방치해 둘 사항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집주인이 자기 소유물들에 대한 관리권을 행사하는 일과도 흡사하다.
따라서 주인의 오심은 두 가지 차원을 다 고려한 이유로 본다. 하나는 당신의 독자적인 필요성과 판단에 의해서이다. 또 하나는 관리 현장의 간곡한 요청에 의한 것이다. 이런 일은 출애굽 당시의 하나님의 개입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났다. 하나는 고통 하는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담긴 탄원 때문이다(출3:6-10참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의 이 세상 강림은 어떠한가?
오래된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따른 성취의 측면이 분명하다. 이런 일은 인간들의 요청 이전의 하나님 자신만의 독자적인 결단에 의한 것임이 확실하다. 아브라함, 모세, 선지자들에게서 잇따른 강림에 대한 약속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 만물의 주이심을 확증하시고자 하시는 결단을 내리신 까닭이다. 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愛)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심판(審判)도 집행하실 분으로 알리고자 하심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시선과 관심은 우리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오시는 메시아를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맞이할 것이냐는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준비된 자들에게는 성탄(聖誕)의 날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을 뵙게 될 때이지만, 준비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죽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심판의 하나님을 만나는 때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구약 본문).
그러면 어떤 자세와 준비로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하면 좋겠는가? 바람직한 모습은 무엇인가? 오늘의 세 본문을 종합적으로 참고하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곧 오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신실한 마음과 행동으로 그를 의지하고 구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즉 믿음의 준비를 탄탄하게 하고 맞이하는 모습이 절대 필요하다.
그 점에서, 구약에 나타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는 믿음의 승리를 취한 자들의 기쁨을 대변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마리아의 노래도 마찬가지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사람)에게 복이 있도다’(45절)란 엘리사벳의 찬미에서 믿음으로 순복한 자에게 임한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지도 고백하고 있음이다. 서신서인 히브리서 11장의 내용들도 믿음에 의한 승리를 맛본 자들의 명단과 특징들을 나열해서 전한 것도 그 이유이다.
그렇다. 성탄의 은혜를 구하는 모든 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믿음이 안겨 줄 하늘과 땅의 풍성한 역사와 생명을 맛보며 사는 자들이다(히11:1-3 참조).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그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서 증거(證據)를 얻으며 사는 자들이다. 동시에 보이는 기존(旣存)인 것보다는 앞으로 나타날 내일과 미래의 것에 더욱 기대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곧 역사는 기존의 낡은 것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이 제시해 주신 영원한 새것에 의하여 나가는 것임을 믿고 보다 온전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1. 구약 / 삼상 2:1-10 / “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
본문은 개인적 경험과 집단적 경험을 함께 올린 내용들이다. 개인적 경험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무(無)자식으로 인한 슬픔과 그로 인한 질곡(桎梏)에서 벗어나도록 그에게 기쁨과 승리를 안겨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를 담고 있다. 집단적 경험은 그런 한나의 경험은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나처럼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동일한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시는 여호와이심을 공동으로 고백하게 한다.
따라서 본문은 한나의 개인 기도와 고백을 담은 개인적 시편(詩篇)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을 넓은 틀 안에서 찬양하는 집단적 시편이기도 하다.
1) 한나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확고한 믿음을 보시고, 그의 삶에 어떤 영광과 변화를 안겨 주었는지를 매우 자세하게 소개한다. 그의 마음은 슬픔에서 기쁨으로 채워졌고, 그의 신분(뿔)은 주변보다도 훨씬 우월해졌으며, 그의 입술은 자기를 무시하던 자들에게 담대히 할 말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실로 천지개벽(天地開闢)과 같은 대변혁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믿음은 대체 어떠하였기에 그러했던가?
➀ 자식 없음에 따른 깊은 슬픔과 외로움을 안고, 여호와 앞에 자신의 슬픈 마음과 원통함을 쏟아내는 믿음을 가졌다. 즉 자신의 억울하고 원한의 문제를 인간에게서 풀기보다는 문제의 해답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려 간구하는 믿음을 가졌다(삼상1:12-16절 참조).
➁ 그의 사정을 듣고 난 엘리 제사장이 그에게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원하노라’라며 축복하자, 그 말씀을 믿고 다시는 얼굴에 근심 빛이 없이 살았다. 그런 분명한 믿음의 여인을 보신 여호와께서는 그 부부에게 생명을 잉태케 하셔서, 아들을 안겨 주셨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선지자 사무엘이었다(1:17-20절). 그런 체험과 응답을 받은 여인의 기도는 이제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2) 이 한나의 그러한 믿음 위에 승리를 안겨주신 여호와는 이제 모든 믿는 자들이 바라보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구원자 여호와가 되신 것이다. 어떤 하나님이 되신 것인가?(2-10절)
➀ 유일한 반석(盤石)이 되신 하나님이시다(2절). 가장 확실한 구원자가 되신 것이다.
➁ 인간의 모든 행동을 당신의 무게 추에 달아보시는 지식(知識)의 하나님이시다(3절). 교만한 말이나 오만한 말을 일삼는 자인지, 겸손하고 온유한 자세로 살고 있는지를 구별하신다.
➂ 기존의 상황을 완전히 반전(反轉)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4-8절). 용사의 활은 꺾고, 쓰러진 자는 힘을 주셔서 일으키신다. 풍족하던 자에게 품을 팔게도 하시고 주리던 자에는 배부르게 하시며, 임신 못한 자에겐 무려 일곱을 낳게도 하시고(한나) 많은 자녀를 둔 자는 도리어 쇠약하게도 하신다(부닌나).
➃ 이 세상을 떠받치는 모든 기초가 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그 위에 세계를 세우셨다(8,하)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지옥에도 보내시고 천국에도 올리신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신다.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가난하고 빈궁한 자는 일으키시며 올리시고,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셔서 영광의 자리도 차지하게 하신다.
➄ 당신의 백성(성도)들은 지켜주시지만, 악인들은 어둠 속에서 멸망 당하게 하신다(9절).
➅ 그에게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10절.상).
➆ 세우신 왕에게는 힘을 주시고, 기름을 부어 세우신 자에게도 승리를 안겨 주신다(10절,하)
2. 복음서 / 눅 1:39-56 / “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福)이 있도다 ”
일명 <마리아의 찬가>로 알려진 본문은 앞에서 언급된 한나의 찬미와 그 맥(脈)을 같이한다. 그것은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온 처녀 마리아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하신 일이, 그녀에게는 비천(卑賤)함에서 벗어나 만세(萬歲)에 복 받은 여인으로 칭송받게 된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복(順服)하는 태도를 통하여, 그 축복의 주인공이 된 일을 전한 내용에서 더욱 그러하다.
1) 마리아가 유대의 어느 산골 동네에 기거하는 친족이자 사가랴 제사장의 아내인 엘리사벳을 찾아가 문안하였을 때(39-40절), 무척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미 6개월을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지내던 태아(요한)가 뛰어놀기 시작하였고, 어미인 엘리사벳은 성령(聖靈)의 충만함을 받아서 큰 소리로 찾아온 처녀 마리아를 향하여 축복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을 담아본다.
☞ ‘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예수)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마리아)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問安)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요한)가 내 태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마리아)에게 복이 있도다’(42-45절, 1:38절 참조).
2) 천사의 방문을 받은 여인들의 만남은 아주 특별했다. 먼저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시면서, 그들 사이에게 형성되었던 기존의 질서가 새로운 질서로 대체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저들은 성령의 일깨우심으로 복중의 아기가 바로 일반 아이가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늙은 친족인 엘리사벳은 물론, 그의 복중의 아기인 요한까지도 이 젊은 친족인 마리아와 그의 태아를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며 축복하게 되었다.
☞ ➀ 늙은 친족 엘리사벳과 그 태아 요한이 아기 예수를 향한 첫 경배자들이 된다(43-44절),
➁ 두 태아들(예수와 요한)의 만남도 모태에서부터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졌다(44절).
➂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천사의 수태고지에 대한 마리아의 믿음의 응답에 의해 성취된 것임을 엘리사벳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되었고, 그러기에
믿음의 역사를 이룬 주인공인 마리아가 축복을 받게 되었다(45절, 34-38절 참조).
3) 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리아의 입술과 마음이 활짝 열렸다(46-55절). 어떤 찬양인가?
➀ 비천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을 건져내어 만세에 복이 있는 자로 세우심을 찬양함
➁ 당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대대로 당신의 긍휼하심을 베푸심을 찬양한다.
➂ 마음과 생각이 교만한 자는 흩으시고, 권세자들을 내리치시며, 비천한 자는 높이시고, 주린 자에게는 좋은 걸로 배를 불리시고,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신다. 이런 은혜와 새 질서에의 참여는 그의 종들과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영원히 베푸실 은혜이다.
3. 서신서 / 히11: 1-3. 8-16 / “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아브라함-사라)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
여기에서도 믿음의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인류사에 얼마나 크게 그 증거와 빛을 드러냈는지를 전한다. 그 핵심 인물들은 바로 아브라함과 그 부인 사라이다. 저들은 75세의 늙은 나이에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여호와께서 인도하신 가나안에 들어온 부부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자식을 두지 못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자식을 낳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그 약속을 믿었고, 결국은 그 약속대로 하늘의 별과 해변의 모레와 같은 수많은 후손을 둔 조상이 된 것이다(8-13절, 창18:10-15, 롬4:16-18).
1) 그들은 믿음을 통하여 증거를 얻어낸 최상의 모델들이다(1-2절). 비록 주어진 세계의 환경이 자신들을 힘겹게 만들었어도(자식 없음),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복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살면서, 세상의 한계와 제약의 벽을 믿음으로 뛰어넘으며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미래 세계의 주역이 되었다(창12:1-3참조).
2) 이들 신앙의 특징은 현세에 뿌리를 두고 살지 아니하고, 자신들을 사랑하고 말씀으로 삶을 열어주신 하나님이 계신 곳을 자신들의 본향(本鄕-a country of their own)으로 삼고 그곳을 바라보고 사는 자가 되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이들은 믿는 자들의 신앙의 지평을 <나온 바 본향>에 머물지 아니하고(15절), 주께서 하늘에다 예비하신 <더 나은 본향>에 두고 살도록 이끄는 신앙의 주인공이 되었다(16절). 그 바람에 제대로 된 신앙인은 이 세상 환경과 여건에 발목이 붙잡혀 넘어지지 않고, 영생의 소망과 믿음의 힘으로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보유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o 대림절은 오셨던 주님을 기념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며 맞이하고자 준비하는 절기이다. 우리는 이 오심의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아야 한다. 강한 믿음과 확실한 약속에 대한 신뢰야말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들을 구원해 줄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 삶을 위해서도 주님을 원한다. 하지만 우리의 궁극적 기다림의 지평은 마라나타(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이다. 그때를 위해 우리는 깨어 살아야만 한다. 심판이 아닌 구원의 그날이 되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