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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성령강림후(3-1) - "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 " / 김은승 목사

관리자 2018-06-07 (목) 17:28 5년전 4956  

본문) 고전 1:18~25 / 눅 14:15~24 / 호 2:14~23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겼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 사회 각 분야에 남아있는 장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겠습니다. 기술을 갖추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육체적으로도 고된 일을 묵묵히 지탱해온 분들입니다. 일의 사업성이 없어서 생계에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참아내서 이분들은 마침내 명장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한편 그 동안 같은 업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길을 찾았습니다. 이 일에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련스럽게 이 일을 고집하는 사람에게 얼른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지혜로운 조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다른 길을 찾아서 인생에 만족을 얻고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마지막 한 사람으로 남은 분들은 그 미련함에 오히려 존경과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을 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어떤 형편에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일제 시대의 압박 속에서, 또 공산주의의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켰던 우리 선진들의 믿음은 가히 존경스럽습니다. 이제 자본주의 시대를 맞아서 맘몬 앞에 신앙을 지켜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어리석다 할 것입니다. 삶의 지향점이 다르고 가치 기준이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생명을 노래하는 우리 믿음을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한 바울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조롱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바울의 설교는 어리석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리석음 속에 하늘의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을 하나님은 틀림없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이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구하면서,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종말론적 신앙이라 합니다. 종말론이라 함은 세상의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신앙이란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도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세상 권세가 마침내 끝을 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때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내는 힘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주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약속을 확증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 속에서 종말을 선취하면서 사는 힘이 있습니다. 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미 오신 주님, 그리고 이미 오신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종말의 때를 지금 여기서 살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 하셨으므로 마지막 종말의 때가 와야만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셨다 하면서도 여전히 다시 오실 날만 기다리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라 함은 지금 그 종말의 때를 살아내는 것인데, 오히려 종말 유보의 인생을 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벌여 지인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이 핑계를 댑니다. 밭을 산 일, 소를 산 일, 그리고 장가 간 일 때문에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런 일들은 충분한 변명거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잔치는 이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유보되는 것이 아닙니다. 잔치자리는 그 자리에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사람들로 채워지고, 그대로 진행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노아의 홍수 장면을 떠올리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종말의 때에 대해 설명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때에 일어난 일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들이 다 멸망하고 말았다(17:27)’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에 대해 비웃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잔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은 잔치보다 자기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더 중요하고 더 지혜로운 선택에 의해 결국에는 잔치를 맛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잔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잔치를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종말을 유보하며 사는 것은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과 저주의 길 가운데 저주의 길을 선택해도 별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만만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악인이 더 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악한 일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필경 망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자기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 늘 불안해 하며 자기 생명을 확신할 수 없다 했습니다(신명기 28:66). 밭을 사고 소를 사며 자기 목숨을 위해 좋아 보이는 일에 몰두하여도 확신이 없고 염려만 더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잔치 자리의 유쾌함과 즐거움이란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종말론적 신앙의 힘을 잃어버린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오해해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살든 믿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으로만구원을 얻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행위 없는 마음 속 믿음 만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결코 실천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잔치의 초대를 거절한 것은 분명한 선택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처녀들에 대한 비유에서도,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여인들은 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종말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금 살아내지 못하면 구원받은 자의 삶을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호세아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입장이 급선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백성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창녀 고멜과도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달래기 시작하십니다. 그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도록 전쟁을 없애시고, 땅은 곡식과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내게 하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암미내 백성이요, ‘루하마내 사랑이 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 조건 없이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 때에 나는 그의 입에서 바알 신들의 이름을 모두 없애고, 바알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억지로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달래 주셔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있기를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과 결단이 없이는 열거된 모든 축복은 허사로 돌아가고 맙니다.


성도가 종말론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종말론적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사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이상, 우리는 하나님 명령을 준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율법에 구원의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믿음의 표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가리켜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십자가의 지혜를 말할 때 우리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이제아무리 하나님을 거부하고 처단하려 해도 결국 실패하고 만다는 것이 아닙니까? 영원히 살 것같고 하늘에 닿을 듯 권세를 누려도 하루 아침에 종말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폭로하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를 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무한한 사랑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랑의 역설은 지혜롭다 하는 그리스 사람들이라도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메시아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자기 믿음을 폐기시킬 수 밖에 없는 걸림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지혜는 가장 약한 것으로 세상의 가장 강한 것을 부끄럽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지혜를 배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을 포기한 자에게 누구도 생명의 위협으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재물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에게 가진 재물로 자랑을 삼을 수 없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지혜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기 때문에 세상은 그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비울 때에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낮아질 때에 높여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성도는 신뢰하고 사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도는 신뢰합니다. 성령께서 이 믿음을 우리 안에 늘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가 어리석게 들리는 사람은 그 안에 성령이 안계시는 겁니다. 설교를 듣고도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그 마음이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세상의 가치에 더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은 돌짝밭입니다. 옥토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에 열매가 맺힐 것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따라 종말론적 인생을 살고, 십자가의 지혜를 따라 살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자기를 낮추면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습니다. 미운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설교도 지혜로운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조롱하면 여러분은 잘 살고 있는 겁니다. 뭐하러 그렇게 교회에 충성하냐고 비웃으면, 여러분이 충성스럽게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냐 하고 말하면, 곧 세상이 달라지겠구나 하고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어리석음이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적당히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오늘 잔치자리에 오늘 기쁘게 달려 가십시오. 가장 어리석은 모습으로 가장 힘있게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사도로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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